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 Player RAW novel - Chapter 127
#닥터 플레이어 127화
타닥. 타닥.
그리고.
“허억, 헉!”
엘무드는 세이틸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세이틸은 피에 젖은 채 몬스터와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본인이 판 함정에 완전히 빠진 것이다.
세이틸은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크아악. 제기랄. 레이몬드는 언제 오는 거야?!’
아니, 이제 레이몬드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대로는 몬스터에게 목숨을 잃을 판이다.
‘왜 내 수하들은 안 오고 있는 거야? 제기랄! 이 병신들!’
그것도 이유가 있었다.
레이몬드를 은밀히 죽이기 위해 병사들을 이끄는 기사들에게 근처로 접근하지 말라고 언질을 해두었던 탓이다.
그래서 세이틸의 수하들은 그가 이런 곤경에 처했는지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그때, 섬뜩한 울음이 울려 퍼졌다.
“크르르.”
샤벨 울프였다!
칼날처럼 기다란 이빨을 가진 늑대형 몬스터.
개개의 개체는 D급으로 강력한 편은 아니지만, 무리를 짓는 게 문제였다.
지친 세이틸은 저들을 상대할 체력이 없었다.
‘아, 안 돼.’
그때 그의 눈에 엘무드가 들어왔다.
세이틸은 절망 속에서 빛을 발견한 듯했다. 이제 산 것이다!
“에, 엘무드? 나, 날 구해줘라! 어서! 당장!”
그런데 엘무드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그전에 사과하십시오.”
“……뭐?”
“레이몬드 님을 모욕했던 것 말입니다.”
과잉 충성을 발휘한 것이다!
세이틸은 가슴이 턱 막히는 얼굴을 하였다.
“그게 지금 무슨……! 일단 닥치고 빨리 나를 구해라!”
“사과하고, 다시는 레이몬드 님을 모욕하지 않는다고 검에 대고 맹세하십시오. 그게 먼저입니다.”
“크아악! 이놈!”
세이틸은 고구마 백만 개를 먹은 듯한 얼굴을 하였다.
“크르릉!”
그때, 샤벨 울프가 한 마리 뛰어들었다.
세이틸은 허겁지겁 늑대의 공격을 막았다.
“빨리 날 구하라고!”
“사과하고 맹세하십시오!”
“크아악! 이놈!”
철벽같은 엘무드의 고구마 짓에 세이틸은 미치고 팔짝 뛸 것만 같았다.
“그래, 사과한다! 미안했다고!”
“진심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더 진실 되게 사과해 주십시오!”
“아악!”
늑대들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다.
“미안하다고! 진심이야!”
“더욱 구체적으로 말해 주십시오.”
‘크아악! 이놈!’
살면서 이렇게 답답한 적은 처음이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세이틸은 결국 허겁지겁 말했다.
“진짜로 미안했고, 무릎 꿇고 사과하고 내가 죽일 놈이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 맹세하마!”
“진심입니까?”
“그래, 진심이다. 진심이야. 다시는 레이몬드를 안 건드리겠어! 살려줘!”
엘무드는 검을 꺼내 들었다.
“못마땅하지만…… 그래도 당신도 환자이니, 주군의 명에 따라 지켜드리겠습니다. 저는 환자를 지키는 자랑스러운 구호기사이니까요.”
참고로, 엘무드는 구호기사라는 자신의 직책에 자부심이 있었다. 주군이 내린 직책이니까!
물론 그것보다 중요한 건 주군을 향한 충성심이었다. 환자라도 주군을 모욕하는 놈은 참교육을 내리는 게 우선이었다.
파앗!
엘무드의 검이 장내를 휩쓸었고, D급 몬스터들인 샤벨 울프들은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다.
세이틸을 바라보니, 이미 과다 출혈로 버티지 못하고 결국 기절한 상태였다.
엘무드는 그런 세이틸을 데리고 복귀했고, 세이틸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성을 떠났다.
“떠났다고? 곧바로?”
“네.”
“……팔 다쳤던데.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면 후유증이 남을 것 같던데.”
레이몬드는 고개를 저었다. 세이틸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엘무드는 기쁜 얼굴로 말했다.
“세이틸 전하가 전해 달란 말씀이 있었습니다.”
“뭐?”
“진심으로 지금까지의 잘못을 사죄하며, 다시는 마스터께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답니다.”
“…….”
레이몬드는 해괴한 얼굴을 하였다.
“세이틸 전하가 정말 그런 말을 했다고?”
“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쨌든 세이틸 생각은 곧 머리에서 지웠다.
어마어마하게 충격적인 소식이 성을 강타했던 것이다.
“큰일입니다, 남작님!”
잉겔 경이었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깨달은 레이몬드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슨 일입니까?”
“중앙의 아군이 대패했습니다!”
“……네?”
잉겔 경은 울부짖듯 외쳤다.
“리머튼 왕자 전하가 뒤락 후작의 수공(水攻)에 휘말렸습니다. 확인된 사망자만 2만 명 이상! 전선이 모조리 붕괴했습니다! 우리도 어서 퇴각해야 합니다!”
* * *
아군의 대패!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앞서 나간 리머튼과 타국의 지원군들은 중앙에서 계속해서 승리했다.
리머튼은 거듭된 승부에 크게 고무되었다.
그는 자신의 뛰어난 전략 능력 덕분에 드로튼 왕국에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역시. 뒤락이라도 천재인 내 상대가 되지 못하는군. 이제 다들 누가 진정한 천재인지 깨달았겠지.’
그렇게 그는 시간이 갈수록 오만해졌고, 조심성을 잃었다.
그 모든 승리가 뒤락의 계략이었던 것도 모르고.
이윽고.
리머튼과 타국의 병사들은 드로튼 왕국의 심부, 넬샤 평야에 이르렀다.
“전하, 잠시 진군을 멈추고 후속 부대와 합류하는 게 어떻소이까?”
메이시 왕국의 보른 공작이 말했다.
그들이 워낙 빠르게 진군해 뒤따르는 휴스톤 왕국군과 연합군들은 북에서 남, 종 방향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 형국이었다.
측면에서 공격당하면 큰 낭패를 당할 수도 있는바. 일단 전열을 추릴 필요가 있었다.
‘어쩔 수 없군. 조언을 듣는 것도 현명한 군주의 덕목이니까.’
리머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강의 지류도 옆에 흐르고 있어서 군대를 머물게 하기 적격인 곳이었다.
이후 뒤따르는 병사들이 속속 넬샤 평야로 도착했다.
넬샤 평야에 집결한 병사가 2만 명에 육박했을 때.
상상하지도 못한 재난이 일어났다.
해일 같은 급류가 밀려 내려온 것이다.
수공(水攻)이었다.
* * *
뒤락 후작은 처음부터 수공을 염두에 두었다.
정공법으로 사기충천한 휴스톤 왕국군을 이길 가망은 없다고 판단하였으니까.
‘전황을 뒤집을 방법은 하나다. 화공이나, 수공을 통해 적들에게 커다란 피해를 주어야 해.’
그중 선택한 건 수공이었다.
마침 우기였고, 드로튼 왕국 중부 지방은 피테르강에서 뻗어 나온 지류들이 많아 수공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둑을 쌓아 지류의 흐름을 막았고, 때에 맞춰 쏟아지는 비 덕분에 어마어마한 양의 물을 가둘 수 있었다.
이후, 둑의 하류에 위치한 넬샤 영지로 적군을 유인했다.
하필 앞장선 이가 오만한 헛똑똑이 리머튼이라 유인하기 수월했다.
그리고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전멸.
넬샤 평야에 도착했던 휴스톤 왕국군과 타국 연합군들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나마 리머튼을 비롯한 최고 지휘관들은 상급 기사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그뿐이다. 나머지는 모조리 죽었다.
타국 연합국 중 무사한 건 신중을 기한 엔리케 왕자의 클레버 왕국군뿐이었다.
‘아무리 승리를 위해서라지만, 커다란 죄악을 저질렀어. 이렇게나 많은 인명의 목숨을 뺏다니.’
뒤락은 물에 잠긴 넬샤 평야를 바라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수많은 전쟁을 치른 뒤락이지만, 눈앞에 광경만큼 끔찍한 지옥은 본 적이 없었다.
‘난 분명 지옥에 가겠군.’
한탄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반드시 승리해야 했다. 설사 지옥에 가게 되더라도 멈춰 설 수 없었다.
“작전의 두 번째 단계를 시작한다.”
“네, 각하!”
두 번째 단계.
선두의 전멸로 대혼란에 빠진 휴스톤 왕국군을 기습해 소탕하는 것이다.
무려 2만이나 되는 병력이 수장당한 뒤다.
이런 대혼란 상황에서 기습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후퇴! 뒤로 후퇴해 진열을 가다듬는다!”
하지만 뒤락은 휴스톤 왕국군이 후퇴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퇴각하는 길목마다 미리 병력을 매복해 두었던 거다.
휴스톤 왕국군은 완전히 무너져내렸고, 그 뒤는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적국 영토에 너무 깊숙이 들어와 있던 것도 문제였다.
아무리 후퇴해도 적국의 땅이었고, 끝없이 적병들이 튀어나왔다.
뒤락 후작은 단 한 명의 휴스톤 왕국군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추적 군을 보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때, 전군이 몰살당하는 걸 막은 건 라이프 공작이었다.
후방에 남아 적들의 추격을 끊은 것이다.
“각하, 안 됩니다! 퇴각하셔야 합니다!”
수하들이 만류했지만, 라이프 공작은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남아 적들을 막겠다. 너희는 한 명의 병사라도 더 살려 휴스톤 왕국으로 퇴각하도록.”
“안 됩니다!”
“어서!”
라이프 공작은 입술을 깨물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입술에서 피가 주륵 흘러나왔다.
‘이곳이 내 마지막이군.’
그가 죽음을 무릅쓰고 후방을 맡는 이유가 있었다.
모든 패배는 총사령관인 그의 책임이니까.
패장으로서 마지막 소임을 다해야 했다.
마침, 저 앞에서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알폰소 경.
드로튼 왕국의 소드 마스터가 기사들을 이끌고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갑옷에는 휴스톤 왕국군의 것으로 보이는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라이프 공작은 죽음을 각오하였다.
‘후회 없는 인생이었다. 단 하나 아쉬운 게 있군.’
바로 레이몬드.
누구보다도 위대하게 성장할 그의 미래를 지켜보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그를 제자로 삼지 못한 게 못 이룬 미련으로 남았다.
‘만약…… 내가 이 자리에서 살아날 수 있다면.’
그때는, 그 위대한 천재에게 아낌없이 가르침을 베풀며 일평생을 바치고 싶었다.
물론 이루지 못할 소망이었다.
“오라.”
파앗!
탁한 오러가 검에서 뿜어져 나왔고, 드로튼 왕국군에 맞서 라이프 공작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 * *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수공에 수장된 병사만 2만 명. 뒤이어 벌어진 공격에 사망한 병사도 1만 명이 넘을 것으로 보입니다. 행방을 알 수 없이 흩어진 이는 셀 수도 없고요. 전력을 보존해 후퇴한 건 고작 1만 명 남짓입니다.”
레이몬드는 침음을 삼켰다.
끔찍한 참사였다.
“만약 라이프 공작 각하가 아니었다면 모조리 전멸했을 겁니다.”
“라이프 공작 각하는 전사한 건가요?”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아마 전사하셨을 확률이 높을 것 같습니다.”
레이몬드는 머리가 아득해져 왔다.
최악이었다.
‘이 전쟁은…… 졌어. 돌이킬 수 없어.’
이미 중부 지역 전체가 드로튼 왕국의 손에 다시 떨어졌다고 한다.
살아남은 휴스톤 왕국군은 이전의 전선이었던 라팔드 지방으로 후퇴했지만, 지켜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라팔드 지방이 문제가 아니야. 뒤락 후작은 라팔드 지방을 넘어 휴스톤 왕국으로 진격할 거야.’
레이몬드는 눈앞이 컴컴해졌다.
패전이었다.
‘설마 질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당장 퇴각해야 합니다.”
레이몬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른 아군이 전멸함에 따라 그들은 지금 고립상태였다.
당장 퇴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퇴각할 방법이 있습니까? 이미 퇴각로도 다 막혔을 것 같은데.”
“이곳에서 동쪽에 있는 해안가에 가면 페닌슐라 왕국의 함대가 있습니다. 그 함대를 이용하면 퇴각할 수 있습니다.”
레이몬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살아날 구멍은 있었던 거다.
‘아니, 다행이 아니잖아. 전쟁에서 지게 되었는데.’
수많은 이가 죽었다.
그간 힐러로서 병사들과 동고동락했던 레이몬드는 그들의 죽음을 가볍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돌을 얹은 듯 가슴이 무거웠다.
또한,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패했으니, 영지도 다 물 건너갔구나.’
그가 받기로 한 영지는 승전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패했으니, 영지고 포상금이고 다 물거품이었다.
‘안 돼! 그러면 난 파산이야!’
레이몬드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는 노른자위 영지를 받으려고 아낌없이 자금을 쏟아부었고, 덕분에 지금 천문학적인 빚을 진 상태였다.
빈손으로 돌아가면 알거지 신세였다.
‘그냥 알거지면 다행이지, 쌓인 빚은 어떻게 할 거야?’
이런 상황에서도 또 돈 생각이냐 할 수 있지만, 파산할 상황이니 어쩔 수 없었다.
누구라도 그의 상황이면, 똑같은 걱정을 할 것이다.
‘방법이 없을까?’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제길, 방법이 있을 리가 없잖아. 목숨만 건져도 감사한 상황이니.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레이몬드가 눈물을 삼키고 퇴각 준비를 하는 순간이었다.
뜻밖의 인물이 그를 붙잡았다.
“휴스톤 왕국으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드로튼의 어린 왕을 모시는 기사, 네켈스 경이었다!
돌아가지 않고 레이몬드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제발 저희 국왕 전하를 살려주십시오!”
네켈스 경은 간곡히 무릎을 꿇었지만, 레이몬드는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지만, 그는 지금 도움을 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그런데 네켈스 경이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드로튼 왕국인은 은혜를 잊지 않습니다. 국왕 전하를 살려만 주신다면 어떤 사례라도 하겠습니다!”
“사례라고 해봤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려던 차였다.
레이몬드는 번뜩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잠깐. 이건 기회야. 승전할 마지막 기회.’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국왕을 살려 베라드 대공을 몰아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