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46
강대원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만지작거리다가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형주에선 재미가 어땠나?”
기수는 뜬금없는 질문에 의아했다. 형주라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순간 뭔가 감이 잡히면서 긴장이 되었다.
‘이 새끼. 혹시 범장의 뒷조사를 한 건가?’
어이가 없었지만 요즘 하는 꼴로 봐선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뭐. 그냥…. 그저 그랬습니다.”
곧바로 질문이 이어졌다.
“자네가 강간하고 죽인 계집이 누구였지?”
기수로선 제대로 대답해야 하는 질문이었다.
‘아! 범장 이놈 진짜 나쁜 새끼였네. 왜 여자를 강간해? 그리고 왜 죽여?’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기수는 급히 내공을 끌어올려 염정구심술을 시전했다.
이런 일에 내공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지만 수로맹주를 만날 때까지는 판을 깰 수 없었다. 강대원의 모든 질문에 대답하기만 하면 간단히 피해갈 수 있는 일이니까 일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강대원의 마음을 읽어 보니 온통 한 가지 생각에 집중되어 있었다.
‘틀려라!..틀려라!..틀려라!..틀려라!..’
집요하게, 오로지 그 생각만 할 뿐이었다.
기수는 그가 정신병자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그가 답을 생각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질문을 했다.
“그녀 집안에 대해 듣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면 이름을 알고 싶으신 겁니까?”
“아무 거나.”
그리고는 곧바로 머릿속으로 틀리라는 주문을 반복해서 외우기 시작했다.
무슨 광신도 같은 그의 집념에 기수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강대원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곧바로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형주를 떠나올 때 태운 게 누구 집이었나?”
기수는 염정구심술을 시전했지만 강대원은 틀리라는 주문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아까 한 번 통했다고 아주 재미를 붙였는지 리듬까지 집어넣었다.
기수는 결국 포기했다.
“그것도 오래전 일이라 생각이 잘 안 납니다.”
“흐흐흐…. 자기 사촌 집에 불 지른 걸 어떻게 잊을 수 있지?”
“제가 기억력이 원래 안 좋거든요. 하하!”
기수는 허탈하게 웃었다. 강대원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었다.
‘그래. 네가 이겼다! 그래서 뭘 어쩔 건데?’
강대원이 기수를 노려보며 말했다.
“솔직하게 얘기해라. 너. 관의 끄나풀이지?”
기수는 뜨끔했지만 이젠 될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하하! 그럴 리가 있습니까?”
“흐흐흐…. 그래. 네가 관리라면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이 많기는 하지. 그래도 네가 범장이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얘기해라! 누가 널 보냈느냐?”
기수는 들키고 나니까 이상하게도 마음이 오히려 편안해졌다.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넌 살인강도나 저지르고 다니기엔 뭐랄까, 실력이 너무 뛰어나. 얘기해봐라. 무림맹이냐? 아니면 마교냐?”
“하하! 정말 그럴 거라고 믿는 건 아니겠지요?”
“흐흐…. 네 정체는 이미 드러났다.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다.”
기수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나를 정말 의심했다면, 왜 채주님 혼자입니까?”
너 혼자서 나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돌려서 묻는 것이었다.
강대원이 막붕비나 갈태독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우선, 범장이 자기 생각대로 정체를 숨긴 첩자로 판명 날 경우 애당초 그를 채용한 자신에게도 일정부분 책임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른 부하들도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수로맹주가 준 비급을 통해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의 무공을 연마하고 있었다. 범장 정도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강대원이 내공을 끌어올리면서 말했다.
“너 정도는 손가락 하나로도 제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 순순히 털어놔라.”
“우선 이것부터 받고 얘기해보시지요.”
강대원은 기수가 뭘 받으라는 건지 몰랐지만 파공음을 듣는 즉시 반응해서 펄쩍 뛰어 올랐다. 탁자 아래로 유성추가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흥! 감히 저항하겠다고?”
강대원은 손을 갈고리 모양으로 만들어 기수의 어깨를 찍어갔다.
그러나 파공음과 함께 또 하나의 유성추가 날아갔다.
좁은 선실. 두 사람은 순싞간에 십여 초를 교환했다.
강대원은 비로소 범장의 무공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기수 역시 수적 채주의 무공이 예상보다 뛰어남에 놀랐다.
그런데 기수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적이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아 놔…. 이게 뭐냐. 쌍절곤 처음 만져보는 초딩도 아니고…’
유성추가 문제였다.
분명 연습할 때는 잘 됐었는데 실전에서, 그것도 강대원 정도 되는 실력자를 상대하기엔 문제가 많았다.
칼이나 창은 잘못 휘둘렀을 때 즉시 멈추거나 거두어들일 수 있는 데 반해, 잘못 회전시킨 유성추는 끝까지 관성에 따라서 돌았다.
그렇게 회전한 추는 결국에 가서는 회전의 중심을 향해 다가왔다.
기수는 졸지에 강대원의 공격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공격도 피해야 했다.
적이 2배로 늘어난 셈이었다.
기수는 당장이라도 유성추를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어떻게든 유성추로 끝장을 보려는 기수의 노력은 줄이 어깨에 휘감기면서 최악의 위기상황을 만들어냈다.
“하하하! 뭐 하는 짓이냐!”
강대원은 스스로를 묶은 기수를 비웃으며 공격을 펼쳤다.
위기상황에 처한 기수는 내공을 급히 끌어올리고 자신의 무공의 근본이자 가장 위력적인 분광권의 초식들을 펼쳐내기 시작했다.
한 쪽 팔이 자기 무기에 의해 묶인 바보 같은 상황이라 한 손밖에 쓸 수 없었지만, 위기에 처해서 작정하고 펼치는 초식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허억! 이, 이게 무슨…….”
강대원은 다 이겼다 생각하고 있다가 갑자기 범장의 손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이자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
결국 미간에 한 방 정통으로 얻어맞고 그대로 뻗고 말았다.
그가 쓰러지자 기수는 우선 유성추 줄을 풀어 바닥에 팽개친 후 급히 달려가 미드에서 본 것처럼 강대원의 목에 검지와 중지를 대서 맥박부터 확인했다.
“아! 죽어버렸네. 이렇게 쉽게 숨이 끊어질 줄이야….”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조금 더 버티면 수로맹주를 만날 수 있었는데, 채주를 죽였으니 이제까지 투자한 시간이 다 물거품이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어쩌지? 생각을 해 봐. 생각을….’
이럴 때는 탁지연이 필요한데 옆에 없었다.
잠시 후, 기수는 나름대로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는 벽에 걸린 작은 구리거울을 가지고 와서 자기 얼굴을 비쳐 보며 강대원의 얼굴을 만들었다. 그리고 목소리도 비슷하게 내는 연습을 했다.
어느 정도 비슷해졌다고 생각한 기수는 강대원의 옷을 벗겨 자기가 입고 강대원에겐 범장의 옷을 입힌 후 수건으로 얼굴을 감싸 묶었다.
그는 선실 문을 살짝 열고 말했다.
“배를 강변에 대라.”
그러자 선원들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채주님! 강변은 위험합니다.”
기수는 그들이 자기를 강대원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역용도 잘 됐지만, 날이 어둡고, 자기 선실에서 명령을 내리니까 의심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난 적이 아무리 많아도 겁나지 않는다. 잔소리 말고 시키는 대로 해라!”
“하, 하지만 채주님….”
“난 기수라는 자로부터 도전장을 받았다. 그와 싸우고 올 테니 배를 강변에 대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라. 알겠느냐?”
“아, 알겠습니다.”
기수는 선실 문을 닫고 기다렸다.
그리고 배가 북쪽 강변에 닿는 기척이 느껴지자 밖으로 나가 곧장 배에서 뛰어내린 후 경공술을 펼쳐 배로부터 멀어졌다.
“금방 다녀오마!”
부하들 눈엔 자기네 채주가 저녁 때 방문한 범장을 어깨에 들쳐 메고 적진으로 달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채주님이 저렇게 용감했었나?”
“그러게 말야. 단신으로 적진을 향해 쳐들어가다니.”
수로맹 부하들은 채주의 용기에 감탄하며 부디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가슴 졸이며 기도했다.
기수는 으슥한 숲에 이르러 다시 옷을 갈아입었다.
이번엔 범장의 옷에 기수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기감을 일으켜 주변의 인기척을 감지한 후 백리세가의 감시초소 근처로 가서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수로맹의 채주 강대원이다! 백리세가 놈들은 전부 다 나와라!”
초소는 발칵 뒤집혔다.
백리세가 무사들이 튀어나오자 기수는 강대원의 시체를 마치 자기가 금방 점혈해서 쓰러트린 것처럼 바닥에 쓰러트린 후 말했다.
“나는 기수다! 이것은 백리세가에 주는 선물이다.”
백리세가 무사들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당신이 기수입니까?”
그들도 삼황맹을 혼자서 쫓아버린 고수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렇다.”
“저희 가주님이 당신을 꼭 모시고 싶어 하십니다. 저희와 함께 가시지요.”
“난 지금 할 일이 있어서 그럴 수 없다. 가주님의 호의에 감사드린다는 얘기를 전해주기 바란다.”
그리고는 곧장 몸을 날려 강변으로 달렸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백리세가 무사들이 그의 뒤를 따라왔다.
기수가 자기네 편이 되어준다면 이 전쟁을 쉽게 이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한 번 더 부탁해보려는 것이었다.
기수는 선풍비를 시전하여 그들과의 거리를 크게 벌렸다.
그러면서도 따라올 여지는 남겨두었다.
그렇게 강변에 도착한 기수는 범장의 얼굴과 목소리로 수로맹의 배에 뛰어오르며 다급하게 외쳤다.
“어서 배를 출발시켜라! 백리세가 놈들이 온다!”
선원들은 깜짝 놀라 배를 밀어 강심으로 저어갔다.
“채주님은 어떻게 하고 선장님 혼자 오십니까?”
“채주님은 안타깝게도 기수란 자에게 당하셨다.”
“예! 그게 정말입니까?”
선원들은 크게 놀랐다. 채주가 죽은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가 왜 그렇게 위험한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선원 중 한 명이 기수에게 물었다.
“우리 채주님은 어떻게 싸우셨습니까?”
“정말 대단한 대결이었지. 그런 싸움은 내 평생 처음 봤어.”
자기 무기에 자기가 묶이다니. 젠장!
선원들은 다들 채주 강대원의 용기에 감탄하는 한편,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본진으로 돌아온 기수는 막붕비와 갈태독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두 사람도 뜻밖의 상황에 깜짝 놀랐다.
“기수란 자의 도전장을 받았다고? 그게 어떻게 전달되었단 말이냐?”
“그 전달과정은 저도 모릅니다. 다만, 제가 아는 것은 갑자기 부르시더니 자기가 기수와 싸우러 가야 하는데 옆에서 좀 도와달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자 갈태독이 무릎을 치며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기수라면 삼황맹의 원수가 아닌가! 그런 자를 왜 혼자 상대하려 했단 말인가.”
막붕비가 자기 의견을 말했다.
“혼자 공을 세울 생각으로 우리에게 얘기하지 않은 게 분명해.”
“맞아.”
막붕비와 갈태독은 기수가 도와주지 않아도 서로 주고받으면서 시나리오를 완성시켰다. 기수는 속으로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천재가 분명해.’
어쩌면 탁지연보다 더 머리가 좋은 사람은 자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기 정체를 밝혀낸 골칫거리를 처치했고, 그 시체를 이용해서 백리세가에 기수의 이름을 한 차례 각인시켰다. 그리고 부수적인 효과도 있었다.
막붕비와 갈태독은 백리세가 진영에 첩자도 보내기도 하고, 채주 배의 선원들로부터 증언도 들어서 보고가 모두 사실인지부터 확인했다.
그 후, 막붕비가 말투까지 바꾸면서 기수에게 부탁했다.
“27채는 임시로 자네가 맡아줘야겠네.”
“예? 저는 자격이 안 됩니다. 수로맹 식구가 된 것도 최근이고요.”
그것은 갑작스런 제안이었다.
“그래도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27채의 선장들 중에 자네만한 인재가 없네. 임시로 맡아주면 우리가 맹주님에게 정식으로 보고를 올리겠네. 그러면 새로 사람을 내려 보내주실 수도 있고, 그냥 자네를 정식 채주로 임명할 수도 있지. 그때까지만 강채주의 뒤를 이어주게.”
기수는 뛸듯이 기뻤다.
채주가 되면 수로맹주와는 직통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 번 더 사양했다.
“제가 중책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수적질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다 배우면 되는 거지.”
기수는 잠시 망설이는 척 한 후 대답했다.
“그렇다면 임시로 강채주님의 뜻을 이어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네.”
곧바로 27채 선장들의 모임이 열렸고 그 자리에서 기수는 졸지에 수로맹 36채 중 한 채의 임시 두령이 되었다.
기수는 기존 선장들이 신참인 자신이 채주 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분위기는 의외로 호의적이었다.
백리세가와 싸우면서 몇 차례 보여준 실력이 인정받은 것 같았다.
기수는 연회를 열어 막붕비와 갈태독, 그리고 자기 휘하 선장들과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새벽엔 탁지연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채주 된 것을 축하해주었다.
채주로서의 첫째 날.
기수는 육대기의 진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나이는 많지 않지만 수로맹에서 먹은 짠밥 수가 장난이 아니었다.
기수의 모든 질문에 답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기수는 채주 역할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막상 요령이 생기니까 특별히 어려운 건 없었다.
채주가 되니까 가장 좋은 점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스케줄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채주 3인방 회의에서 예전보다 고급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삼황맹과 녹림72채는 기수의 생각보다 훨씬 더 수로맹과 밀접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수로맹엔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