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 Player RAW novel - Chapter 242
#닥터 플레이어 242화
그때, 오든이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지금껏 잘못을 네게 갚는 것이라도 허락해 줄 수 없겠느냐?”
갚는다.
속죄의 보상을 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솔직히 듣고 싶지도 않았다.
오든은 거듭 고개를 숙였다.
“네게 용서를 받고자 함이 아니다. 그저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 사죄를 하고픈 것일 뿐. 부탁한다.”
결국, 레이몬드는 팔짱을 꼈다.
‘갚는다, 라.’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해 자신의 잘못만큼 레이몬드에게 속죄의 보상을 해주고 싶다는 뜻이었다.
‘보상이라. 이것조차 거절할 수는 없겠지.’
용서해 주겠다는 뜻은 절대 아니었다. 그저 받아낼 걸 받아내겠다는 뜻이었다.
‘원래 복수로 최대한 뜯어내려고 했으니까.’
이렇게 되니, 복수로 뜯어내는 모양새는 아니게 되겠지만, 어찌 되었든 상관없으리라.
“알겠습니다. 뜻하는 대로 하십시오.”
레이몬드는 과연 오든이 어떤 속죄의 보상을 하려는 건지 기다려보았다.
‘설마 저렇게까지 이야기해 놓고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국왕 오든은 전혀 예상치 못한 보상을 말하였다.
“첫째로 네게 하고자 하는 속죄는 반 사생아 차별법을 제정하는 거다.”
“……!”
레이몬드는 눈을 크게 떴다.
반 사생아 차별법.
일전 갈먼에게 말했던 적 있던 법으로 추후 추진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그걸 먼저 언급한 것이다.
심지어 국왕 오든은 곧바로 귀족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짐은 이 자리를 빌려 한 가지 법령을 선포코자 하오. 앞으로 휴스톤 왕국에서 사생아를 차별하는 걸 엄격히 금지하는 법이오.”
“……!”
귀족들은 웅성거렸다.
이 법령의 의미를 모두 깨달은 것이다.
이건 오든 스스로 본인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뉘우침이었다. 또한, 앞으로 이런 불행이 없도록 하겠다는 다짐이었다.
“전하의 의견을 받들겠습니다!”
“그러면 세부 법령은 추후 자세히 공표토록 하겠소.”
레이몬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반 사생아 차별법은 그의 숙원 중 하나였다.
생각지 않게 그의 바람 하나가 풀린 것이다.
오든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또한, 한 가지 사실을 더 공표하겠소. 페닌 후작의 친모, 아리마 페닌을 짐의 명예 왕비로 삼도록 하겠소.”
“……!”
레이몬드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이건 정말 상상도 못 했던 이야기였다.
“……전하?”
오든은 씁쓸히 말하였다.
“진즉 해야 했던 일이었지. 이렇게 늦었던 점. 다시 사과하마.”
회의장이 웅성거렸다.
어마어마한 이야기였다.
일단 명예 왕비가 됨으로써 레이몬드의 친모는 그간의 불명예를 벗게 되었다.
또한, 더욱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이로써 페닌 후작은 정식 왕족이 되는 거야.’
이름뿐인 왕자가 아닌, 실제 왕자가 되는 거다!
레이몬드도 그 사실을 깨닫고 인상을 찌푸렸다.
‘왕족? 그건 바란 적 없는데?’
하지만 거절하지는 못했다.
어머니가 불명예를 벗는 건 그의 숙원 중 하나였으니까.
“알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전 어머니의 성을 함께 사용하겠습니다.”
모계와 부계의 성을 함께 사용하겠다는 거다.
오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원하는 대로 하여라.”
이로써 레이몬드는 ‘레이몬드 페닌 드 휴스톤’이 되었다.
여러 성(姓)을 쓰는 귀족의 경우 가장 높은 신분의 성이 가장 후미에 들어가 저런 이름이 되는 것이다.
“또 있다.”
레이몬드는 국왕 오든이 작심하고 이 자리에 나왔음을 깨달았다.
속죄 보상이 끝이 없었다.
‘정말 잘못한 걸 뉘우친 건가?’
레이몬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오든이 진심으로 뉘우치고는 있구나, 하는 마음은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아니었다. 이런 사죄 한 번으로 아물기에는 너무 큰 상처를 받았으니까.
하지만 다음 순간.
그런 마음마저 산산이 날아갔다.
오든이 이런 이야기를 한 거다.
“이 자리를 빌려 짐은 하나의 안건을 내겠소. 페닌 후작을 공작으로 승작하고, 아르젠트령(領)을 내리려고 하오. 이에 대해 여러분의 의견을 듣겠소.”
레이몬드는 순간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 같았다.
‘지금…… 뭐라고?’
공작 승작은 큰일이 아니었다.
솔직히 지금껏 그가 해낸 일을 생각하면 전혀 과하지 않았으니까.
문제는 봉토였다.
아르젠트령(領).
왕가의 묘비가 있는 조그만 왕실 사유지였다.
정확히 말하면,
‘대대로 휴스톤의 왕세자에게 주어지는 봉토잖아!’
오로지 왕세자에게만 주어지는 봉토! 즉, 아르젠트 공작령을 내리겠다는 건 레이몬드를 왕세자로 삼겠다는 거였다.
‘말도 안 되는!’
국왕 오든은 근엄한 얼굴로 레이몬드를 돌아보았다.
“그간 생각해 보았다. 너를 향한 최고의 속죄가 무엇일지. 너는 오로지 타인만을 위하는 숭고한 마음을 지닌 터. 그런 네 뜻을 최대한 펼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속죄인 것 같구나.”
‘전혀 아니거든! 무슨 착각도!’
레이몬드는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오든을 향한 비호감도가 다시 최고치를 찍었다.
‘기껏 살려냈더니 이런 똥을! 당장 엎어야!’
하지만 레이몬드가 입을 열기 전에 발언하는 이가 있었다.
“제1왕녀로서 아바마마의 뜻에 동의합니다.”
소피아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줄줄이 동의의 발언이 흘러나왔다.
“나 갈먼. 공작가의 대표이자 재상으로 동의합니다.”
“나 라이프. 공작가의 대표이자, 남부의 제후로서 동의합니다.”
“나 래번. 공작가의 대표이자 동부의 제후로서 동의합니다.”
“나 아리스. 후작가의 대표이자 친위대의 단장으로서 동의합니다.”
거물들이 나서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제길. 이게 무슨 꼴이야?’
레이몬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잔뜩 열기를 띤 시선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최대의 위기였다.
‘정신 차리자. 여기서 무작정 못하겠다고 거절하는 건 현명하지 못해.’
국왕이 제안했고, 실세 공주와 여러 대귀족이 찬동한 상태다.
어린이 떼쓰듯 쉽게 거절할 상황이 아닌 거다.
명확한 명분이 있어야 했다.
‘다행히 미리 거절 방법을 마련해 놓았지.’
레이몬드는 의미심장한 얼굴을 하였다.
‘이런 위기가 올 수도 있다고 예상했었으니까.’
그는 이미 불안감을 잔뜩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대처 방법을 마련해 놓았다.
‘누구도 번복할 수 없을 확실한 거절 방법이야.’
레이몬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귀족 대회의.
시기도 완벽했다. 하늘이 그를 돕고 있는 듯했다.
차라리 잘됐다.
이번 기회에 레이몬드는 확실히 왕위를 거절하기로 했다. 다시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게 말이다.
‘난 대륙 최고의 힐러가 되어,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릴 거야.’
레이몬드는 먼저 오든에게 말했다.
“전하의 말씀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전 그런 중임을 맡기에 한없이 부족합니다.”
부족하다.
아무도 동의하지 않을 이야기였었다.
소피아가 곧바로 반박했다.
“말도 되지 않아요. 전 오라버니야말로 왕세자 자리에 가장 적격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레이몬드도 이런 겸손이 안 통할 것을 알았다.
그저 본론을 꺼내기 위한 밑밥이었을 뿐이다.
“부족한 몸임에도 좋게 여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분명 제가 왕세자가 되면 논란이 있을 겁니다. 아시겠지만, 절 마땅히 여기지 않는 분들이 많으니까요.”
“그건…….”
“그래서 제안합니다. ‘위대한 결의’를 통해 이 자리의 모든 귀족이 제가 왕세자가 되는 것에 동의해 주십시오.”
“……!”
장내의 모두가 흠칫하였다.
위대한 결의!
귀족 대회의 때 국왕과 귀족들이 만장일치가 되었을 때만 통과시키는 안건이다.
나라의 근간에 영향을 줄 정도로 가장 중요한 안건에만 이런 결의를 하였고, 이렇게 결의된 안건은 국왕이라 할지라도 번복하지 못한다.
국왕이든, 귀족이든 더는 논란을 일으키지 말고 반드시 따라야 하는 거다.
반면, 한 명의 반대자라도 있으면 그 안건은 재가되지 않았다.
바로 레이몬드가 노리는 수였다.
‘이 자리의 모든 귀족이 내가 왕세자가 되는 데 동의할 리가 없지.’
귀족들은 다 각자의 사정과 생각이 있었고 특히 레이몬드의 경우 반감을 품은 이가 많았다.
당연히 반대표가 나올 거다.
“위대한 결의라. 하지만 왕세자 선출에 그런 논의를 한 적은 없다.”
같은 생각인지 오든은 꺼림칙한 반응이었다.
만장일치는 불가능하다고 여긴 거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였다.
“왕세자 선출에 위대한 결의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결의가 없더라도 페닌 후작은 이미 왕세자의 자격이 충분합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사소한 불만도 추후 커다란 분란의 씨앗이 될 수 있는 법. 휴스톤 왕국을 위하는 이로써 어떤 분란의 씨앗도 낳고 싶지 않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레이몬드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이런. 반대자가 분명 있을 텐데. 어찌한단 말인가?’
‘페닌 후작이야말로 왕국의 빛이 될 텐데.’
이번 사태로 수많은 귀족이 레이몬드에게 감화하였다.
그래서 많은 이가 레이몬드가 왕세자가 되길 바랐지만, 저런 고집이라니.
‘어쩔 수 없겠지. 저게 페닌 후작이니까.’
‘왕국을 위해서라면 어떤 타협도 없는 고집불통.’
결국, 레이몬드의 뜻대로 하기로 하였다.
“그러면 위대한 결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순서대로 앞으로 나와 표를 내주십시오.”
자유로운 의견 피력을 위해 익명성을 보장한 투표를 하였다.
첫째로 국왕 오든.
이후 래번 공작과 재상 갈먼을 시작으로 차례대로 단상에 나와 투표를 하였다.
레이몬드를 지지하는 이들은 초조한 얼굴로 단상에 오르는 면면을 바라보았다.
소피아와 재상 갈먼 등은 어두운 얼굴을 하였다.
‘오라버니를 폄훼하던 이들이 많아. 그들은 반대표를 던질 가능성이 높아.’
‘어떻게든 레이몬드의 고집을 꺾었어야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만장일치가 나올 확률은 없었다.
반면 레이몬드는 희희낙락했다.
‘천재적인 발상이야. 이렇게 하면 내가 왕세자 될 위험은 없어져.’
왕위는 소피아에게 넘어가고 그는 꿀 빠는 힐러의 삶을 살게 될 거다.
‘오늘은 소고기 파티다!’
이윽고, 투표가 끝났다.
재상 갈먼이 개표를 시작했다.
“결의에 찬성 한 표입니다.”
레이몬드는 흔들리지 않았다.
‘뭐, 찬성표가 당연히 더 많겠지. 중요한 건 반대표니까. 한 표만 있으면 돼.’
레이몬드는 이전부터 자신을 싫어하던 귀족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한없이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들 믿고 있다고.’
개표가 쭉 이어졌다.
“결의에 찬성 15표입니다.”
계속 찬성표만 나왔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여전히 여유만만이었다.
‘반대표 하나만 있으면 돼. 오늘 일 다 끝나면 기념으로 소고기나 실컷 먹어야지.’
소고기뿐이 아니다.
왕세자 직을 소피아에게 넘기면 그는 이제 부귀영화의 꽃길만 걸으면 되리라.
‘어마어마한 돈을 벌게 될 거야. 금화를 욕조에 쌓아놓고 헤엄치며, 소고기와 제일 비싼 와인을 마실 거야. 전설의 비싼 음식, 랍스타도 함께.’
레이몬드는 히죽 웃었다.
상상만 해도 행복했다. 이제 곧 현실로 다가올 행복이었다.
‘그런 돈을 벌려면 대륙 중앙으로 진출해야겠지.’
솔직히 휴스톤 왕국은 너무 작았다.
돈 버는 데 한계가 있었다.
대륙 중앙에서 힐러로 성공하면 떼돈을 벌 수 있으리라.
만약 혹시라도 반대표가 안 나와 만장일치가 되면 어떻게 할 거냐고?
‘그때에도 대비책은 있지.’
레이몬드는 진중한 눈빛을 하였다.
물론 최선은 이번 결의 때 깔끔히 패배하는 거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더라도 방법은 있었다.
‘편법을 쓰면 돼. 훨씬 번거롭겠지만, 방법은 있어.’
편법.
다른 말로 꼼수였다.
레이몬드는 결연히 생각했다.
반드시 소피아에게 일을 떠넘기고 뒤에서 꿀을 빨고 마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