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know nothingness? RAW novel - Chapter 63
23. 다시 만난 살문 (1)
유진은 무공을 넘어 마법의 영역에까지 혼원기를 뻗었다.
마법이란 것은, 유진의 관점에서 폭주에 가까운 짓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것도 있다.
마법을 일으키자 그냥 기감을 펼쳤을 때에 비해 몇 배는 많은 정보가 들어왔다.
문제는, 그 안에서 필요한 것만을 골라 내야 한다는 점이다.
한동안 주변을 탐색하던 유진이 이내 마법을 거두어들였다.
“후우…….”
순간적으로 많은 기운을 쓴 터라 힘이 빠졌다.
유진은 김비서와 제임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괜찮으십니까?”
“예.”
유진의 눈이 돌아갔다.
치키비들이 모여 있는 호수 너머로 구릉이 있었다.
“저 구릉 근처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지는데, 확실치는 않군요.”
“그럼 우선 가 보기로 하죠.”
유진의 실력을 아는 김비서와 제임스는 곧바로 수긍했다.
유진 일행은 치키비를 지나쳐 구릉으로 나아갔다.
이따금 판타리아의 괴물들이 공격할 때마다 김비서와 제임스가 나섰다.
“뒤로 물러나 계십시오.”
김비서는 본격적으로 무위를 드러냈다. 그가 휘두르는 검로는 정직하고 직선적이었는데, 그만큼 빈틈이 없었다.
도마뱀처럼 생긴 괴물은 그대로 반으로 쪼개져서 죽었다.
“괴물과 싸우는 건 처음이지만, 협객이 할 만한 일이군.”
제임스의 무등심공은 한층 완숙해져 있었다. 그의 검에 신묘한 태극의 원리가 어리더니 괴물의 공격을 그대로 흘려 냈다.
늑대를 닮은 괴물은 그에게 입질을 하다가 목뒤를 꿰뚫려 죽었다.
두 사람의 실력을 목격한 사설 레이더들이 한층 정중해졌다.
“이렇게 쉽게 잡다니.”
“이 정도일 줄이야…….”
짧은 전투만으로도 두 사람의 실력을 알기에는 충분했다.
곧 유진 일행이 구릉에 이르렀다.
김비서와 제임스가 미간을 모았다.
“불쾌한 곳이군요.”
“피 냄새가 난다.”
실제로 냄새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구릉에 혈기가 자욱하게 흩뿌려져 있었다. 감각이 뛰어난 무인은 마치 피로 이루어진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유진 일행은 구릉의 정상으로 올라갔다.
“별것 없는데요? 아니, 별게 있긴 한데 우리가 찾는 건 없네요. 경치가 좋네.”
구릉 아래로 판타리아의 드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저 먼 지평선에서 정체 모를 거대한 괴물 무리가 이동하고 있었다.
이 거리에서 저 정도 크기로 보인다면, 실제로는 건물만 할 테다.
“처음 보는 괴물이군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
유진 일행은 구릉에 서서 판타리아의 초원을 돌아보며 감탄했다.
사설 레이더가 물었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걸까요?”
“아니요.”
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있습니다.”
그의 눈이 아래를 향했다.
구릉 내부였다.
“그리고 그들 또한 이미 우리가 온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라니요?”
“고지대의 이점이지요. 이렇게 멀리까지 볼 수 있으니, 우리가 접근할 때부터 눈치챘을 겁니다.”
유진의 말이 이어지는데, 순간 김비서가 눈을 돌렸다.
“방금 기척이…….”
유진이 빙그레 웃었다.
“제 말을 듣고 놀랐나 보군요.”
그리고 그것이 신호였다.
유진은 멍청한 얼굴로 서 있는 사설 레이더 두 명의 가슴을 밀쳤다.
사설 레이더들이 서 있던 땅에서 칼날이 튀어나왔다.
“뭐, 뭐야!”
유진은 두 사설 레이더를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김비서와 제임스는 찔러 들어오는 칼날을 도리어 낚아챈 다음 각자의 검을 아래로 쑤셔 박았다.
땅에서 뽑아낸 두 사람의 검에 피가 묻어 있었다.
“이 아래에 공간이 있다.”
“구릉을 요새로 만들었군요.”
유진은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땅 아래에서 이는 혼란이 느껴졌다.
“밖으로 불러내 보죠.”
어느 순간 그 자리에 멈춘 유진이, 발을 세게 굴렀다.
유진의 진각에 의해 인 파동이 아래로 뻗어 나갔다. 채로 때린 징이 울림을 끌고 가듯이, 구릉 전체가 흔들렸다.
이내 내부에서 억눌린 비명이 새어 나왔다.
유진이 뒷짐을 졌다.
“입구는 저쪽이겠군요.”
유진이 올라왔던 방향의 반대로 구릉을 내려갔다.
그가 예고한 대로, 바위와 수풀에 가려져 있던 지점에서 복면을 쓴 흑의인 여럿이 뛰쳐나왔다. 유진이 일으킨 파동에 의해 내상을 입었는지, 바닥에 주저앉아 헛구역질을 하기도 했다.
유진을 제외한 모두가 흑의인들을 보고서 경악했다.
“저, 정말로 이계인이?”
“사람이 판타리아에 산다고?”
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판타리아의 주민들이 아닙니다.”
“예?”
“판타리아에 흘러들어 온…….”
흑의인 중 하나가 가까이 있는 유진을 발견하고 검을 휘둘렀다. 유진은 옆으로 피한 다음 복부를 때려 흑의인을 쓰러뜨리고 그가 들고 있던 검을 빼앗아 쥐었다.
“살문입니다.”
유진의 입에서 살문이라는 말이 나오자, 주변에 흩어져 있던 흑의인들이 일제히 유진을 쳐다보았다.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유진은 들고 있는 검을 흔들면서 빙그레 웃었다.
“자세한 사정은 직접 물어보면 되겠지요.”
그 말을 기점으로 흑의인들이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유진이 검을 들었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불운이었다.
유진이 검을 머리 위로 휘저으며 빙글빙글 돌리자, 그의 주위로 소용돌이가 일면서 주변의 대기가 어그러졌다.
바람에 휘말린 흑의인들이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그리고 마치 맹수에게 물려 가듯 그대로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갔다.
흑의인들이 빙글빙글 돌았다.
회전하는 물체를 갈아 버리는 것은 간단하다.
날을 세우면 된다.
유진이 검기를 세우고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자 마치 믹서기에 갈려 나가듯, 흑의인들의 몸이 찢기면서 피가 흩날렸다.
일대에 혈우(血雨)가 내렸다.
유진은 기막을 세워 핏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했다.
공격이 끝나고 나자, 흑의인들은 모두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서 떨고 있었다. 치명상을 입었으나 죽은 이는 없었다.
“미, 미친.”
“허어…….”
“역시.”
뒤에 서 있던 두 사설 레이더의 눈이 찢어질 듯이 크게 뜨였다.
김비서와 제임스마저도 놀란 얼굴로 유진을 보았다.
유진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말이 안 된다.
더 강해졌다.
“미친…….”
“저게 사람의 무공이라고?”
사설 레이더들은 자신들이 진짜 고수를 만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비서가 애써 진정을 하고 물었다.
“살문이 확실한가요?”
“그런 듯합니다. 분위기나, 펼친 무공이나.”
“역시 그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군요.”
유진을 공격하기 위해 달려들던 흑의인의 검기는 예전에 김가원이 쓴 것과 같았다. 단단하게 벼린 중단전을 압축해서 순식간에 검기를 끌어 올리는 살검이다.
피 냄새가 자욱하게 나는 것이, 이미 많은 생명을 거둔 듯싶었다.
“살문 안에도 여러 당이 있는데, 이들은 살검당 소속입니다.”
유진의 입에서 그런 말들이 나오자 쓰러져 있던 흑의인들이 꿈틀거렸다.
유진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흑의인의 복면을 벗겼다.
평범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유진은 그의 머리채를 붙잡아 비튼 다음 상대의 목에 검을 댔다.
“저 안에 몇 명이 더 있는지 알려 주시겠습니까.”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유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검을 그었다.
흑의인이 절명했다.
유진은 쓰러져 있는 다음 흑의인에게 이를 반복했다.
그는 마치 대답을 바라지 않는 사람처럼, 질문 끝에 답이 바로 돌아오지 않으면 곧바로 목을 갈라 죽였다.
공기가 가라앉았다.
다섯 명쯤 죽었을까, 그제야 대답이 나왔다.
“아, 아직 안에…….”
“얼마나 있습니까?”
“오십 넘게…….”
“누가 리더입니까?”
“혈종당의 여자…….”
유진은 예전에 자신을 습격한 여자를 떠올렸다. 김하연이라고 했다. 그녀 때문에 나상철이 부상을 입어 사경을 헤맸다.
“혹시 김하연에 대해 압니까?”
“그, 그분은 혈종당의 당주입니다. 여기에 없습니다.”
유진은 흑의인을 놓아주었다.
“좋습니다. 이 사람처럼 우리에게 투항할 사람은 일어나세요.”
어떤 이들은 망설였고, 어떤 이들은 저항하려 했다.
유진은 저항하는 자들을 찔러 죽였다.
그러자 판단이 빨라졌다.
망설이던 이들의 대부분이 유진에게 붙었다. 나머지는 다시 구릉 안으로 도망쳤다. 유진은 굳이 붙잡지 않았다.
“투항한 사람들은 목숨을 살려 주겠습니다. 다만 죗값을 치러야겠죠.”
유진이 눈짓하자, 김비서와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셋은 차례로 투항한 흑의인들의 단전을 파괴했다.
흑의인들이 주저앉아 피를 토했다.
“거기 두 분, 이 사람들을 지키고 계십시오.”
유진이 두 사설 레이더에게 당부했다.
“단전을 파괴했으니 둘이서 충분히 감시할 수 있을 겁니다. 허튼수작을 부리면 바로 죽여도 좋습니다.”
“예, 예. 알겠습니다.”
유진은 흑의인들이 나온 입구를 바라보았다. 구릉에 몸을 움츠려야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구멍이 나 있었다.
“김 비서, 제임스. 혹시 겁이 난다면 여기서 기다려도 됩니다.”
그러자 두 사람이 피식 웃었다.
“괜한 소리였나요?”
“예.”
“그렇다.”
“그랬군요. 그럼 가 봅시다.”
유진은 바닥에 떨어뜨려 둔 검을 들었다.
그의 분위기가 다시 서늘하게 변했다.
제임스가 물었다.
“유진, 검을 들 때마다 분위기가 바뀌는군. 스스로 마음가짐을 바꾸는 것인가?”
“비슷합니다. 스스로 제약을 뒀죠.”
“그 경지에 이르고도 도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를 쓰다니.”
제임스가 자신이 든 검을 한 바퀴 돌리고는 말했다.
“배울 점이 많다. 협객의 전우가 되기에 충분해.”
“제임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연하지. 나는 협객이니까.”
“그럼 협객이 앞장을 서 주시겠습니까?”
“뭐?”
“설마 겁이 나는 겁니까?”
“아니, 그럴 리가.”
제임스가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제임스를 다루는 솜씨에 감탄했다는 듯 김비서가 유진을 쳐다보았다.
이내 세 사람은 구릉의 내부에 들어섰다.
초입은 좁았으나, 조금 더 나아가자 널찍한 공간이 펼쳐졌다.
유진 일행이 들어선 공동을 중심으로 세 개의 층이 있었고, 수많은 통로가 개미굴처럼 뚫려 있는 구조였다. 까마득하게 높은 천장에 달린 조명이 내부를 밝히고 있었다.
비좁은 암굴이나 은신처 같은 곳을 상상했는데 그 이상이었다.
판타리아에 지어진 살문의 지하 기지였다.
김비서가 중얼거렸다.
“이렇게 살문의 거점을 찾아내다니,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유진이 빙그레 웃었다.
“하늘이 우리를 돕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 말에 함의가 있는 것 같아, 김비서가 물었다.
“홍유진 씨는 운명 같은 걸 믿습니까?”
“아니요.”
“아닙니까?”
“믿지는 않습니다.”
대답하는 유진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어려 있어, 김비서는 그 뜻을 되물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적들이 나타났다.
“저건…….”
“많군요.”
각 통로에서 흑의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숫자는 물경 수십.
제임스는 물론 항상 차분한 김비서마저 긴장할 정도였다.
유진은 흑의인들을 살폈다. 모두 검은 옷을 입었지만 행색이 조금씩 달랐다.
흑의인들은 크게 네 개의 무리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처음 밖에 나온 이들과 같이 복면을 쓴 채 검을 들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전신에서 붉은 혈기가 흘렀다.
또 다른 이들은 육체가 기형에 가깝게 부풀어 있었다.
마지막 무리는 왜소한 체격에 눈에서 기이한 빛이 일렁였다.
각자 살문에 있는 네 개의 당(堂)인 듯했다.
유진이 말했다.
“살문에는 네 개의 당이 있습니다. 각각 살검당, 혈종당, 괴율당, 사법당이죠.”
그러자 멀리서 대답이 돌아왔다.
“살문에 대해 제법 아는 모양이구나?”
마치 선정성을 과장하는 성우처럼,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고혹적인 목소리였다.
유진이 눈을 들었다.
검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가장 높은 층에 서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나 본 적 있어?”
“없습니다.”
“아닌데. 분명히 낯익은 얼굴인데.”
“아닐 겁니다.”
“맞는데…….”
잠시 고민하던 여인이 이내 환한 표정이 되었다.
“아, 너 혹시 걔야?”
여인이 유진을 손가락질했다.
“우리 당주님이 탐내던 요양병원 걔?”
대강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으나, 유진은 일단 부인했다.
“아닙니다.”
“맞는데? 사진이 똑같아.”
“사진?”
“당주님이 침대 옆에 네 사진 걸고 매일 보시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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