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63
기수는 비룡검법 중 가장 화려한 초식들을 마음껏 사용했다.
진짜 고수들끼리의 대결에선 가장 효과적인 초식을 쓰기 마련이지만 남궁현은 기세에서도 밀렸고, 기량도 부족했다.
남궁천이나 진백 같은 고수들은 이미 남궁현의 공격이 하나도 먹혀 들어가지 않을 때부터 승패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측 일반 제자들의 관점은 달랐다.
남궁현이 압도적 우위로 이길 거라 생각하다가 확 뒤집어진 그 결과는, 두 사람이 사용한 온갖 검초들과 더불어 마치 남궁세가의 검법이 비룡검에 밀리는 것 같은 인상을 강하게 심어주었다.
비룡검문 제자들의 환호성 소리가 커지는 만큼 남궁세가의 사기는 꺾였다.
안 그래도 포위당한 상태라 잔뜩 주눅 들어 있었기 때문에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비룡검법 시범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한 기수는 멋들어지게 남궁현의 검을 쳐서 공중으로 띄워 올린 후, 비틀거리는 상대의 발목을 걸어 넘어뜨리고 목에 장검을 들이댔다.
“와아!…”
비룡검문 제자들은 그 결과에 엄청난 함성을 터뜨렸다.
남궁현은 새파랗게 질려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기수는 씩 한 번 웃어준 후, 자기가 공중으로 쳐 올린 남궁현의 검이 떨어지기 직전에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뻗어 잡았다.
그리고 진백에게 물었다.
“문주님. 어떻게 할까요?”
기수가 기대한 것은 로마의 검투사들이 이기고 나서 귀빈석을 쳐다보면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리는, 그런 장면이었다.
진백에게 스폿 라이트를 비춰주기 위해 바로 죽이지 않은 것이다.
진백은 손을 가볍게 가로저으며 말했다.
“일단 제압해두게.”
기수로선 의외의 반응이었다.
자기가 팔에 힘 한 번만 주면 남궁현은 피를 콸콸 쏟으며 죽어 자빠질 것이었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혈매궁에 현상금을 건 장본인이 바로 남궁현임을 알기 때문이다.
남궁현이 죽는 모습을 눈앞에서 본다면 남궁천은 감정적 동요를 이기기 어려울 것이고, 진백이 평생에 걸쳐 별러온 복수는 순조롭게 성공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진백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기수 입장에선 좀 이례적인 느낌이었다.
‘뭐지? 이 바른생활 교과서 읽는 느낌은?’
이제까지 그가 이끌어 온 조직은 수로맹과 혈매궁.
몸담았던 곳까지 합친다면 상춘관이나 약선문도 쳐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일처리를 하는 곳은 없었다.
특히 혈매궁의 경우엔 목표가 정해지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최선의 길을 택하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행동에 옮겼다.
비룡검문의 방식은 교과서적인, 명문정파 스타일이었다.
기수는 그동안 무림맹에 속한 문파들도 다 거기서 거기고, 그냥 옷만 바꿔 입은 조폭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좀 신선하게 여겨졌다.
그가 검극으로 남궁현의 혈도을 짚은 후 번쩍 들어서 뒤로 물러서자 진백이 나섰다.
남궁천도 서너 걸음 앞으로 나와 진백과 마주 섰다.
상대를 마주 보면서, 두 사람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무겁게 흐르는 정적.
아직 검을 뽑지 않았지만 이미 대결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만약 지게 된다면 문제는 심각했다.
남궁천에게는 치욕의 봉문이 기다리고 있고, 진백은 사조 때부터 별러온 설욕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기수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관전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온몸이 오싹했다.
마치 우리나라의 월드컵 본선 경기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진백의 내공이 약간 부족하다는 의미에서 유럽 팀과 붙은 기분이었다.
남궁천이 먼저 검을 뽑았다.
마치 슬로우비디오처럼 아주 느린 속도였다.
그러자 진백도 검을 뽑았다. 마찬가지로 느린 움직임.
두 사람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서로를 노려봤지만 움직임만큼은 아주 느렸다.
검을 세우고, 발을 옮겨 디디는 동작 모두가 신중하기 짝이 없었다.
조금 전 남궁현, 기수의 대결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계속 탐색전만 벌일 것 같던 두 사람은 한 순간, 거의 동시에 검을 뻗었다.
“타핫!”
“하앗!”
그로부터 무시무시한 접전이 시작되었다.
챙챙챙챙챙!—-
짧고 민첩한 초식들로만 순식간에 50초, 100초를 넘어 교환되었고, 검과 검 부딪히는 소리가 거의 AK-47 난사하는 속도로 울려 퍼졌다.
조용하던 양측 제자들 모두 탄성과 신음을 토해냈다.
기수도 몸을 자꾸만 뒤틀었다.
당구장에서 자기 공에 힘을 불어넣듯 진백의 움직임과 자꾸 동조되었다.
남궁천이 예상보다 더 고수라서 안타까운 마음이 더했다.
원래 바둑 두는 당사자들보다 옆에서 구경하는 훈수꾼 눈에 수가 더 잘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진백의 움직임 중 기수의 마음에 차지 않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상황은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기수는 곧 원인을 알아차렸다.
‘아! 내가 너무 완벽함을 바라고 있구나.’
국대 경기 보면서 FC바르셀로나만큼 못 한다고 투덜댄 느낌.
살짝 객관적 관점을 시도해 보니까, 남궁천 역시 이상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기수의 레벨이 두 사람 보다 위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이것은 진백 혼자서 감당해야 할 싸움이었다.
기수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응원밖에 없었다.
진백은 정신을 집중하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처음엔 남궁천의 검을 막아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러나 초수가 거듭될수록 상황은 조금씩 나아졌다.
우선, 조금 전에 양호법이 유도한 남궁현의 움직임들이 많은 참고가 되었다.
그리고 실전에 있어서는 그동안 양호법과 대련한 경험들이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남궁천의 검술이 위력적이긴 하지만 양호법과 비교하면 날카로움과 힘에서 어딘가 조금씩은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대결이 이어지다 보니 자신감이 점점 더 생겼고,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대결을 지켜보던 기수의 눈이 빛났다.
‘됐다! 희망이 보인다.’
남궁천이 펼치는 제왕검과 진백의 비룡검. 검법에선 어느 쪽이 낫다고 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내공은 분명히 남궁천 쪽이 우위였다.
그 대신 진백은 싸움 운용 면에서 남궁천보다 노련했다.
어느 쪽이 이겨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백중세.
그런데 그 균형추가 조금씩 진백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남궁천의 표정은 심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자신의 패배 뒤에 이어질 일들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3년간 봉문은 자기 한 목숨 죽어 없어지는 것으로도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상대는 자신이 펼쳐내는 필살의 공격들을 어떻게든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지속적으로 반격을 가해왔다.
마치 계속해서 온몸에 달라붙는 끈적끈적한 늪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몇 차례 더 그를 꺾으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결국 남궁천은 진백의 끈질김을 이겨내지 못했다.
쨍! 하는 파열음과 함께 도리어 그의 검이 부러졌고, 남궁천은 피를 토하며 대여섯 걸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는 부러진 검을 짚어 간신히 쓰러지는 것을 면한 후 말했다.
“으으…. 져, 졌다.”
진백은 고개를 젖히고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드디어 남궁세가를 꺾었다. 하하하하!…..”
그의 눈 꼬리엔 눈물이 맺혔다.
평생을 바쳐온 숙원을 마침내 달성한 기쁨 때문이었다.
기수는 훌쩍거리는 소리에 좌우를 둘러보았다.
비룡검문의 제자들.
그 사나이들의 눈에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기수는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이 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더불어 울컥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들과 반대로 남궁세가 무사들은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
천하의 남궁세가가 3년간 봉문이라니…
누구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남궁천이 한 번 더 피를 토해내고 자세를 바로잡은 후 진백에게 말했다.
“승부에서 졌으니 후회는 없다. 자! 내 목을 쳐라!”
진백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는 오로지 이 순간만을 위해 살아왔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어려운 싸움을 함께 한 상대에게 어느새 존경심 같은 게 생겼다.
그리고 자신의 사조가 남궁세가의 가주에게 죽은 게 아니라 목숨을 보전하고 후인에게 검술을 남길 시간을 가졌다는 사실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아마 그 당시 남궁세가의 가주가 승부에서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는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진백이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을 죽이지 않겠소. 약속만 지키시오.”
그리고 기수 쪽을 보고 턱짓을 했다.
기수는 남궁현의 혈도를 풀어 돌려보내 주었다.
진백의 의도를 알아차린 것이다.
이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본 남궁천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내상을 입은 몸임에도 불구하고 자세를 바로 잡고 진백을 향해 정중히 포권을 한 후 말했다.
“진문주의 호의에 감사하오! 우리는 약속대로 3년간 봉문을 하겠소. 3년 뒤 다시 도전할 기회를 주시오.”
비록 졌지만 당당한 모습이었다.
진백도 포권을 하고 말했다.
“기다리겠소.”
그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서서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비룡검문 제자들도 문주를 따라 검을 집어넣고 보무도 당당히 청석대로 위를 걸었다.
남궁세가 사람들은 다들 주먹을 움켜쥐고 이를 악물었지만 그들이 멀어져가는 광경을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완벽한 패배였다.
기수는 비룡검문이 마음에 들었다.
비룡검법은 스피드보다 파워를 중시하는 쪽이라 검이 좀 무거웠다.
그런 만큼 여제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정도 규모의 사내 집단이 피를 흘려가며 격전을 치러 승리했는데, 약탈이나 아녀자 겁탈 같은 것 없이 순순히 물러서는 것은 확실히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이 남궁세가에 와서 쟁취한 것은 오로지 명예.
그리고 기수가 남궁현에게서 뺏은 검 한 자루가 전리품의 전부였다.
비룡검문 문도들은 죽림에 재집결했다.
기수는 진백 앞에 무릎 꿇고 남궁현의 검을 바쳤다.
검신엔 세가의 문양이 새겨지고, 자루엔 홍옥이 박혀서 눈에 확 띄는 보검이었다.
“문주님. 이번 승리의 작은 기념품입니다.”
“양호법. 일어서게.”
진백은 기수에게 검을 쥐어주며 말을 이었다.
“이것은 자네가 가지도록 하게. 자네야말로 우리 비룡검문의 자랑일세.”
순간,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비룡검문 제자 400명이 동시에 무릎 꿇고 기수를 향해 군례를 올렸다.
기수 입장에선 가슴이 뜨거워지는 순간이었다.
양측이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었고, 검법의 전수도 끝났으니 이젠 동굴의 위치를 가르쳐준 후 헤어지면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다.
한편, 남궁세가는 침울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봉문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던 남궁현마저 완벽한 패배에 기가 죽어 아버지의 상처만 돌볼 뿐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시녀 이향은 부리나케 안채로 뛰어 들어가 백서옥에게 말했다.
“마님, 마님! 큰일 났어요!”
백서옥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침입자들은 어찌 되었느냐? 조용한 걸 보니까 다 물리친 거겠지?”
백서옥은 깨끗이 목욕하고 양십일 맞을 준비를 하다가 침입자 경보가 울리자 옷을 챙겨 입고 자신의 검을 뽑아 든 상태였다.
여차하면 싸움에 가세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며느리는 딸과는 약간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일단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이향을 보내놓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향이 말했다.
“가주님이 패하셨습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냐? 혹시… 돌아가셨느냐?”
만약 그랬다면 자기는 즉시 가주 부인으로 신분이 상승하는 것이다.
“아뇨! 내상만 입으셨습니다.”
“아! 그랬구나…”
“그런데 싸우기 전에 3년간 봉문을 조건으로 걸었기 때문에 지금부터 남궁세가는 일체의 강호 활동을 중단하게 될 것 같습니다.”
“봉문이라고?”
백서옥은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적이 누구이기에 가주님이 패하셨단 말이냐?”
“비룡검문이라는 자들이었습니다.”
“비룡검문?”
그녀와 이향은 십절금왕문 출신이라 강호정세에 밝은 편이었다. 장사를 잘 하려면 정보를 많이 알아야 하기 때문에 십절금왕문은 그쪽으로 많은 투자를 했다.
그러나 비룡검문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었다.
백서옥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이향이 말했다.
“마님. 그런데 큰일 났습니다!”
“뭐가 또 큰일이란 말이냐?”
“양십일 있잖습니까?”
“그가 죽었느냐?”
그랬다면 정말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사도 아닌 장작 패는 하인 주제에 왜 숨어 있지 않고 나섰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게 아니라…. 양십일이 바로 비룡검문의 첩자였습니다.”
백서옥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뭐, 뭐라고? 그, 그게 정말이냐?”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심지어는 그 자가 작은 도련님을 검술로 이기기까지 했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정말입니다! 둘째 도련님이 처음엔 기회를 잡는 듯 보였지만, 결국엔 꼼짝 못하고 졌습니다. 그리고 아끼던 검마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백서옥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양십일이 첩자였다고? 게다가 무공을 숨긴 고수? 그, 그러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온몸에 소름이 끼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