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 Player RAW novel - Chapter 169
#닥터 플레이어 169화
레이몬드는 예상보다 훨씬 더 분노하는 스승에게 어색한 얼굴을 하였다.
‘이 방법 자주 써먹으면 안 되겠네. 큰일 나겠어.’
“그런 건 괜찮습니다. 다만, 편지를 보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편지?
“네, 위대한 스승님의 격려 편지를 받으면 기운이 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 다른 영주들을 위한 격려 편지도 써주시면 그들도 기뻐할 것 같습니다.”
과연 라이프 공작.
단번에 레이몬드의 말을 알아들었다.
-편지. 그래, 딱 적당하겠군. 훌륭한 생각이야. 내 친필로 영주들에게 격려 편지를 보내도록 하지.
이건 레이몬드와 영주들의 기세 다툼이다.
그러니, 남부의 제후 라이프 공작이 개입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단순한 격려 편지라면? 얼마든지 보내도 되었다.
‘물론 라이프 공작의 편지를 영주들이 마음 편히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레이몬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과한 권한을 쓰지 않으면서도 효율적으로 영주들을 압박할 방법이었다.
* * *
그렇게 레이몬드의 압박이 영주들을 흔들었다.
영주들은 점점 위기를 느꼈다.
‘만약 내가 버텼는데, 저놈이 먼저 페닌 백작에게 고개를 숙이면?’
심지어 서로 그런 의심마저 하였다.
레이몬드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주들도 여간내기는 아니었다.
거세게 흔들렸지만, 어떻게든 고개를 숙이지 않고 버티는 것이었다.
사생아에게 고개를 숙일 수 없다는 자존심.
왕자들의 압박 등등. 여러 이유 때문이었다.
‘단순한 압박만으로는 안 돼. 계기가 필요해.’
레이몬드는 직감했다.
이 팽팽한 힘겨루기를 끊을 계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사소한 계기라도 좋아. 누군가 한 명 먼저 고개를 숙이기만 하면, 영주들은 차례로 무너져 내릴 거야.’
그런 레이몬드의 바람 덕분일까?
계기가 생겼다.
하지만 레이몬드가 생각했던 가벼운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커다란, 지금껏 유례가 없었던 어마어마한 위기가 라팔드 지방에 다가온 것이다.
레이몬드가 해왔던 일을 송두리째 날려버리는 건 물론, 라팔드 지방을 지옥으로 만들지도 모를 커다란 재앙이었다.
* * *
그때, 휴스톤 왕국의 왕성.
오래간만에 세 명의 왕자가 모여 티 타임을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매우 좋지 않았다.
일단 첫째로 세이틸.
그는 텅 비어버린 눈빛을 하고 있었는데, 완전히 폐인 같았다.
실제로 그는 술에 빠져 망나니짓만 일삼고 있었다.
둘째로 리머튼.
그의 얼굴도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평소 보이던 차분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여유로운 건 단 한 명. 카이른뿐이었다.
“……우리 강아지가 또 훌륭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군.”
“좋으십니까?”
“응?”
“레이몬드가 활약하는 게 좋으시냐는 말입니다.”
리머튼의 날카로운 물음에 카이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당연히 좋지. 사랑스럽지 않으냐?”
“하!”
리머튼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들려오는 소식에 배알이 꼴리고 있는데, 카이른까지 저러니 속이 터졌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좋은 시간 되시길.”
쾅 하고 사라지는 모습에 카이른은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급하긴. 내 말은 끝나지 않았는데.”
카이른은 이를 드러내었다.
“곧 몰락할 놈이니 지금 모습이 사랑스럽지 않을 리가.”
뜻 모를 이야기였다.
레이몬드가 곧 몰락할 거라니?
그는 밖에 나온 후 대기하고 있던 기사에게 물었다.
“라팔드 지방 보리슨 영지에서 마정석 채굴을 시작했나?”
“네, 그렇사옵니다.”
“그렇군. 큭큭.”
카이른에게 보고한 기사는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전하께서 왜 이런 일에 관심을 두시지?’
더구나 어째서인지 즐거워하고 있었다.
카이른이 즐거워하는 일은 거의 없다는 걸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카이른이 즐거움을 느낄 때는 단 하나.
약자를 자신의 발로 짓밟을 때. 그 약자가 고통스러워할 때였다.
‘카이른 왕자 전하 때문에 레이몬드 님도 굉장히 고통받으셨지.’
세이틸이 레이몬드를 육체적으로 괴롭혔다면, 카이른은 레이몬드를 말 그대로 ‘짓밟았다’.
경멸하며, 모욕하고, 단순한 폭력 이상의 고통을 받게 했다.
레이몬드가 소심한 성격을 갖게 된 것도 카이른의 영향 때문이라 할 수 있을 정도.
심지어 어린 시절, 왕성의 사용인들이 레이몬드를 외면하고 못 되게 물었던 것도 다 카이른의 입김이었다. 그가 뒤에서 그렇게 조종했던 것이다.
왜 그런 일을 했냐고?
그냥. 재밌으니까.
기사는 그런 카이른을 볼 때마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진정 잔인한 자.’
아니, 잔인하다는 표현이 어울릴까? 어쩌면 잔인보다는 미쳤다는 표현이 어울릴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런 카이른이 즐거워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뭔가 묻고 싶은 게 있나?”
“아, 아닙니다!”
기사는 화급히 고개를 저었다.
카이른에게 꼬투리를 잡히면 안 된다.
다행히 카이른은 기분이 좋은지 별다른 책을 잡지 않았다.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곧 즐거운 일이 일어나겠군.”
이후 방에 돌아와 홀로 남은 카이른은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마정석 채굴이 시작되었으니, 이제 시작이군. ‘그들’의 말에 따르면 끔찍한 괴질이 번지기 시작하겠지.”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들’.
베라드 대공에게 온갖 비열한 수단을 건네주고, 라팔드 지방에 끔찍한 판도라의 상자를 묻은 ‘그들’과 카이른이 모종의 관계라는 뜻이다!
더구나 끔찍한 괴질이 번지기 시작할 거라니?
“과연, 기대되는군. 얼마나 끔찍한 괴질일지.”
사실 카이른도 ‘그들’에 대해 아는 건 없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놈들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지.’
카이른은 비릿한 얼굴을 하였다.
놈들이 수천, 수만, 수십만을 죽이는 악마여도 상관없다.
어차피 자신 외에는 모두 벌레로만 생각하는 카이른이니까.
이번에 라팔드 지방에서 일어날 비극도 그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아니, 재미는 있겠군. 우리 강아지가 어떻게 해낼지 궁금하단 말이야.”
카이른은 나직이 말했다.
“그들에 말에 따르면, 우리 강아지라도 방법은 없을 테지만. 우리 강아지가 안 됐군. 지금껏 열심히 노력했는데, 모든 걸 잃게 되겠어.”
라팔드 지방이 재앙으로 뒤집히면, 재난 위임관으로 간 레이몬드는?
당연히 파면이었다.
지금껏 쌓은 모든 명성을 잃게 될 거다.
“반면, 놈의 영광은 내가 가져갈 것이고.”
레이몬드가 파면되면, 그때는 그가 직접 나설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알려준 방책대로 라팔드 지방의 재앙을 해결할 거고, 그 공로로 왕위 계승을 확립할 거다.
물론, 그사이 수많은 백성이 죽겠지만, 관심 없었다.
“모든 걸 잃고 좌절한 우리 강아지의 얼굴이 보고 싶군.”
카이른은 미소를 지었다.
과거, 레이몬드는 괴롭히는 재미가 없었다.
그저 비루한 놈을 짓밟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찬란하게 빛나는 놈을 짓밟고 싶었다.
놈의 텅 빈. 좌절한 눈동자가 보고 싶었다.
참으로 사랑스러울 것 같았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카이른은 얼굴을 비틀었다. 참을 수 없이 즐겁다는 얼굴이었다.
* * *
마정석 광산이 있는 보리슨 영지.
레이몬드에게 협조하지 않은 6명의 영주가 모여 있었다.
“마정석 채굴 성공을 축하합니다, 트렌비 백작님!”
첫 마정석 채굴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하지만 그건 명목상의 이유.
레이몬드를 향한 시위였다.
원래 그들은 레이몬드 대신 눈앞의 트렌비 백작을 제후로 추대하기로 작당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이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영주들은 속으로 바싹 입이 마른 얼굴을 하였다.
레이몬드의 압박 때문에 하루, 하루가 피가 말랐다.
최악은 이렇게 계속 대항했는데, 레이몬드가 제후가 되는 것이었다.
‘젠장, 지금에라도 페닌 백작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건가?’
‘하지만 사생아 따위에게 어떻게?’
‘왕자 전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그런 속마음은 숨기고 다들 술잔을 기울였다.
“자자, 모두. 놈이 라팔드 지방에서 쫓겨날 날도 멀지 않았으니, 마음을 굳게 먹읍시다. 그래도 사생아를 제후로 섬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트렌비 백작이 탁자를 두드리며 강하게 말했다.
“이 몸이 여러분의 지지를 받아 제후가 되면, 여러분을 반드시 후회하게 하지 않겠소.”
트렌비 백작은 영주들을 흥에 겨워 검을 꺼내 들었다.
“이곳 마정석 광산에서 나오는 수익은 모두 여러분의 영지를 위해 사용할 것이오. 응당, 훌륭한 제후라면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소?”
트렌비 백작은 흥에 겨워 검을 꺼내 들었다.
“그뿐 아니라, 본인이 제후가 되면 이곳 케널 산맥에 사는 마물도 소탕하겠소. 산맥 어딘가에 살며 영지를 위협하는 수인족 놈들도 모조리 내쫓도록 하겠소.”
영주들은 억지로 미소 지으며 박수를 쳤다.
다들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결정해야 해. 계속 트렌비 백작을 밀 건지, 아니면 페닌 백작에게 고개를 숙일지.’
그때,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레이몬드도, 그들도 전혀 예상 못 했던 끔찍한.
“크, 큰일입니다, 영주님.”
“무슨 일인가?”
라팔드 지방, 케널 산맥 밑에 자리한 랜슨 영지의 보좌관이었다.
보좌관은 창백한 얼굴로 영주에게 귓속말하였다.
“영지에 괴질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
“벌써 5명이나 사망했습니다.”
영주의 얼굴이 굳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때, 또 다른 영지의 보좌관이 들어왔다. 바로 옆 영지인 크란 영지의 보좌관이었다.
“크, 큰일입니다, 영주님. 저희 영지에도 괴질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
“10명이나 사망했습니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연회장의 분위기가 차갑게 굳었다.
인접한 두 영지에서 괴질 발생!
보통 일이 아니다.
‘설마 전염병이 돌기 시작한 건가?’
영주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전염병이 돌면 영지는 쑥대밭이 된다.
“이, 이만 본인은 일어나 봐야겠습니다.”
“저도요. 죄송합니다.”
괴질이 발생한 두 영지의 영주들은 창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괴질이 가라앉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그들은 불안, 초조한 얼굴을 하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들은 다른 일반적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전염병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 대처법도 잘 모른다.
‘누구한테 도움을?’
그 순간, 한 명 떠오른 인물이 있었다.
‘페닌 백작이면 이 괴질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레이몬드!
그가 전염병의 최고 전문가인 건 이제 휴스톤 왕국의 모든 이가 알았다.
‘그에게 도움을?’
두 영주는 갈등했다.
그때, 트렌비 백작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두 분은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마침 최고의 힐러가 내 영지로 오고 있었으니. 그자에게 두 분 영지의 괴질을 해결해 달라 부탁하겠소.”
“누구 말입니까?”
“도리안 자작이요.”
“……!”
다들 놀란 얼굴을 하였다.
도리안 자작!
왕실 부수석 치료사이자 AA급의 힐러였다.
명실상부 왕국 두 번째 치료사!
그자라면 확실히 괴질 따위 해결할 수 있을 거다.
레이몬드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분이 어쩐 일로 이곳에?”
“도리안 자작은 내 친우이오. 본인 영지의 일로 부탁할 게 있어서 와달라고 청했소이다. 당장 두 분 영지로 가달라고 부탁할 테니, 두 분은 걱정하지 마시오.”
두 영지의 영주들은 크게 기뻐하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