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 Player RAW novel - Chapter 350
#닥터 플레이어 350화
레이몬드는 호랑이 앞에 선 토끼가 된 심정으로 로즈 앞에 앉았다.
로즈 영애 뒤에는 이전 여러 번 만났던 이름 모를 집사가 뚱하니 서 있었다.
“……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보고 싶어서 왔다니까요?”
로즈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켰다.
“후음. 왕자님께서는 로즈가 보고 싶지 않으셨나 봐요?”
보고 싶었을 리가.
세상에서 제일 보기 싫은 사람이 로즈였지만, 레이몬드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돈의 힘은 위대하니까.
“보, 보고 싶었습니다.”
로즈는 쿡쿡 웃음을 흘렸다.
“잘 지내고 계신지도 궁금했고요. 뭐…… 이야기는 전해 듣고는 있었지만요.”
“전해 듣고 있다고요?”
“네, 왕자님 소식을 들으려고 신문사도 하나 인수했는걸요? 테인 스 신문사라고. 들어보셨죠?”
레이몬드는 식은땀을 흘렸다.
들어본 적 있는 신문사였다.
유달리 그에게 호의적인 기사를 써주어서 기자들에게 소고기라도 대접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로즈가 인수한 것이었다니?“
“왜…… 그런 일을?”
“그냥 취미 활동? 뭐, 매물이 비싸지도 않았고요.”
비싸지 않다.
아무리 싸게 나와도 그래도 신문사를 통째로 인수했는데 비싸지 않다니.
도대체 로즈가 얼마나 큰 돈을 가지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로즈는 차를 마시며 어딘가 나른하게 말했다.
“로즈는 VVVIP 고객 왕자님의 소식을 전해 듣는 게 삶의 낙이거든요.”
레이몬드의 등줄기에 식은땀을 흘렸다.
장난스러운 음성이지만, 레이몬드는 왜인지 소름이 돋았다.
‘……위험해. 얼른 연을 끊어야 해.’
레이몬드는 남자의 직감으로 확신했다.
로즈는 위험했다.
빨리 안전 이별해야 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운명의 쇠사슬 족쇄보다 질긴 천만 페나에 육박하는 빚이 있었다.
“빚 곧 갚겠습니다.”
“네?”
“빚 갚을 수 있습니다. 조금만 더 믿고 기다려주십시오.”
레이몬드는 결연히 말했다.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얼른 성공해 빚을 다 갚기로.
그래서 저 위험한 로즈 영애에게서 벗어나고 말 것이다!
로즈 영애는 잠시 고개를 기우뚱했다.
“대출 상환 이야기하러 온 건 아닌데. 천천히 갚아도 돼요. 아, 맞다. 그러고 보니 그거랑 관련해서도 할 이야기가 있었지. 칼스.”
“네, 아가씨.”
“그 서류 좀 보여줘.”
레이몬드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로즈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서운한 일을 하셨더라고요, 고객님.”
“네?”
“로즈한테 연락하지 않고, 다른 은행에 대출받으셨잖아요. 그것도 20% 복리 고리로.”
로즈는 웃고 있었다.
얼음 같은 웃음이었다.
“로즈한테 연락했으면 0.1% 저리로 해주었을 텐데…… 제가 왕자님께 많이 신뢰를 주지 못했나 봐요.”
“아, 아니, 그건…….”
“뭐라고 하려는 건 아니에요. 다만.”
로즈는 레이몬드에게 서류를 건네었다.
“그 200만 페나 초고리 대출, 힐러 론으로 갈아타시죠.”
“……네?”
“이율은 연 0.1%로 해줄게요.”
레이몬드는 눈을 크게 떴다.
어마어마하게 감사한 제안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저 200만 페나 초고리 복리 때문에 파산할 위기였는데!
하지만 레이몬드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이유가 무엇인지?”
이번 일뿐이 아니다.
힐러 론의 로즈는 항상 말도 안 되게 좋은 조건으로 그에게 대출을 해주었다.
더구나 그의 소식을 듣기 위해 신문사까지 인수했다니.
누가 봐도 이상하지 않은가!
“그거야 당연하죠. 제가 왕자님께 사심이 있으니까요.”
“……!”
“몰랐어요?”
로즈는 빤히 물었고, 레이몬드는 식은땀이 흘렀다.
‘……저, 저거 무슨 뜻인 거야?’
차마 진심이냐고 물어보기 무서웠다.
알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음, 아실지 모르겠지만, 로즈는 독점욕이 강해요.”
“…….”
로즈는 나직이 말했다.
“그래서 고객을 뺏기는 일 따위는 참지 못하거든요. 특히나 당신처럼 소중한 고객님을 그딴 허접한 은행에 뺏기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녀의 오드 아이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래요…… 절대로 있을 수 없어요.”
“…….”
레이몬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위험하다.
그런 마음이 들었지만, 0.1%의 초저리는 거절하기에는 너무나 달콤한 제안이었다.
로즈는 긴장하지 말라는 듯 배시시 웃었다.
“그렇다고 제가 왕자님께 무언가를 요구하려는 건 아니에요.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니…… 제 마음은 혼자만 간직하고 있을 거예요. 일단, 지금은요.”
일단, 지금은.
무언가 불길한 단서가 덧붙여졌다.
“어쨌든 200만 페나 대출 전환 건은 공짜로 해주는 건 아니에요.”
“그러면?”
“부탁이 있어요.”
부탁.
레이몬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껏 수 없는 대출을 받았지만, 로즈가 이런 이야기를 꺼낸 건 처음이었다.
‘설마 새우잡이 배에 들어가라는 부탁은 아니겠지?’
눈치를 보니 다행히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레이몬드는 조심히 물었다.
“어떤 부탁입니까?”
“환자를 치료해 주세요. 제가 아는 분이 아프거든요.”
“아.”
레이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정상적인 부탁이었다.
“반드시 치료하겠습니다. 어떤 병을 앓고 계신 겁니까?”
“저도 어떻게 아픈지는 모르겠어요. 직접 뵌 지는 오래되어서. 그냥 중병이라고만 전해 들었어요.”
“실례지만 영애와 어떤 관계입니까?”
“외가 쪽 할아버지예요.”
“……!”
레이몬드는 놀란 눈을 하였다.
할아버지!
‘가족이 있었구나.’
생각해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워낙 무시무시한(?) 이미지라 가족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 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가서 진찰해 보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만약 외할아버지를 치료하는 데 성공하면 200만 페나는 대출 전환이 아니라, 완전 변제 해 드릴게요. 치료비는 그 정도로 되겠지요?”
레이몬드는 당황한 얼굴을 했다.
치료비로 200만 페나를 내겠다는 것이다!
“아, 아니…… 그건 너무 과한…….”
“페닌 치료원이 표방하는 게 노블레스 요금제잖아요. 부자일수록 많이 내라고. 나 부자라서 이 정도는 내야 할 것 같은데.”
“그, 그렇긴 합니다만…….”
“그리고 치료 성공하면 외할아버지한테도 어떤 보상을 받을지 잘 고민해 보세요.”
로즈는 막대 사탕을 꺼내 물었다.
“외할아버지 엄청난 수전노라서 돈은 별로 안 줄 건데, 대신 나름대로 권력이 있어서 왕자님이 원하는 걸 뜯어낼 수도 있을 거예요.”
말을 마친 로즈는 사탕을 문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름 모를 집사가 그녀에게 코트를 입혀주었다.
“칼스, 외할아버지댁 주소와 성함을 드려.”
“네, 아가씨.”
칼스가 초청장처럼 생긴 종이를 건네었고, 레이몬드는 얼떨떨하게 그 종이를 받았다.
“그 주소로 가서 거기 안에 들어 있는 제 명함을 보여주면 외할아버지께 안내받을 수 있을 거예요. 뭐…… 치료하기 어려울 것 같으면 무리해서 치료하지 않으셔도 돼요. 딱히 정이 있는 사이는 아니어서.”
여러모로 의문이 생기는 말들이었다.
‘도대체 외할아버지가 누구길래?’
의문과 함께 종이를 열어보았다.
그리고 안의 내용을 본 레이몬드는 뻣뻣이 굳었다.
믿을 수 없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로즈는 싱긋 웃으며 방을 나갔다.
“그러면 이만 가볼게요. 아, 그리고, 아시겠지만 제가 외할아버지 손녀인 건 비밀이에요.”
“……아, 알겠습니다.”
원래라면 배웅했겠지만, 레이몬드는 머리가 하얗게 굳어 그러지 못했다.
그만큼 종이에 적힌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이건…… 도대체?’
여러 기다란 주소가 적혀 있었지만, 레이몬드의 눈에는 딱 두 줄만 들어왔다.
게이볼그가.
미스헬트 대공.
이게 로즈가 말한 환자의 주소와 이름이었다.
참고로, 게이볼그 가문은 자유 도시 연합을 지배하는 최고 수장 가문.
미스헬트는 그 게이볼그 대공가의 현 가주였다.
이 문구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로즈 영애는 게이블그 대공가 가주의 외손녀였던 것이다.
* * *
라펜텔의 페닌 치료원을 나온 후, 로즈 영애는 마차에 올랐다.
“호텔로.”
“네, 아가씨.”
마차 안이 잠시 정적에 잠겼다.
칼스가 조심히 물었다.
“과연 레이몬드 왕세자가 미스헬트 대공을 치료할 수 있을까요?”
“글쎄. 모르지. 외할아버지가 어떤 병을 앓고 계신지도 모르니까.”
“심각한 일 아닙니까? 미스헬트 대공이 죽으면 아가씨도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칼스는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였다.
위험하다.
사실 굉장히 순화한 표현이었다.
미스헬트 대공이 죽으면, 로즈도 죽는다.
그녀의 모든 걸 빼앗은 적들이 그녀를 살려두고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그녀의 외할아버지인 미스헬트 대공의 눈치를 봤기 때문에.
‘그날’.
로즈가 모든 걸 잃었던 날.
그녀의 외가인 게이볼그 대공가는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만 선언하였다.
‘우리는 개입하지 않겠소. 하지만 이 아이의 목숨만은 살려두시오.’
덕분에 로즈는 목숨을 건졌고, 머나먼 소국 휴스톤 왕국까지 도망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환하게 빛나는 레이몬드를 만나기 전까진.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무채색의 삶이었다.
“내가 죽는다고 해도 큰 상관 없잖아.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나?”
“아가씨!”
로즈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라펜텔의 전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화려한 귀족들의 거리도, 시궁창 같은 빈민들의 거리도 보였다.
낙원과 지옥이 공존하는 최악의 아름다움을 가진 도시.
가만히 그 모습을 보다가 로즈는 불쑥 말했다.
“이곳 라펜텔도 살기 좋아지겠지?”
“네?”
“우리 VVVIP 고객 왕자님이 그렇게 만들 테니까. 그렇지?”
칼스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레이몬드는 기드온과 로드리고 사이에 껴서 스스로 건사하기도 힘들어하는 처지였다.
하지만 로즈의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하기 어려웠다.
지금껏 레이몬드는 항상 기적을 일으켜왔으니까.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내가 VVVIP 고객 왕자님을 눈여겨보기 시작한 이유는 간단해. 그는 항상 기적을 일으켰거든. 미천한 처지임에도. 늘 자신보다 남들을 위하며 기적을 일으켰어.”
로즈는 가만히 말을 이었다.
“나는 못 했던 일이니까. 오히려 난 누구보다 고귀하며, 모든 걸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바보같이 당하고 말았지.”
칼스는 무겁게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우리 왕자님을 보고 있으니…… 나도 욕심이 생기네.”
로즈는 막대 사탕을 오도독 깨물었다.
“욕심이 생겨.”
* * *
레이몬드는 로즈 영애가 주고 간 종이를 충격으로 바라보았다.
‘로즈 영애가 게이볼그 대공가 사람이었다고? 그러면 로즈 영애가 소유한 은행들도 게이볼그 대공가에서 물려받은 건가?’
하지만 레이몬드는 고개를 저었다.
로즈는 ‘외할아버지’라고 하였다.
외손녀인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외손녀가 가문의 재산을 상속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