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ension merchant RAW novel - Chapter 21
차원상인 021화
“첫날이니까 그럴 겁니다. 아마 조금만 지나면 귀찮고, 나태해질 테니 그때 아주 바짝 조여야 할 겁니다.”
“습관처럼 몸에 배게 하려면 그렇게 해야겠지.”
맞는 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우현이 물었다.
“형님! 근데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영주관에서 주문서가 왔네.”
“주문서요?”
닦던 천을 티아에게 주고 건네받은 주문서를 단숨에 훑어 내린다.
“종이 이십만 장에, 커피 30봉짜리 이만 개, 휴지 만 개, 빨랫비누 만 개라…….”
예상 밖의 많은 물량에 절로 한숨이 나온다.
어깨를 축 늘어트리는 그에 레이젠이 피식 웃었다.
“이 정도는 창고에 있는데 뭘 걱정하는가?”
“나가는 만큼 또 들여와야 한다는 게 문제죠.”
“남들은 돈 못 벌어서 안달인데 속 편한 소리 하는군.”
핀잔에 우현은 볼을 한껏 부풀린 채 입술을 삐죽인다.
“그럼, 형님이 그 많은 물건을 다 가져와 봐요. 이런 소리 안 나오나?”
그랬다. 이번이 딱 여덟 번째 거래인데 물량은 초기 물량인 오만 장의 네 배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물량이 늘어서 그런지 최근 들어 차원을 넘어 대륙에 올 때면 급격히 피로가 오고, 몸이 아프다. 라이터의 모래시계 또한 다 차는 데 사흘이나 걸리는 것도 다 그것 때문인 듯싶다.
그렇다고 잘 팔리는 물건인데 안 갖다 놓을 수도 없고, 그저 우현만 죽을 맛이다.
“그나저나 어제 새벽에 담을 넘다 엘레토와 필리온에게 붙잡힌 사람들은 어쨌습니까?”
순간 레이젠의 이맛살이 좁혀 들어간다. 한 달 새 상단 주위에 낯선 이들이 자주 출몰해댔다. 분위기로 보아 물품 판매권이나 종이 제조 기법을 노리는 상단 사람들이 보낸 듯싶은데 개중에는 상단 내 사람을 포섭해 물건을 빼돌리려 한 적도 있어 제법 골치가 아픈 상태였다.
“분위기로 보아 타국 상단이 아닌, 알카인 왕국 상단 사람들인 것 같아 일단 바딘 백작께 넘기기로 하였다.”
“그걸로 해결이 될까요?”
“아마 별 도움은 되지 않을 듯싶다.”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분한 마음은 들지만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다.
그럴 것이 그들을 벌하자니 귀족도 아닌 일반 상단주 신분에 그럴 수는 없고, 그렇다고 바딘 백작에게 넘겨봤자 며칠 가뒀다 풀어주는 솜방망이 형벌에 그치는 터라 더욱 그랬다.
답답한 듯 한숨을 푹 내쉬던 우현은 레이젠을 향해 말을 건넸다.
“그러지 말고 붙잡은 사람을 넘겨주러 간 김에 백작님과 한번 상의해보십시오. 저희가 함부로 나서는 것보다는 그분의 의견을 듣고 하는 것이 더 나을 듯싶으니 말입니다.”
“그리하도록 하지.”
한 가지 문제를 일단락 짓기 무섭게 다음 문제로 넘어갔다.
“참! 커피 포장 건은 어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늘어나는 커피 양 때문에 소네스가 스무 명가량 사람을 들였다 하더군.”
“그래요?”
처음 비닐 포장을 벗기고 팔 때 이렇게까지 손이 많이 갈 줄은 몰랐다.
그럴 것이 30봉짜리 만 개면 무려 삼십만 개다. 그 많은 것을 일일이 포장을 까고 다시 종이에다 싼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서울에서 알바생을 써서 해볼까 했지만 인건비가 만만치 않아 결국 이곳에서 하기로 했다. 물론 벗긴 비닐 포장은 집으로 돌아갈 때 싸 가지고 가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괜히 대륙 사람들에게 보였다 이게 뭐냐며 묻기 시작하면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포장하는 사람들 또한 이 점에 대해 주의시켰고 말이다.
“형님! 근데 이렇게 막 사람을 늘려도 문제는 없겠어요?”
“영지 사람 중에 입 무거운 사람들로 포섭한 데다가 일하는 사람들 모두 종속의 인을 찍어 놨다고 하니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네.”
종속의 인, 흔히 주종 관계인 하인들에게 많이 하는 마법 계약으로 혹시나 있을지 모를 하인들의 반란에 대비해 신체에 제약을 거는 것을 말한다. 여기선 신체가 아닌 말에 대해 제약을 걸어둬 일을 마치고 상단을 나간 후, 이쪽에서의 일을 언급하고 싶어도 저절로 못하게 된다. 억지로 말할 경우, 실신하거나 자칫 목숨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매우 안 좋은 것이건만 제법 돈벌이가 쏠쏠하고, 일도 어렵지 않아 많은 이들이 그 정도는 감안하고 받아들였다. 물론 우현에게는 현실 세계에서 사람을 쓸 경우 들어갈 인건비의 10분지 1도 안 되는 비용을 써서 좋았고 말이다. 알겠다며 끄덕이던 우현은 문득 소네스가 궁금해졌다.
“근데 소네스 형님은 뭐 하고 계십니까?”
이 질문의 답은 레이젠이 아닌 티아가 대신하였다.
“며칠 전부터 장부 정리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다 들었어요.”
“어쩐지 안 보인다 했더니 장부 정리 중이셨나 봅니다.”
순간 우현의 입가에 미소가 감돈다. 어렸을 적 시설에 있을 때 교육 증진을 위한다며 1년간 주산과 부기를 배운 적이 있다. 그 일로 인해 영업사원 시절 거래처 회사의 장부 정리를 몇 번 도와준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받은 정신적 스트레스가 엄청나 지금은 숫자라고 하면 진저리를 쳐대곤 한다. 굳이 보지 않아도 죽을상을 짓고 있을 거라며 조소를 하던 우현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거라면…… 가방에 있을지도 모르겠네?’
우현은 이따가 한번 찾아봐야겠다며 생각하였다.
물끄러미 그런 그를 보던 레이젠이 물어온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건가?”
“아! 그런 게 좀 있습니다.”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속에 세 사람은 어느덧 저택 앞에 당도하였다.
막 안으로 우현이 들어가려는 찰나 레이젠이 물어왔다.
“참! 오늘 집에 가는 건가?”
“예, 오랫동안 비웠으니 이제 가봐야죠. 동생들 얼굴도 보고 싶고요.”
빙긋 웃던 레이젠은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끄덕인다.
“몸조심해서 가고, 나중에 또 보세!”
“예! 다음에 뵙겠습니다.”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던 레이젠은 깜박했다는 듯 급히 말을 건넸다.
“백작님에게 대금이 왔다 들었네. 아마 소네스에게 가면 받을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않아도 대금에 대해 물으려 했던 터라 잘됐다 싶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그와 일별한 우현은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주위 사람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며 이 층에 올라 침실로 향했다.
침대 한편에 둔 가방을 들어 올리고는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역시 있었네.”
빙그레 웃으며 꺼내 든 것은 다름 아닌 주판이었다.
어렸을 적, 주산과 부기를 배울 때 주판으로 배워서 그런지 계산기보단 이것이 더 편했다. 뭐, 구석기 시대 사람이라고 놀림을 받기도 하지만 그래도 항상 주판만은 가방에서 빼놓지 않고 있었다. 웃음 가득한 얼굴을 한 채 양복과 가방을 둘러메고는 방을 나섰다. 계단을 따라 내려간 그는 소네스가 총관실로 쓰는 방 앞에 서서는 가볍게 노크를 하였다.
“들어……와!”
다 죽어가는 목소리에 남몰래 웃으며 문을 열었다.
그 순간 족히 사흘은 안 잔 듯 부스스한 머리 밑으로 시뻘겋게 충혈된 눈에 검은 반월을 드리운 소네스가 눈가에 들어왔다.
‘상태가 심각하네. 반폐인이 다 됐어!’
심하다 싶은 모습에 우현은 조금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때 소네스가 피로에 절다시피 한 얼굴에 가느다란 미소를 그리며 손을 들어 보였다.
“와…… 왔어?”
“형님, 괜찮으십니까?”
“조금 졸린 것 빼고는…… 괜찮아.”
말이 괜찮지, 모습은 꼭 반송장 같아 보인다.
고개를 내젓던 우현은 대체 뭐 하고 있었는지 물었다.
“품목별 매출 현황 파악하려고 장부 좀 봤는데 그게 벌써…… 하아암! 삼 일째 밤샘 중이야.”
늘어지는 한숨만큼이나 몸 또한 늘어진다. 하긴 곁에 쌓인 장부만 언뜻 봐도 삼십 개는 되는 데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숫자놀이를 해야 하니 아무리 마법사라 한들 골치가 안 아플 리 없었다.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우현이 슬쩍 앞으로 다가왔다.
“형님! 저어…… 선물이 하나 있는데…….”
“선물?”
난데없이 무슨 선물이냐며 바라본다. 그런 그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이던 우현은 손에 들고 있던 주판을 꺼내 들었다. 난생처음 보는 그 기괴한 모양새에 잠시 갸웃대던 소네스는 대체 손에 든 것이 뭐냐고 물었다.
“주판입니다.”
“주판?”
“계산을 편하게 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장부 정리할 때 그만이지요. 형님이 요즘 고생하신다고 하셔서 어렵사리 구해봤습니다.”
“그래?”
마법사인 탓에 배움에 남달라서인지 성큼 다가선다.
그런 그의 옆에서 우현은 차근차근 설명해갔다.
복잡할 줄 알았던 조작법이 생각 외로 단순하자 더욱더 배움에 열을 올린다.
간단한 더하기 문제를 예로 풀어보던 소네스는 곱셈과 나눗셈에 대해서 물었다.
이에 그는 주판을 살 때 구입했던 주판 사용법 책에서 베낀 것을 보며 설명해갔다.
처음엔 구구단이나 보수(주판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숫자이다.)라는 것이 좀 어렵긴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적응해갔다. 아무래도 일 년 넘게 장부 정리하느라 계산에 익숙해진 탓인 듯싶다.
“이런 식으로 하면 나중에 익숙해지면 억 단위의 숫자도 계산할 수 있어요.”
“우와! 주판, 주산법이라는 거 정말 대단한데…….”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그에 우현은 남몰래 실소를 한다.
이 정도에 혀를 내두를 정도면 나중에 전자계산기를 보면 기절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런 속내도 모른 채 소네스는 그의 두 손을 꼭 붙든 채 연신 고맙다고 하였다.
“고마워! 진짜 고마워!”
“고맙긴요. 근데 이거요. 제대로 쓰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시간이 걸려도 좋아. 이것만 있으면 이젠 장부 따윈 두렵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어느새 의자 위에 올라서 책상 위에 한 다리를 올린 소네스는 무슨 개선장군처럼 주판 든 손을 번쩍 들어 올린다. 그 기세가 사뭇 강해 마치 꼭 천군만마를 지휘하는 대장군 같아 보인다. 그런 그를 보며 실소를 짓던 우현에게 소네스가 말을 건넸다.
“맞다! 백작님께서 대금을 전해 왔어.”
“그래요?”
재빨리 바닥에 내려선 소네스는 뒷서랍에서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내 건넸다.
“종이 값 만 골드, 커피 육천 골드, 휴지 천 골드, 빨랫비누 천 골드, 세숫비누 천 골드, 빨래판 오백 골드 총합 만 팔천오백 골드로 금괴 61개다.”
주머니 안을 살피던 우현은 금화는 놔두고 금괴 네 개만 꺼내고는 다시 건넸다.
“금괴 네 개가 뭐야? 더 가져가지 그러나?”
“네 개면 됩니다. 그리고 오늘 용병들을 더 들인다면서요. 그 사람들 계약금 줘야죠.”
“그 돈은 지금껏 모아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래도 앞일은 모르는 겁니다. 가져가세요.”
저번에 보증 빚 사건으로 새삼 준비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은 그이다.
있을 때 조금이라도 모아두는 것이 이들을 위해서도, 우현 자신에게도 좋았다.
“알았어! 금고에 넣어 둘 테니까 나중에 필요하면 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