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300
299화 황제를 죽여라
새로운 육체에 빙의하는 과정은 언제나 그렇듯 어지러웠다.
레오볼드는 의식이 바닥 아래로 꺼져가는 것을 느끼며 잠에 빠져들었다.
메가시티에서 태어나서 자라기 시작했을 때부터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있었다.
‘아… 그랬지. 내게도 친구들이 있었지.’
친구들이란 바이오백에서 만들어진 인조 사이커였다.
그는 유지하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친구들과 교류하며 우주공간에서의 전투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20세가 채 되기도 전에 실전에 투입되었다.
‘첫 전투에서 친구의 반이 죽었던가?’
그 후로도 친구는 꾸준히 죽어나가서 유지하가 소령 계급장을 달았을 때에는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는 플레이그와의 전쟁이 얼마나 참혹했는가를 가르쳐준다.
유지하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10억을 넘겼던 인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꾸준히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에는 인류연합의 핵심이 되는 시드니 외에는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시드니조차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었지… 그때는 어떻게 그 분위기를 견뎠는지 모르겠어…….’
당시의 인류연합은 이대로 멸망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며 많은 정책을 입안했다.
인류 전체의 유전자를 보존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계속 미루어왔던 개척선단 계획을 승인했다.
개척선단은 태양계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플레이그 군단을 뚫고 나갈 방법이 없어 계속 미뤄지고 있었던 차였다.
그리고 플레이그 군단이 화성 주역, 최종방어선으로 밀고 들어왔을 때 인류는 도박을 걸었다.
개척선단이라도 녹스로 보낼 수 있게 통합우주군의 모든 전력을 쏟기로 한 것이다.
당시 플레이그 퀸은 절대적인 자신감을 갖고 있었고 이는 사실이었다.
인류연합 입장에선 그녀가 방심하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방심하지 않았지.’
개척선단이 방어선을 빠져나가 돌출하기 전, 친위대를 보내 추적했고 침착하게 격멸하는 데 성공했다.
호위함대에는 인류의 희망으로 불리던 유지하 대령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친위대의 화력을 버텨낼 수는 없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약 17시간 만에 개척선단은 완전히 와해되고 말았다.
사실 그 정도의 시간이 걸린 것도 유지하 대령이 목숨을 걸고 싸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우리는 졌다…….’
이후로 유지하는 3년 동안 콕핏에 갇힌 채 전장을 떠돌아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때 플레이그가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콕핏 자체가 에테르를 봉쇄하긴 하지만 건드려 볼 수는 있었을 텐데.
‘어쩌면 나를 보호한 건 선지자의 열쇠…….’
열쇠를 둘로 나누어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하나씩 습득하게 한 것이 선지자의 의도였을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유지하는 과거로 돌아와 플레이그를 멸망시키기 위한 준비에 착수할 수 있었다.
급하게 메가시티를 만들고 군단타격함대를 건조하느라 엄청난 부작용을 양산했다.
인류의 1/3이 적이나 마찬가지였고 수많은 인명이 죽어 나갔다.
그럼에도 유지하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만약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이 할 것이다. 그것이 나의 의무니까.’
그 의무는 명왕성 주역에 나타난 플레이그 퀸을 다른 차원으로 쫓아낸 이후에도 이어져 아스테라까지 그를 이끌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5년 동안, 유지하는 레오볼드란 이름으로 활동하며 아스테라를 통합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플레이그 퀸을 완전하게 끝장낼 준비를 거의 이루어가고 있었다.
‘그 밑바탕이 되는 것이 이 육체…….’
이 육체는 기존 그가 써왔던 것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에테르 오리진은 아직 없지만 세틀러호의 융합로와 동기화되면 엄청난 힘을 끌어 쓸 수 있었다.
그것은 아스테라의 신격과 비교해도 어처구니없는 힘이었다.
이제 그는 단지 상상만으로 골리앗을 종이처럼 구겨 버릴 수 있고 하프늄2 탄두에 버금가는 폭발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육체엔 수십 겹의 사이코키네시스 필드가 깔려 있어 물리적 공격까지 방어해 낸다.
이쯤 되면 인간인가 의심이 될 정도인데, 실제 아르마는 인간이라기보다는 특수한 기능을 가진 인조 신이라고 표현했다.
그녀의 의사가 레오볼드의 의식 속으로 끼어들었다.
「에테르 오리진은 타오르는 태양과 같아요. 그 힘을 완전히 깨우기 위해선 마스터의 육체가 필요합니다.」
‘정확히 어떻게 하는 거지?’
「마스터의 육체를 시동키로 삼아 에테르 오리진을 점화시키는 거죠. 한번 점화하면 결코 꺼지진 않지만,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답니다. 그걸 충족시킬 수 있는 건 마스터의 육체뿐이에요.」
뭔가 대단한 존재를 깨우기 위한 도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따지고 보면 레오볼드의 인생 자체가 그랬다.
‘필요에 의해 만들어져서 플레이그를 박멸하기 위한 도구로 살아왔지… 이제 그것도 끝을 낼 때가 왔어.’
「제가 그것을 돕겠습니다. 이제 마스터의 육체가 깨어날 때가 됐습니다. 에테르 감응력을 가진 자들은 모두 마스터의 존재를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그건 못 숨기나?’
「숨길 이유가 없죠. 이제 남은 적이라곤 오메가 퀸뿐이거든요.」
‘하긴 그렇지…….’
심우주에 있을 미지의 존재들을 제외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오메가 퀸으로부터 들은 얘기가 전부라 진실인지도 알 수 없었다.
「기존 육체와의 동기화를 완전히 끊겠습니다. 10초가 지난 후 눈을 뜨시면 됩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고 의식 깊은 곳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툭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레오볼드는 죽고 유지하가 눈을 떴다.
그가 깨어나자마자 아스테라의 생명체들이 전율했다.
해변가에서 생선이나 잡아먹던 몬스터부터 드래곤인 지갈레온은 물론이고 저 멀리 마레 행성의 지저세계에 틀어박혀 있던 오메가 퀸까지 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아스테라 전체가 새로운 신의 탄생을 축복하는 듯했다.
“…이전의 나보다 강해졌구나. 이게 네가 준비한 것이냐?”
만약 이게 전부라면 실망스러웠다.
물론 그 힘은 오메가 퀸이 보기에도 충분히 강했다.
선지자의 유산을 접하기 전의 그녀라면 패배를 염두에 두어야 할 정도였다.
“이젠 아니다.”
그녀는 링 월드를 손에 넣었다.
그 거대한 구조물은 동력원이 사라진 상태였고 몇몇 구획이 분리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둥지로 만들기 위한 핵심 기능은 살아 있었다.
“본체를 불러올 순 없지만 그 대용품은 존재하지… 제법 앙탈을 부리곤 있다만 너는 내게서 벗어날 수 없다.”
마레의 정복 작업이 마무리되면 아스테라 전체를 손에 넣고 유지하까지 차지할 계획이었다.
알테마와 약속은 안중에도 없었다.
“강한 자만이 선지자의 후계자가 될 자격이 있다. 그러니 내게 모든 것을 바쳐라.”
오메가 퀸의 육체가 마레의 지저세계에서 수복되고 있었다.
* * *
레오볼드는 거울 앞에서 옷을 갖춰 입었다.
뒤에서 주름을 잡아주던 아르마가 권했다.
“지금부터는 유지하라는 이름을 쓰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글세… 갑자기 그 이름을 쓰면 혼란스러울 거야. 당분간은 레오볼드로 하자고.”
측근들은 그렇다 쳐도 다른 사람들은 적응이 안 될 것이다.
유지하라는 이름을 쓰는 것은 지구로 돌아간 이후가 될 확률이 높았다.
방법도 모르고 레오볼드의 의지도 아직은 확고하지 않지만.
어쨌든 새로운 육체는 그의 마음에 쏙 든 모양이었다.
“괜찮군.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실제로도 그렇죠. 지금의 마스터는 대신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답니다.”
“아스테라의 신들은 소신이고? 진정한 신은 선지자뿐이야.”
“굳이 구분을 하자면 그렇다는 거죠.”
수백 년의 수명에 골드 드래곤조차 능가하는 마법, 그리고 아스테라의 신격들을 깔고 보는 권능까지 합치면 신이라 불러 마땅하다.
물론 레오볼드의 자아는 아직도 인류연합의 군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자신이 걸어온 길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선지자에게 확인받고 난 후에는 다소 홀가분해졌지만, 정체성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아무튼 그가 새로운 육체로 갈아탄 것은 어지간한 존재는 다 알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특히 오메가 퀸.
“마레에 숨어서 뭔가 수작을 부리는 것 같지만 일단은 지켜보자고. 우리 쪽도 충분히 대비를 하고 있으니까.”
지금 중요한 건 막바지에 이른 아스테라 통일이었다.
자이움이 악마 사태로 급격히 흔들리자 많은 소왕국들에게서 연락이 들어오고 있었다.
레오볼드는 다수 왕족과 귀족들이 지위와 재산을 보장받고 싶어 한다는 보고를 듣고는 실소를 흘렸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재산까진 보전해 줄 테니까 살고 싶으면 작위고 뭐고 포기하라고 해.”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프로잔 후작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도와줄 수 있느냐고 합니다.”
“대충 어떤 내용이지?”
“현 황제를 죽이자고 하네요.”
“올 게 왔군.”
자이움의 내부적인 갈등이 쌓여오다 한꺼번에 폭발한 느낌이었다.
바라크 황제는 자이움의 기둥인 귀족과 고위관료 어느 쪽에도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었다.
레오볼드에 대한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것도 모자라 조금이라도 악마에 오염되는 영지는 밀어버리라는 잔혹한 지시를 내리니 충성심이 이탈하는 것도 당연한 노릇이다.
민심도 비슷하지만 그쪽은 애초에 황제의 권력기반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에테르 혈통을 가진 자들의 판단이었다.
“단독으로 추진하는 건 아니지?”
“프로잔 후작이 대표를 맡은 후작 연합회에서 맡는다고 합니다. 재상 한 명과도 이야기가 끝났다고 하네요.”
“그들이 작위를 포기하진 않을 텐데…….”
“후작의 발언에 의하면 40%는 재산과 적당한 관직으로 만족하겠답니다.”
나머지 60%는 거부했다는 뜻이다.
생각보다 높은 숫자인 것은 엘브랑데가 어떻게 멸망했는지 들어서 그렇다.
“관직을 맡을 기량이 되는지 테스트는 받아야 된다고 해. 나머지는 별로 들을 필요가 없겠군.”
고위귀족 중 이쪽에 가담할 자가 40%라면 반역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주선을 몰고 가서 황궁을 폭격해도 되지만 엘브랑데처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므로 합병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프로잔 후작이라면 맡겨 볼 만했다.
아르마가 자세한 사항을 보고했다.
“그를 미끼로 황제의 숙청을 이끌어낼 계획입니다. 악마라는 말만 들어도 친위기사단을 동원해 밟아 버릴 테니 귀족들의 공분을 사기엔 충분하겠죠.”
“측근조차 내다버리는 비정한 황제라… 죽어도 원망은 못 듣겠군.”
그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제시되었다.
백미는 자이움 남쪽 국경선, 그러니까 인류제국의 입국관리소 주위에서 악마 사태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이는 인류제국의 군대가 황궁을 향해 진격할 구실을 만들어 줄 것이다.
“좋아. 이렇게 하지. 황궁으로 밀고 들어가야 하니 군대가 필요할 거야.”
레오볼드는 측근 몇 명을 호출했다.
그들은 집무실로 향하다가 가벼운 신경전을 벌였다.
티렌델과 발가드였다.
둘은 예전부터 서로를 라이벌로 가정하고 약간의 충돌을 빚고 있었다.
심각한 것은 아니고 누가 황제의 검으로서 적합한가 하는 문제였다.
티렌델의 주장은 이랬다.
“한 번 배신한 자는 또 배신할 수 있지. 너에게 황제의 검을 참칭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군.”
그 소리를 들은 발가드는 발끈하는 대신 헛웃음을 지었다.
“왕께서 허락하셨는데 네깟 놈이 무슨 상관이냐? 신경 꺼라, 애송아.”
“왕이 아니라 황제 폐하시다. 아직도 바그란으로 착각하고 있는 거냐?”
“호칭에 뭐 그리 신경을 쓰는지 모르겠군. 정작 그는 왕이라고 불러도 아무 말도 않던데.”
“그분의 너그러운 성품을 아직도 모른단 말이냐? 넌 그 성품을 이용하고 있는 거다.”
“재잘재잘 시끄러운 엘프로구만. 내가 얼마나 엘프를 싫어하는지 그 하늘거리는 몸에 새겨줄까?”
“난 지금이라도 괜찮아.”
“오호. 신형 골리앗을 받아서 자신감이라도 생긴 모양이지?”
둘은 금방이라도 뛰쳐나가 한판 붙을 태세였다.
뒤에서 듣고만 있던 카밀라가 한마디 했다.
“시끄럽고 입 좀 닫아요. 집무실에 다 왔으니까.”
“옙, 카밀라 님.”
“알겠소, 부인.”
희한하게도 둘은 카밀라에겐 어느 정도 양보하곤 했다.
아마도 그녀가 레오볼드의 반려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갈레온은 흥미 없다는 듯 앞서서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가 깜짝 놀라서 카밀라와 시선을 마주쳤다.
“뭐죠? 왜 안 들어가고…….”
“방금 내가 뭘 봤는지 당신은 상상도 못할 거야…….”
“대체 무슨 일이에요?”
“이상한 남자가 아르마와 함께 있어!”
이상한 남자?
카밀라는 그를 젖히고 문을 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남자가 레오볼드가 앉아 있어야 할 의자에 대신 앉아 있었다.
거대한 체격을 가진 그는 등을 돌린 채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당당한 뒷모습에서 카밀라는 그가 레오볼드임을 알아차렸다.
“…레오? 당신이에요?”
“아, 맞아. 이 육체로 갈아탄 걸 깜빡했군. 들어와, 카밀라.”
사람들은 집무실로 우르르 들어가 그가 레오볼드임을 확인했다.
“새로운 육체야. 원래 내 육체와 닮았지. 약간 다른 건 아르마의 취향이 조금 섞인 것 같더군.”
“오오… 그렇구만.”
“그림에서 보던 그 모습이군요…….”
“전보단 훨씬 낫네! 귀공자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야.”
“그나저나 레오볼드, 아까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게 너였나?”
“글쎄, 어떨까.”
지갈레온은 레오볼드의 여유로운 모습에서 그가 초월자가 되었음을 확신했다.
그 힘은 그로서도 가늠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이었다.
‘신? 아니야. 그런 건 상대도 안 돼. 전성기의 알테마조차 지금의 그에 비하면…….’
뭔가 아스테라의 규격을 초월해 버린 느낌마저 들었다.
낯선 외모와 목소리가 그런 분위기를 더해주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하지만 굳게 다문 입술과 근엄한 표정, 그리고 옆에 서 있는 아르마는 그가 레오볼드임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그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린 대륙 통일의 목전에 와 있지. 이제 남은 목표는 하나야. 자이움 제국.”
“소왕국이 좀 남긴 했지만 뭐… 시간문제겠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1041년 현재 아스테라에 남은 유력한 세력이라곤 인류제국과 자이움 제국뿐이었다.
수십 개의 소왕국은 대세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실질적인 아스테라 통일이 눈앞에 다가와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이움 공략은 아주 중요해. 인구수가 거의 1/3이나 되거든. 평민들이야 그렇다 쳐도 귀족이 너무 많아서 다 죽일 게 아니라면 세심한 접근이 필요해.”
“세심한 접근이라면, 어떤?”
티렌델이 물었고 아르마가 나서서 계획의 전모를 설명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 데 지갈레온이 턱을 쓰다듬었다.
“자이움은 그렇다 치고 최근 악마놈들이 자주 설치는데 말이야, 어쩔 거야?”
“그에 대한 준비는 되어 있어. 사실 그건 오메가 퀸이 벌이는 아주 작은 실험에 불과해.”
“그 악마놈들 덩치에 비하면 잘 싸우던데 작은 실험이라고?”
“오메가 퀸의 진짜 힘은 그 정도가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내가 전력을 다해도 이길지 의심스러워.”
“그거 못 믿겠는데. 넌 지금 아스테라 전체와 싸울 수 있을 정도라고.”
“날 믿어. 아스테라를 통일한 뒤의 싸움은 아마 꽤 혹독할 거야.”
꼴깍꼴깍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레오볼드가 이렇게 말할 정도니 얼마나 험난한 싸움이 기다릴지 예측도 되지 않았다.
아무튼 일행은 곧 자이움 제국과 전쟁에 돌입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엘브랑데가 아니기 때문에 우주선을 동원하지는 않고 인류제국의 군대만으로 밀어붙일 거란다.
레오볼드는 지갈레온을 쳐다보며 말했다.
“특히 네 역할이 중요해. 공명정대한 블루 드래곤이 자이움 황제의 악행에 분연히 날개를 떨치고 일어났다는 걸 잘 보여 주라고.”
“공명정대한…….”
다들 지갈레온의 평소 언행을 떠올리곤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곧 전쟁이 벌어질 것임에도 이렇게 여유로운 건 인류제국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설사 대전쟁이 다시 터져서 아스테라 전체가 덤빈다 해도 여유롭게 이길 수 있을 정도니 말해 무엇할까.
하지만 최소한의 긴장감은 가져야 했다.
“티렌델과 발가드가 전장에 나가고 카밀라는 프로잔 후작과 함께 뒷공작을 좀 해줘. 이미 얘기는 다 끝났어.”
“좋아요.”
사람 둘과 드래곤 하나가 나간 다음 카밀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레오볼드에게 다가갔다.
“분명 잘생기긴 했는데 위화감이 드는군요. 당신이 아닌 듯한 느낌…….”
“왜, 마음에 안 들어?”
“그럴 리가요. 조금 낯선 기분이 드는 것뿐이에요. 침대에선 어떨까요?”
“나중에 직접 확인해 봐.”
“기대하죠.”
그녀는 레오볼드가 아닌 아르마에게 눈을 찡긋하고선 밖으로 나갔다.
“왜 내가 아니라 널 보는 거지?”
“글쎄요? 전 잘 모르겠네요.”
아르마는 웃기만 했다.
* * *
자이움의 악마 사태는 진화되기는커녕 해가 넘어가자 손 쓸 수도 없이 악화되었다.
수만 명이 사망했고 귀족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바라크 황제는 여전히 강경책만 고수했고 이는 귀족들에게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평민은 그렇다 쳐도 자신들까지 예외 없이 죽이는 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일부에선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귀족 세력을 축소하는 것이라는 음모가 돌기도 했다.
어쨌거나 잔혹한 황제에 대한 불만은 폭발 직전까지 쌓이고 있었다.
자그마한 불씨라도 튕기면 대폭발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 황궁에선 프로잔 후작령에 악마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프로잔 후작이라고 하면 황제의 몇 없는 측근이었다.
최근에는 인류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듯하지만 그럼에도 황제는 그를 아꼈다.
과연 황제는 이번에도 봉쇄령을 내리고 친위기사단을 동원해 영지를 밟아 버릴 것인가?
그 영지가 인구 100만에 가까운 대영지이고 주인이 황제의 최측근이라 해도?
당사자가 아니라면 정말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긴 고뇌가 이어졌고 바라크 황제는 프로잔 후작이라고 하더라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만방에 발표했다.
“누구도,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이 자리에서 밝혀 둔다. 악마는 그만큼 위험한 존재이며 자이움은 놈들을 지상에서 박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포고문을 읊는 황제의 모습은 무척이나 수척해 보였다.
스트레스를 폭식으로 해결하려 했는지 몸은 비만 직전이었고 손을 벌벌 떨며 식은땀을 흘리기도 했다.
황제의 그런 모습에 관료들은 하나같이 탄식을 자아냈다.
“이번 황제는 오래 못 가겠군…….”
“다음은 누가 될까요? 현 황제의 후사라곤 핏덩이뿐인데.”
“다음? 우리에게 다음이 있을 수 있겠나? 자네들은 황궁에 있어서 잘 모르겠지만 밖은 난장판이야. 벌써 10만 명 이상이 악마로 변했다는 소문이 있네. 중앙군은 허수아비고 친위기사단조차 그들을 막지 못해.”
“그럼 어쩌죠?”
“누군들 알겠나? 이대로 제국의 몰락을 지켜보는 수밖에…….”
상황을 가장 잘 아는 황제의 측근들이 몰락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 인류제국과의 국경선에 악마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한두 놈도 아니고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창궐했고 인류제국을 공격하는 중이라고 한다.
물론 인류제국의 군사력은 그들을 무리 없이 막아내고 있다고.
바라크 황제는 그 정보를 접하곤 곧장 친위기사단장을 불렀다.
자이움 중앙군도 최근 기강이 해이해져서 그가 믿을 수 있는 병력이라곤 친위기사단뿐이었다.
“군대를 파견할 수 있겠소? 병사들로는 안심이 안 되니 골리앗이 필요하오.”
“황공하오나 폐하, 국경선에 기사단을 파견하면 인류제국을 자극할 가능성이…….”
황제는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인류제국이란 나라는 없소! 속주국 하나 없는 주제에 제국을 참칭하는 경우가 어디 있나! 그리고 이대로라면 본국이 웃음거리가 돼! 경은 그걸 두고 보고만 싶소?”
“…….”
어차피 블랙 나이트를 파견하게 될 텐데 그게 더 웃음거리가 될 거라는 생각은 못하는 건가?
블랙 나이트는 자이움의 핵심 전력이지만 몽땅 바그란에서 수입한 골리앗이었다.
복제나 역설계를 시도해 봐도 어설픈 열화품만 튀어나올 뿐 품질을 따라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심지어 인류제국은 마운틴포지 전투에서 그 블랙 나이트를 능가하는 골리앗을 배치했고 비행선과 우주선에 이르면 이게 아스테라에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부정적인 생각밖에 들지 않았음에도 기사단장은 황제의 명을 거역하지 못했다.
“프로잔 후작이건 국경선이건 모조리 쓸어버리시오. 악마는 한 놈도 남겨두어선 안 되오.”
“삼가 황명을 받들겠습니다.”
아무래도 제국의 몰락이 눈앞에 다가온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