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45
기수는 다음날도 하루 종일 사매들과 어울렸다.
인터넷도, TV도, 드라마도, 신문도 없는 세상인데 어찌된 일인지 할 얘기가 끊이지 않았다.
그를 통해 여자들에겐 대화 자체가 중요할 뿐, 그 안에 담긴 내용은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여자의 입은 역시 얘기하는 용도에 가장 많이 쓰였다.
기수와 말이 잘 통하는 사람 우선순위를 꼽자면 단연 탁지연이었다.
거의 텔레파시라고 할 정도로 뜻부터 통했다.
그러나 다른 다섯 사매들과의 대화도 즐거웠다.
‘아! 내가 옷을 입은 상태에서도 이런 관계를 만들 수 있다니…’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사매들은 침대 위에서도 제각각의 부위별, 행동별 개성을 드러냈지만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저마다 성격이 달랐다.
그녀들과 교류하는 게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알몸일 때는 뭐 그냥 대충 들이대면 다 해결되었지만, 옷을 입은 상태에서 상대의 마음을 여는 데는 약간의 화술과 기법이 필요했다.
예전엔 그런 걸 귀찮다고 생각했는데, 붕대에 감겨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참을성을 가지고 도전해볼 수밖에 없었다.
막상 해보니까 의외로 재미가 있었다.
키스, 심지어는 터치나 페팅조차 없이 대화만으로 이루어지는 교감이다 보니 처음엔 밋밋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뭔가 깊은 맛이 느껴졌다.
기수는 결심했다.
‘나중에 붕대를 푼 뒤에도 이런 시간을 꼭 가져야지!’
물론 뜻대로 잘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로선 꼭 그러고 싶었다.
6명의 각기 다른 캐릭터와 말빨만으로 소통하는 훈련을 하다 보니 여자의 심리에 대해서 배우는 것도 굉장히 많았다.
알고 있던 것들도 복습하게 되었고, 새로운 사실들도 알게 되었다.
기수는 사매들을 6명의 선생님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배웠는데, 그렇게 해서 알게 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남자는 듣기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기가 말을 할수록 감점이었다.
그리고 여자의 말에서 논리적 시비선악을 가리려고 하면 그것도 감점이었다.
그녀들은 그저 자기 얘기에 동조해주고 공감해주는 귀가 달린 남자를 원할 뿐이지 입으로 떠드는 남자, 논리로 지적하는 남자, 오류를 정정해주는 남자, 정답을 제시해주는 남자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그걸 깨닫고 나니까 대화가 훨씬 쉬워졌다.
중간에 맞장구 쳐주다가 막판에 ‘네 말이 맞아. 난 전적으로 네 편이야.’라는 취지의 멘트만 해주면 얼굴이 환해지고 감정적으로 카타르시스를 얻는 게 훤히 드러나 보였다.
심지어는 탁지연조차도 그런 경향은 동일하게 보였다.
사매 6명이 그렇다면 이 세상 모든, 적어도 90% 이상의 여자가 그렇다고 봐도 맞을 것 같았다.
사매들도 기수와 얘기하는 것이 즐거운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입 안 가득 화젯거리를 물고 와서 기수 앞에 줄을 섰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다 보니 기수는 슬슬 피곤함을 느꼈다.
여자의 심리에 대해 배우는 기간은 즐거웠지만 알만큼 알고 나니까 역시 여자의 입은 어떤 용도에 가장 어울리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기수가 치료를 마친 후 구경하던 모두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적진에 다시 침투해봐야겠어.”
“괜찮겠어? 몸도 성치 않은데.”
“하핫! 강시들과도 싸웠는데 뭐… 그리고 그 후로도 시간이 한참 지났잖아.”
“그럼 이제 다 나은 거야?”
“방금 붕대 풀었을 때 봤잖아? 아직은 조심스러워.”
사실 기수는 그동안 잠 대신 운기조식으로 밤을 보냈다.
자는 중에는 피가 주기적으로 아래쪽으로 간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팽창의 통증으로 한 번 깨고 난 다음부터는 상처가 터질까봐 다시 잠을 잘 수 없었다.
다행히 운기조식을 제대로 하면 수면 없이도 피곤하지 않았다.
그리고 의식으로 회음혈 쪽으로의 혈류 흐름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에 정말 수도승처럼 금욕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루도 못 참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처 난 부위 때문인지 의외로 오랜 시간 버틸 수 있었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미녀 6명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욕정을 자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니까 맘만 먹으면 도를 닦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를 닦아서 신선이 되는 방법이라면 이미 머릿속에 모두 들어 있었다.
물론, 그것도 붕대를 푼 이후에는 생각이 달라질 가능성이 있긴 했다.
탁지연이 말했다.
“궁주님. 적은 이전보다 훨씬 경계태세를 강화했을 거예요.”
“알아. 그러니까 더 더욱 들어가서 확인해 봐야지.”
“하지만 위험할 텐데….”
기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여기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게 더 위험해.”
그 말엔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혈매궁의 인원은 옛 산적 출신 부하들을 합해도 70명이 채 안 되었다.
일월신교와 정상적으로 맞부딪혀 싸웠다면 진작에 전멸 당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소항산의 가파른 능선과 무극환혼진에 의지해서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9마왕 중 5명과 교주의 세 아들 중 2명을 죽이기까지 했으니 지금까지는 대성공이라 할 만 했다.
하지만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여전히 불리한 상황인 것이다.
기수는 그날 밤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고 무기는 소지하지 않은 빈손으로 산을 내려갔다. 그리고 중간쯤에서 수로맹 시절의 범장 얼굴로 바꾸었다.
혈매궁 궁주 얼굴은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무극환혼진을 벗어나 탈각왕의 기문진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는 뭔가 위화감을 느끼고 걸음을 멈추었다.
‘어라? 이거… 뭔가 좀 바뀌었는데?’
기문진의 기본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생문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삼각형에서 선택할 때 외우는 숫자의 조합이 달라진 것 같았다.
유지상과 한빙왕을 죽이고 잔혈묵연을 모조리 태워버린 범인이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나갔으니, 기문진 조합을 바꾸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소를 잃은 건 잃은 거고 외양간은 고쳐야 했던 것이다.
기수 입장에선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젠장! 그냥 돌아갈까?’
현재로선 더 깊이 들어갔다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기보다는 후퇴하는 게 바른 선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돌아가면 사매들의 수다를 들어줘야 했다.
‘안 돼지! 잠입이 꼭 필요한 일이라고 말해놓고, 이렇게 그냥 돌아가면 웃음거리가 되고 말 거야.’
기수는 강행을 결심했다.
‘조합을 바꿔봤자 기본은 그대로니까 뚫을 수 있을 거야. 내 머리를 믿자.’
그로부터 15분 후.
믿을 걸 믿었어야 했다.
기수는 적이 쳐 둔 실을 건드려 딸랑거리는 종소리를 울리고 말았다.
“아! 진짜…”
기수는 화를 억누르고 그 자리에서 약간 벗어난 곳으로 이동하여 자세를 낮추었다.
이럴 떄 흥분하여 날뛰면 오히려 더 손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자기도 진을 쳐봐서 잘 알았다.
차분히 기다리자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일월신교 교도 10여명이 몰려왔다.
“어느 쪽이냐!”
“이쪽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기수는 더욱 자세를 낮추고 숨을 죽였다.
“이번에도 멧돼지란 말이냐?”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횃불을 밝히고 발자국을 확인해라.”
화섭자에 불이 당겨지고 주변이 환하게 밝아졌다.
기수는 슬쩍 고개를 들어 나뭇잎 사이로 적의 배치 형태를 살핀 후 파천강기를 작게 만들어 날려 횃불을 박살내버렸다.
“앗! 뜨거워….”
“무, 무슨 일이냐!”
“암기입니다! 근처에 적이 있습니다!”
일월신교 교도들은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고 고함을 질러댔다.
기수는 씩 웃었다.
그는 놈들과 싸워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의 목적은 조무라기 10여명을 쓰러트리는 게 아니었다.
적진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마스터 키가 필요했다.
그는 경공술을 활용하여 무리의 우두머리 근처에 몸을 숨겼다. 무공 수준에 큰 차이가 났기 때문에 적들 중 누구도 기수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했다.
기수는 염정구심술로 우두머리와 동조를 이루었다.
그가 길을 찾을 때 숫자조합 외우는 것을 한 번만 들으면 만사 오케이였다.
그 기회는 오래지 않아 찾아왔다.
“놈은 도망치고 있을 것이다. 나를 따라와라!”
횃불이 꺼진 후 더 이상 공격이 없자 침입자가 포기했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기수는 동조 상태를 계속 유지한 채 따라갔고, 마침내 그 답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일종의 해커가 된 기분이었다.
‘고마워. 후후…. 이제 너희들이 생각하는 시나리오 대로 움직여줘야겠지?’
기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뛰기 시작했다.
“저쪽이다!”
“놈이 달아난다!”
일월신교 교도들이 따라오자 기수는 아슬아슬하게 잡힐 듯 말듯 간격을 맞추며 도망쳐서 무극환혼진 속으로 들어갔다.
일월신교 교도들은 그 앞에서 감히 더 들어오지 못했다.
하지만 놓친 게 못내 아쉬운지 한참을 서성거리며 돌아가지 않았다.
기수는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멀리 우회하여 다른 쪽을 통해 상대편 진영으로 들어갔다. 이번엔 생문 찾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원하는 어디건 갈 수 있었다.
기수는 일단 교주와 회합을 가졌던 공터로 가보았다.
적 진영 최고 고수의 위치부터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곳곳에 경비병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이목을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탈각왕의 기문진은 외부의 침입자를 막는 데 탁월한 반면 내부에서의 움직임도 어느 정도 제한을 가했기 때문에 몰래 숨어 다니는 입장에선 오히려 수월한 편이었다. 생문 찾는 법만 확실히 알면 되었다.
공터가 가까워지자 기수는 기척을 최소화 했다.
교주와 적근왕의 존재가 그에게 한 판 붙어보고 싶은 호승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2:1로는 싫었다.
게다가 자신은 지금 부상자 명단에 오른 상태 아닌가.
공터에 도달한 기수는 깜짝 놀랐다.
수백 명이 빽빽하게 줄 맞춰 서 있었다.
좁은 간격 우로나란히 보다 훨씬 더 밀착된 대형이라 어깨끼리 서로 닿을 정도였다.
기수는 그게 사람이 아닌 강시들이라는 사실을 곧 알아차렸다.
‘도대체 강시를 얼마나 많이 생산한 거야?’
무슨 스타워즈에 나오는 스톰트루퍼도 아니고, 얼굴도 개성도 없는 놈들이 빽빽하게 도열한 모습이 상당히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세로로 19줄인가? 20? 거기다 가로를 곱하면… 뭐야! 적어도 600마리는 넘는 거네? 설마…. 다시 한 번 세어보자.’
숫자에서부터 기가 질렸다.
자세히 살펴보니 시체의 상태가 상당히 안 좋은 것들도 섞여 있었다.
오래된 무덤도 파헤친 모양이었다.
3마리와 싸우던 기억을 되살려 보면 이들 600마리를 전부 다 박살내는 데는 꽤 긴 시간이 걸리거나 아니면 엄청난 진기가 소모될 게 분명했다.
‘6.25때 중공군도 아니고… 이 정도 물량을 확보할 줄이야…’
기문진에 별 영향을 받지 않는 놈들 수백 마리가 꾸역 꾸역, 위로 위로 기어 올라가다 보면 산채의 담을 넘는 놈도 분명 생길 것이었다.
일단 산 정상 근처에 수백 마리가 우글거리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기수는 그 와중에도 긍정적인 면을 보려 했다.
‘그래도 미리 발견해서 다행이야.’
숫자가 600이건, 700이건 하나씩 줄여가다 보면 언젠가는 다 없앨 수 있을 것이었다. 빨리 발견했으니까 빨리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기수는 시작하기에 앞서 공터 주변을 살폈다.
계속 마음에 걸리는 건 교주와 적근왕이었다.
그들은 기척도 거의 감지하기 힘들다는 게 더욱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그때, 대형 천막 쪽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서너 명이 한꺼번에 밖으로 나왔다.
기수는 급히 호흡을 멈추고 기도를 감추었다. 그토록 찾던 교주와 적근왕, 탈각왕, 거기에 더해서 호중만까지 동시에 나타난 것이다.
‘종합선물세트다!’
저들 4명만 잡으면 혈매궁에 가해지는 모든 위협이 다 제거된다 할 수 있었다.
‘뛰쳐나갈까?’
가슴은 두근거리고 손은 근질거렸다.
아주 제대로 된 짜릿한 결전을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어느 정도는 이길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기수는 참아야 했다.
만약 자기가 당한다면 사매들 모두 이곳에서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자기 한 사람 호승심을 충족시키고, 짜릿한 결전의 쾌감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녀들을 담보로 삼을 수는 없었다.
무공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교주와 적근왕. 거기에 탈각왕과 600마리의 강시까지 있는데 나가는 건 아무래도 현명한 선택이 아닐 것이었다.
기수는 계속 기척을 숨긴 채 그들의 행동을 관찰했다.
호중만은 뭔가 설명하면서 교주에게 자루 달린 종을 주었는데 반짝이는 것으로 보아 재질이 은인 것 같았다.
얘기를 다 들은 교주는 그 종을 들고 구세군처럼 흔들었다.
중저음의 쩔렁 쩔렁 소리가 나자 600마리 강시가 동시에 그 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섬뜩한 광경이었다.
교주는 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마치 군대에서 제식훈련이라도 시키듯이 좌로 가, 우로 가, 뒤로 돌아 같은 명령을 내렸는데, 그때마다 강시들은 일사불란하게 착착 움직였다.
그리고 교주가 종을 짧게 한 번 치자 모든 강시가 처음의 부동자세로 돌아갔다.
교주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호중만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호중만은 감격한 듯 머리를 숙이며 큰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곧 나머지 분량도 완성시켜 가지고 오겠습니다.”
기수 입장에선 끔찍한 소리였다.
‘강시로 군대를 만들 작정인가!’
먹지도 자지도 않고, 창칼에 뚫리지도 않는 놈들을 계속해서 수 백마리씩 만들어내면 그걸 도대체 누가 감당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병력 공급이 무한정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강시들과 싸워서 전사자가 나오면 그 시체가 바로 재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저놈부터 제거해야 하겠구나.’
공장을 그냥 놔두고 생산품을 부수는 것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될 것 같았다.
기수는 숨을 죽이고 지켜보다가 호중만이 산을 내려가자 조심스럽게 따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