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 Player RAW novel - Chapter 128
#닥터 플레이어 128화
현 상황에서 승전할 방법은 단 하나였다.
전쟁의 원흉인 베라드 대공을 몰아내는 것!
그러려면 어린 국왕을 살려야 했다.
‘또한, 뒤락 후작은 드로튼 정통 왕가에 충성심이 깊은 인물이라 들었어. 어린 국왕을 살리면, 뒤락 후작을 회유할 수도 있을 거야!’
베라드 대공을 역적으로 파문하고, 뒤락 후작을 회유하면 다 기울어가는 전쟁을 역전할 수 있었다.
‘한번 해보자! 이대로 패배해 파산할 수는 없어!’
결정한 레이몬드는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힐러로서 환자를 외면할 수는 없지요. 무척 큰 위험을 감수해야겠지만, 환자를 위하는 마음으로 나서겠습니다.”
레이몬드는 ‘위험 감수’에 백배 악센트를 넣었다.
순진한 네켈스는 끔뻑 넘어가 고개를 조아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다만.”
레이몬드는 딱딱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귀국과 아국은 서로 적국. 환자를 위한 제 행위가 아국에게 해악이 될까 염려가 됩니다.”
네켈스 경은 말도 안 된다는 듯 허겁지겁 이렇게 외쳤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부터 국왕 전하는 이 전쟁을 반대했습니다. 만약 국왕 전하를 살려만 주시면, 휴스톤 왕국에 전적으로 협력도록 하겠습니다!”
“징표가 필요합니다. 경께서는 국왕의 뜻을 대리하는 이로써 우리에게 신뢰를 줄 징표를 내어줄 수 있습니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있었다.
만약 살려주었는데, 딴소리하면 곤란하다.
‘미리 확실히 못을 박아야 해.’
네켈스 경은 고심하다가 품 안에서 놀라운 물건을 꺼내었다.
드로튼 왕가의 보물이었다!
“전하께서 고열로 쓰러지기 전 제게 전권을 맡기며 이 보물을 주셨습니다. 약속의 증거로 이 보물을 남작님께 드리겠습니다.”
이 정도면 징표로 삼을 만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치료가 끝난 후 국왕에게 직접 해야겠지.’
그때, 옆에 있던 잉겔 경이 만류했다.
“위험합니다. 드로튼 국왕이 유폐된 겨울 궁전은 드로튼 왕국 최남단에 있습니다. 가던 중 어떤 곤란에 처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결연한 음성으로 답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힐러. 환자를 살리는 일에 몸을 사릴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물론 실제 속마음은 이러했다.
‘파산을 막기 위해서라면 지옥에라도 갈 수 있다!’
‘반드시 승전해 노른자위 영지를 받고 말 것이다!’
생각을 마친 레이몬드는 굳은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당장 출발하겠습니다.”
그렇게 훗날 사가(史家)들이,
‘휴스톤의 빛’이 ‘드로튼의 어둠’을 몰아내었다, 라고 표현하는 위대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 * *
레이몬드의 계획을 들은 치료원 사람들은 펄쩍 뛰었다.
“위험해요!”
“위험합니다, 마스터!”
“무서워요!”
크리스틴, 한슨, 린든이었다.
엘무드는 시체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걱정의 눈빛을 보냈다.
“위험한 건 압니다. 하지만 꼭 가야 합니다.”
‘나도 가기 싫어. 하지만 파산을 막으려면 어쩔 수 없다고.’
앞으로 펼쳐질 개고생과 위험을 생각하니 레이몬드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급속도로 어두워진 레이몬드의 얼굴을 본 치료원 사람들은 가슴이 울컥하였다.
‘마스터께서도 아시는구나.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런데도 환자를 위해서 그런 위험을 감수하려는 거야.’
그들도 대략적인 사정은 전해 들었다.
드로튼 왕국의 가련한 어린 왕이 베라드 놈의 악마 같은 술수에 당해 사경을 헤매고 있다고.
레이몬드는 그 어린 왕의 불행을 외면하지 못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려는 것이리라.
레이몬드는 타인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안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바보이니까.
‘이런 바보. 아무리 남들을 위한다고 해도 자기 자신을 조금 챙기라고! 위험할 수도 있잖아! 드로튼 놈들에게 잡혀 죽으면 어떻게 할 거야!’
크리스틴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타인을 위하는 레이몬드의 마음을 잘 알지만, 이럴 때는 화가 났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레이몬드의 고결한 마음을 존경하지만, 이번 일은 너무 위험했다.
다들 한마음으로 그를 말렸다.
“다시 생각해 주세요. 마스터의 목숨은 마스터의 것만이 아니라고요.”
“어쩔 수 없습니다, 파…….”
파산을 막으려면 어쩔 수 없다, 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때 크리스틴이 빽 목소리를 높였다.
“환자를 위하는 것도 좋지만, 본인도 조금 챙기라고요! 마스터가 죽기라도 하면 전 어떻게 하라고요?”
“……네? 뭐라고요, 제자님?”
엥? 이게 무슨 뜻?
레이몬드의 눈이 동그래졌다.
크리스틴도 스스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을 했다는 걸 깨닫고 당황했다.
서둘러 정정하려는 찰나.
한슨이 나섰다.
그는 찌릿 크리스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치 질 수 없다는 듯 더욱 강렬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스터. 저야말로 이젠 마스터가 없으면 살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
“제 세상은 마스터 덕분에 빛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스터가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으니, 제발 몸을 조심해 주십시오.”
우물쭈물 있던 엘무드도 질세라 나섰다.
“저, 저도 그렇습니다, 주…… 아니, 마스터! 제 몸과 영혼은 모두 마스터의 것이니 마스터가 없으면 전 1초도 살지 못할 것입니다! 부디 몸을 사려주십시오!”
크리스틴, 한슨, 엘무드의 눈빛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왜일까? 파지직, 하는 효과음이 들리는 것 같은 것은.
마지막으로 린든은 모두의 눈치를 살피더니, 다소 영혼 없이 외쳤다.
“마스터, 저도 그래요!”
“…….”
레이몬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용해, 이 바보들아. 내가 없으면 못 살길 뭘 못 살아.’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데 무슨 이상한 경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다들 바보들이었다.
어쨌든 그들의 걱정이 이해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위험한 여정이긴 했으니까.
솔직히 안 가고 싶은 마음은 레이몬드가 더욱 굴뚝 같았다.
‘하지만 파산당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걸. 흑흑. 이대로라면 빚쟁이 알거지라고.’
슬픈 생각을 떠올리니, 표정이 자연스레 숙연해졌다.
레이몬드는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저도 위험한 건 압니다. 하지만 꼭 가야 합니다. 말리지 말아주십시오.”
그런 레이몬드의 결연한(?) 모습에 모두의 가슴이 다시금 뭉클해졌다.
엘무드가 가장 먼저 생각했다.
‘주군께서는 환자를 위해 크나큰 위험을 감수하려는 거야. 그렇다면, 주군의 뜻을 관철할 수 있게 하는 게 주군의 검인 내 몫이야.’
엘무드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알겠습니다, 주…… 마스터! 마스터의 길. 털끝 하나 상하지 않도록 제가 곁에서 지키겠습니다!”
크리스틴도 이를 악물었다.
‘환자를 위한 결정을 저 바보 마스터가 무를 리가 없어.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내가 곁에서 도울 수밖에.’
“저도 함께하겠어요. 제가 옆에서 지켜드리겠어요.”
“아, 아니. 제자님은 괜찮습니다. 위험하니…….”
그녀의 몸에 생채기 하나라도 나면 래번 공작 가에서 암살자를 보낼 거다.
하지만.
파앗!
선명한 마나 블레이드가 크리스틴의 검에서 뿜어져 나왔다.
소드 익스퍼트 초급의 경지였다! 그녀는 어느새 마나 유저의 경지를 돌파한 거다!
“저 천재인 거 알죠? 걱정하지 마세요.”
“…….”
한슨도 외쳤다.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따라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마지막까지 눈치를 보던 린든은 말을 더듬었다.
“저, 저도 따라갈게요!”
그때, 옆에 있던 라오가 말했다.
“형님, 그런데 어떻게 겨울 궁전에 가실 겁니까? 형님의 뜻은 존경하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여정입니다. 분명 중간에 사로잡힐 겁니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오의 말이 옳아. 아무리 은밀한 길로 이동해도 꼬리를 잡힐 거야.’
하지만 레이몬드가 누군가?
무사안전제일주의.
본인의 안전이 엄청나게 중요한 사람이다.
당연히 최대한 안전한 루트를 고려해놓았다.
“걸어서 안 갈 건데?”
“네?”
“배 타고 가려고.”
“……!”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레이몬드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페닌슐라 왕국의 함대를 이용해 겨울 궁전 근처로 곧바로 이동할 거야.”
* * *
페닌슐라 왕국.
정확한 명칭은 리슈테인 왕국이지만, 대륙 대부분 사람, 심지어 본인들도 자신들의 나라를 페닌슐라 왕국으로 불렀다.
그건 리슈테인 왕국이 십자연맹제국의 동쪽, 툭 튀어나온 반도(페닌슐라)에 자리한 해양 강국이었기 때문이다.
십자연맹제국 최고의 무역 부국이었으며, 동시에 최강의 해군력을 지닌 강국.
해군력만큼은 3강(剛)과 비교해도 우위에 있다는 평가였다.
‘다른 전체적인 국력도 3강 국가들과 견주어도 크게 밀리지 않는 강국이지.’
레이몬드는 페닌슐라 왕국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 강력한 해군력을 지닌 만큼 이번 전쟁 때도 지원군으로 함대를 파견해 드로튼 왕국의 함선들을 모조리 격파 후 바다에서 해상봉쇄를 시행 중이었다.
‘그러니 페닌슐라 왕국의 함선을 이용하면 안전하게 겨울 궁전으로 갈 수 있어! 마침 겨울 궁전은 해안가 근처에 있으니까.’
레이몬드는 병사들을 이끌고 페닌슐라 함대가 정박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드로튼 백성 중 레이몬드를 따르길 원하는 이도 있어 함께 데려갔다.
만류했지만, 꼭 레이몬드를 섬기고 싶다고 주장하여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영지를 받으면 거기로 이주시켜야지. 그러니, 꼭 이번 일에 성공해야 해!’
노른자위 영지를 받아야만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레이몬드는 이번 일의 성공을 굳게 다짐하였다.
멀지 않은 곳이라 곧 페닌슐라 함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페닌 남작을 뵙습니다. 본인은 라시드 드 리슈테인이라고 합니다.”
마중 나온 이를 보고 레이몬드는 깜짝 놀랐다.
라시드 드 리슈테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페닌슐라 왕국의 왕자였다!
훈훈하게 잘생긴 얼굴에 에메랄드 눈빛이 반짝였다.
페닌슐라 왕족의 심볼이라는 성안(聖眼)이었다.
‘나랑 눈동자 색이 비슷하네.’
페닌슐라 왕족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신과 똑같은 빛의 눈동자에 레이몬드는 신기하단 마음이 들었다.
그건 상대 왕자도 마찬가지인지, 눈에 이채를 띠고 레이몬드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어느 계파의 왕족이지? 국왕파? 대공파? 왕녀파? 귀족파?’
레이몬드의 머릿속에 쭈르륵 페닌슐라 왕가의 계파들이 떠올랐다.
‘페닌슐라 왕국은 같은 왕족이라도 계파에 따라 입장이 다들 천차만별이니 괜히 말실수하지 않도록 해야 해.’
강한 국력을 지녔지만, 페닌슐라 왕국이 3강(剛)이 아닌, 3중(中)으로 평가절하받는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사분오열된 콩가루 왕가 때문이었다.
페닌슐라 왕족들은 항상 치고받고 싸웠다.
‘단순히 싸우는 수준이 아니지. 리슈테인 왕가의 역사는 정말 피로 점철되어 있으니까.’
그 다툼이 얼마나 끔찍하냐면, 30년 전, 대혈겁 때는 왕족의 7할이 사망했을 정도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