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know nothingness? RAW novel - Chapter 23
8. 판타리아 (2)
유진은 그보다 앞서 있던 사람들이 게이트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무극을 이루었던 그조차 처음 보는 현상이었다.
가슴이 뛰었다.
유진은 앞서가는 용역들을 따라 게이트 안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빛이 그를 감싸 안았다.
이 순간, 그는 홀로였다.
미리 언질을 받은 대로 동요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빛으로 이루어진 길을 걸어 나갔다. 그의 머리 위를 떠돌던 빛이 옆으로 휘거나, 발아래로 흘러가기도 했다.
점차 속도감이 더해졌다.
유진은 자신이 달리는 것인지, 아니면 공간이 그의 등을 떠미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기감에 너무나 많은 변화가 감지되고 있었다.
시시각각으로 세계가 변화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게이트 너머에 있었다.
“뭐야?”
“어…….”
“언제 왔지?”
게이트에서 갓 빠져나온 이들은 전부 비슷한 반응이었다. 깜짝 놀라며 자신이 들고 있던 것을 놓치는 이도 있었다.
무림과도, 지구와도 다른 세계.
판타리아.
눈을 들자, 지구의 것보다 훨씬 큰 나무들이 울창하게 펼쳐져 있었다.
“여기가 판타리아로군요.”
“그냥 나무가 큰 숲인데요? 별다를 건 없네.”
“과연 그럴까요?”
유진이 입꼬리를 올렸다.
판타리아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거대한 괴물들이 수없이 창궐하는 땅이고, 지구의 장비들이 여기서는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였다.
유진은 이제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세계는 자연기가 아주 충만한 곳이다.
하지만 그 안에 미묘한 사기가 퍼져 있었다. 불순물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로 인해 지구보다 훨씬 많은 자연기가 퍼져 있지만, 단전을 통해 정제할 수 있는 양은 극히 제한되어 결과적으로 지구와 다를 바가 없다.
인간들에게는.
하지만 괴물들에게는 다르다.
여기서 나고 자랐다면, 지구에 비해 더 강하고 포악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천기(天氣)부터가 괴물들을 위한 땅이었다.
새로운 세계에 놀라는 것도 잠시, 앞에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기 들어!”
“방어해!”
“전투다!”
정체 모를 괴물들이 토벌대의 선두를 공격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게이트키퍼들이 일제히 진형을 갖추어 무기를 들었다. 피가 튀고, 하늘에서 떨어진 불덩이가 화마를 피워 올렸다.
“전부 정신 차려!”
“무기 떨어뜨리지 마!”
“멍청하게 있지 말고 싸워!”
게이트키퍼들이 연신 소리를 지르며 괴물들을 공격했다.
유진 또한 메고 있던 창을 들었다. 게이트키퍼들에게 주어지는 보급품을 받은 것인데,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나상철 씨는 숨어 있으세요.”
“아, 예!”
유진이 창을 휘두를 때마다 괴물들 여럿이 함께 죽어 나갔다.
그는 비전투 인원들을 지키면서 전선을 돌아보았다.
상황이 좋지만은 않았다.
“제기랄, 미치겠네.”
“정신 똑바로 차려!”
“거기 뭐 하는 거야!”
게이트키퍼들이 연신 소리를 질러 댔다.
여기는 게이트처럼 적의 출몰 지점이 정해져 있지 않고, 바리케이드 같은 것으로 경로를 제한할 수도 없다.
초목에 의해 시야가 제한된 가운데,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적이 끊임없이 달려들었다.
심적인 소모가 클 수밖에 없다.
문득, 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나뭇잎 사이로, 와이번 한 마리가 날개를 접어 몸을 쐐기꼴로 만든 채 수직으로 강하하고 있었다.
와이번이 향하는 곳은 지금 선두에서 싸우고 있는 게이트키퍼들이었다.
유진이 소리쳤다.
“위!”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전투의 소음에 묻혔다.
말로 하다간 늦다.
“여기 지켜 주세요.”
주변의 게이트키퍼들에게 비전투 인원의 안전을 부탁한 뒤, 유진이 창을 들고 뛰어나갔다.
그의 앞을 가로막은 괴물들은 모조리 참격에 쪼개어졌다.
“와, 와이번!”
“조심해!”
그제야 웅성대는 게이트키퍼들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유진은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의 몸뚱이가 와이번을 향해 상승했다.
와이번과 눈이 마주쳤다.
세로로 길쭉한 동공 위로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와이번은 유진을 비웃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대적할 상대가 없는 자신을, 감히 하늘에서 맞상대하려는 인간이 어리석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유진은 입꼬리를 올렸다.
내기를 일으키자 세 단전이 연결되었다. 상단전이 열리면서 그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와이번의 교만한 노림수와, 앞으로 벌어질 일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녀석은 맞부딪치기 직전에 궤도를 틀어 낚아챌 속셈이다.
그래서 유진은 창을 들고 어깨를 뒤로 뺀 다음에.
와이번이 아닌 허공을 찔렀다.
유진의 어깨가 움직이는 것을 본 와이번이 옆으로 움직였으나 도리어 유진의 창이 나아가는 지점에 위치하게 되었다.
예측을 예측당한 것이다.
끼에에에에엑…….
물고기를 작살에 꿰어 낸 낚시꾼처럼, 유진은 와이번의 위에 올라타 놈의 몸뚱이를 아래로 향하게 하여 추락시켰다.
와이번이 몸부림쳤지만 유진은 놓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땅에 처박혔다.
콰직.
지면과 부딪치는 순간, 유진의 창이 꽂힌 부분을 중심으로 와이번의 몸뚱이가 산산조각 났다.
유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와이번의 시체에서 뛰어내렸다.
“어어…….”
게이트키퍼 한 명이 망연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름이 김이원이었나. 유진은 그에게 가르침을 준 적이 있었다.
김이원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또, 또 보네요. 고맙습, 아니, 위험…….”
그가 유진에게 정신을 파는 사이, 괴물이 돌진했다.
유진이 투창했다.
괴물은 미간을 꿰뚫린 채 절명했고, 녀석의 몸뚱이는 관성에 떠밀려 김이원을 덮쳤다.
“으앗!”
괴물을 채 피하지 못한 김이원이 튕겨 나와 유진에게 안겼다.
전장에서 로맨스가 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자세가 되었다.
“어?”
당황한 김이원을 위해 유진은 빙그레 웃어 주었다.
“또 고맙습니까?”
“네, 네.”
“천만에요. 인체기맥도해는 외웠습니까?”
“그게…….”
“다음에는 외워 오세요.”
“예!”
유진은 그를 바로 세운 다음 괴물들을 향해 떠밀었다.
“자, 다시 싸웁시다.”
“아, 예!”
정신을 차린 김이원이 전투를 재개했다. 나름대로 열심이었다.
유진은 머리 위를 확인했다.
피 냄새를 맡은 와이번들이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유진이 소리쳤다.
“비전투 인원들은 수레 아래로 가십시오! 머리 위에 와이번들이 있습니다!”
그의 말에 용역들이 수레에 숨었다. 하지만 유진의 조언이 무색하게, 와이번 한 마리가 곤두박질치더니 수레를 부수고 그 아래에 있던 남자 한 명을 낚아챘다.
주변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떡해!”
“야!”
하지만 아무런 대응도 없었다. 게이트키퍼들은 그가 용역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곧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게이트키퍼들에게 있어서 일반 용역들은 동료에 속하지 않았다.
“으아아아아!”
와이번에게 붙잡힌 남자가 발악했다. 그로 인해 와이번이 더 날아오르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유진의 눈이 거리를 가늠했다.
이 정도 높이면 아직 구할 만하다.
이대로 보내면 남자를 구출할 기회가 없다.
유진은 와이번의 진로를 따라 달렸다. 그러는 동안 게이트키퍼, 그리고 괴물들이 유진의 진로에 걸렸다.
괴물은 쳐 넘어뜨리고, 마지막에 선 게이트키퍼를 향해서는 그대로 뛰었다.
“어?”
게이트키퍼는 자신에게 뛰어드는 유진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땅을 박찬 유진은 게이트키퍼의 어깨를 밟고 다시 도약했다.
그의 몸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뺨을 스치는 바람 속에서 유진은 문득, 추억의 한 조각을 떠올렸다.
젊었던 시절의 일이다. 곤륜의 노인네들이 자신들의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이 강호의 일절이라며 으스대길래, 유진은 그 운룡대팔식을 베낀 다음 자기식대로 뜯어고쳤다.
그리고 신법 대결을 제안했다.
물론 이겼다.
당시 유진에게 패한 곤륜의 노인네는 땅으로 떨어지면서 뜻밖에 파안대소(破顔大笑)를 터뜨렸다.
그 같은 천고의 기재가 나타났는데, 마음에 마(魔)가 아닌 도(道)를 품고 있으니 이는 마땅히 무림의 축복이라고 했다.
그 마음씨가 제법 존경스러웠다.
그래서 자신이 뜯어고친 신법에 운룡낙락(雲龍落樂)이라 이름 붙였다.
부디 옳은 일을 행하라고 했던가.
그래.
유진은 미소를 지었다.
괴물에게 납치된 사람을 구하고자 운룡대팔식의 묘리를 발휘하는 중이니, 곤륜의 노인네들에게서 신법을 훔쳐 온 값은 충분히 치르고 있는 셈이다.
먹잇감을 제압한 와이번이 다시금 날아오르기 위해 크게 날개를 홰치는 순간, 유진은 허공을 박차고 한층 가속했다.
와이번이 급속하게 가까워졌다.
“의지는 돌고 도는 것.”
그리 중얼거린 유진은 창으로 와이번의 배를 꿰뚫었다.
끼에에에에에에…….
날갯짓이 느려지더니, 와이번이 서서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유진은 창대에 몸을 붙이고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으아아아아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남자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유진은 굳이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공포에 이성이 마비된 듯하니, 일단 내버려 두는 게 나을 터였다.
대신 유진은 남자를 한층 강하게 부여잡으면서, 눈을 돌렸다.
하늘에서 부감(俯瞰)하는 이계의 풍경이 그의 눈에 담겼다.
숲은 마치 바다처럼 무한하게 이어져 있어, 수해(樹海)라고 불러야 마땅할 듯싶었다. 시야에 담기는 모든 대지가, 하늘과 땅이 맞닿는 경계 안이, 모조리 괴물들의 영역이었다. 문명의 흔적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반가웠다.
가야 할 때를 알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으나, 하늘은 그의 등선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새로운 세계들을 만났다.
문명이 발달하여 도리어 하늘의 이치를 잊은 지구.
그리고 여기.
오거의 뒤통수를 꿰뚫었던 화살을 떠올리면서 유진은 소리 내어 웃었다.
아직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이 수해 아래에는 그가 모르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이었다.
비스듬히 위를 보았다.
두 세계가 다 그러했듯, 이계의 하늘 또한 높고 푸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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