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04
광혼랑은 혼란에 휩싸였다.
한창 무림맹을 위기에 몰아넣고 있는데 제갈세가가 배신을?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무림맹을 완전히 제압한 이후 강호 정세가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보면 전혀 근거 없는 얘기도 아니었다.
천마교가 삼황맹, 녹림72채, 수로맹 등과 손을 잡은 것은 무림맹을 꺾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제갈세가가 끌어들인 음종이 그 일을 거의 다 해놓은 상황.
그쪽에서 향후 주도권을 생각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지극히 은밀하게 시행한 잠입 작전을 무림맹측에서 이미 알고 있다는 점도 이상했다. 심지어 자기 소속과 이름까지 정확히 알고 있지 않은가.
‘이 사실을 빨리 혈천제님에게 알려야 해!’
그러나 점혈을 당했으니 답답하고 두려웠다.
기수는 자신의 교란작전이 과연 먹혀들어갔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염정구심술을 쓰면 예민한 광혼랑이 눈치 챌 수도 있기 때문에 그냥 표정 변화를 살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천마교 전체는 어떨지 몰라도 광혼랑만큼은 제갈세가를 의심하는 게 분명했다.
애당초 겁을 줘서 쫓아버리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적들 사이에 의심의 씨앗을 뿌린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너스 점수를 줄 수 있었다.
‘아! 씨발… 천재 인정.’
무공에 심계까지… 스스로가 두려워질 정도였다.
기수는 광혼랑과 부하들의 혈을 다시 건드린 후 말했다.
“일 각이 지난 뒤에 점혈이 풀릴 것이다. 그러면 이곳에 배치된 너희 병력들을 전부 데리고 철수해라.”
광혼랑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우, 우리를 놓아준다고?”
“그렇다. 혈천제에게 가서 우리 맹주님의 말씀을 전해라. 천마교와는 당분간 마주치고 싶지 않다고. 뭐, 물론…. 너희들이 무슨 짓을 하건 겁날 건 없다. 제갈세가에서 전부 가르쳐줄 테니까.”
“으으….”
기수는 마지막으로 광혼랑의 가슴골을 한 번 더 감상한 후 입맛을 다시며 돌아섰다.
그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장락루를 나왔다.
멀찍이서 기다리며 지켜본 결과 십여 명의 고수들이 장락루를 떠나는 게 확인되었다.
‘됐어! 당분간 무림맹이 앞뒤로 협공당할 일은 없을 거야.’
해냈다는 쾌감과 함께 약간 서운한 기분도 들었다.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히어로들은 진짜 자기가 한 일 자랑하고 싶은 걸 어떻게 참나 몰라.’
나중에 자신의 일대기도 꼭 영화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의 등급이 좀 높으려나?’
그거야 뭐 적당히 수위 조절을 하면 되고, 여배우 캐스팅이 좀 어려울 것 같았다.
한두 명은 뽑을 수 있겠지만, 현실감을 살리려면….
그런 생각을 하며 합가촌에 도착한 기수는 촌장네 집으로 가다가 검은 그림자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어둠 속에 한 사람이 서서 촌장네 집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기수는 그가 누구인지 곧 알아차렸다.
“어르신. 여기서 뭐 하십니까?”
“아이고! 깜짝이야!”
합비는 부끄러운 일을 들킨 사람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왜 기척도 없이 다가와서 사람을 놀라게 해?”
“저보다 고수인 어르신이 그게 하실 말씀입니까? 그나저나 뭘 그렇게 넋을 놓고 보시는 겁니까?”
기수의 시선이 마당 안쪽으로 향했다.
촌장과 아들, 그리고 손자가 모두 모여 있었다.
대여섯 살 됨직한 손자는 머리를 양쪽으로 묶고 아장아장 걷는 모습이 귀엽기 짝이 없었다. 합비에겐 고손자가 되는 셈이다.
그의 아버지, 즉 합비의 증손자는 귀여운 손자와 달리 이미 탈모가 진행 중이라 합씨 가문 특유의 얼굴형이 보이고 있었다.
그는 몹시 근심어린 표정으로 촌장과 뭔가를 의논하는 중이었다.
기수가 합비에게 물었다.
“어르신. 여기서 뭘 구경만 하고 계십니까? 가서 자손들을 만나보세요.”
“쓸데없는 소리!”
“후후…. 괜히 고집 부리지 마십시오. 매일 밤 여기 와서 지켜보기 번거롭지도 않으십니까?”
“매일이 아냐. 오늘밤만이야.”
“오늘 뭐 특별한 일이라도 있었나요?”
“지현이 양곡과 면포를 징발하는 모양이야. 잠도 못 자고 고민하더라고. 살이 아주 쏙 빠졌어. 쯧쯧….”
기수는 의기양양하게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려다가 잠깐 멈추고 물었다.
“어르신의 능력이라면 당장 관아로 찾아가 지현을 혼내주면 되잖습니까?”
합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상 일이란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게 아냐. 지현을 죽인다고 해도 일만 더 커질 뿐이고, 빼앗으려고 마음먹은 건 반드시 가져가게 되어 있어.”
“호오~! 그렇군요.”
“너도 나이 좀 더 먹으면 알게 될 거야. 힘이 전부가 아니란 걸.”
“그래서 두고만 보실 겁니까?”
“방법을 찾아봐야지.”
자신감 없는 목소리였다.
기수가 보기에 합비는 피해의식이 심한 것 같았다.
자기가 뭔가 사고를 치면 그 업보를 가족들이 당한다는 생각.
기수가 그에게 말했다.
“어르신. 이 일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그게 무슨 소린가?”
“손자와 증손자의 근심, 걱정을 제가 싹 날려드리겠단 말씀입니다.”
합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관리를 죽이는 건 안 돼. 후환이 너무 깊어.”
“아무도 안 죽습니다. 심지어는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서도 이 일을 처리할 수 있다고?”
“물론입니다.”
“어떻게?”
“그건 제게 맡겨만 주시고. 대신….”
기수가 씩 웃자 합비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대신 뭔가…”
“화류의 공격법을 가르쳐주십시오.”
“아! 드디어 내 제자가 될 생각인가?”
“그건 아닙니다.”
합비는 홱 돌아섰다.
“힝! 그럼 못 가르쳐주지.”
“손자와 증손자의 고민, 더불어 합가촌 전체의 우환을 하룻밤 사이에 싹 사라지게 할 수 있는데도 말입니까?”
합비가 다시 기수 쪽을 봤다.
“하룻밤사이라고? 어떻게?”
“그러니까 그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어르신은 약속만 하시면 됩니다.”
합비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기수를 살펴봤다.
기수가 계속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짓자 그가 말했다.
“정말로 밤사이에 모든 우환이 사라진다면 구결을 가르쳐주지.”
“감사합니다!”
“얘기 끝까지 들어. 구결은 일러주겠지만 그 이상은 아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화류의 강기는 혼자서 깨우칠 수도 있지만 태포련(胎砲連)의 수법은 구결을 안다고 해서 펼칠 수 있는 게 아냐.”
“흐음…”
전자렌지가 쉽게 만들어질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단 회로도를 손에 넣는 게 어디인가.
“그래도 해볼 생각이 있는가?”
“물론입니다. 약속 어기시면 안 됩니다.”
합비는 촌장 집 마당을 한 번 돌아본 후 말했다.
“해결만 된다면…”
“저를 믿고 기다리십시오.”
기수는 합비에게 목례를 한 후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벗어났다.
이미 끝난 일이지만 합비는 그걸 모르니까 바쁜 척을 한 것이다.
멀어지는 기수를 보며 합비는 씩 웃었다.
“네가 그 구결을 익히고 나면 지금보다 훨씬 더 의문이 커질 거다.”
말이나 글로는 전할 수 없는 부분을 메우기 위해 자청해서 제자가 될 거라는 게 합비의 생각이었다.
기수는 가벼운 경공으로 합가촌을 벗어났다.
‘태포련이라고 했나? 어쨌거나 구결만 알면 그건 내 기술이다! 크크…’
음지에서 좋은 일을 한 보람을 드디어 찾는 기분이었다.
합비는 자꾸 감추려고 하지만 가르쳐주지 않아도 불을 만들어냈듯이 전자레지 식 공격법도 독학으로 터득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밤은 어디서 보내지?’
뭔가 중요한 일이라도 할 것처럼 합비와 헤어졌지만 갈 곳이 없었다.
지현과 현승의 일은 이미 처리가 끝났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때, 어떤 사람은 손바닥에 침을 뱉은 후 딱! 쳐서 방향을 잡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동전을 던지기도 한다.
기수는 몸이 끄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 스타일이었다.
존슨이 강력하게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하를 만나고 싶다!’
광혼랑과 함께 있으면서 예열이 된 상태라 오늘은 그냥 자기 싫었다.
장락루에서 존슨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잘 한 일이었다.
광혼랑이라면 자기 얼굴은 알아보지 못한다 해도 존슨은 알아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이즈로만 따지면 비슷한 것도 있겠지만 색상은 특별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 두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물건이 세상에 몇 개나 있겠는가.
무림맹 본진으로 가자 보초병들이 길을 막았다.
그러나 그들은 금세 기수를 알아봤다.
“아! 용봉련주님이시군요.”
“늦은 시간에 외출을 하셨나보군요.”
무림맹에 기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수고들 많으십니다.”
기수는 보초병들을 격려하며 안으로 들어가 보타문의 거처로 향했다.
원래대로라면 비룡검문 문주에게 인사라도 해야겠지만 야심한 시간에 다른 목적으로 잠깐 들렀는데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남은 문제는 사하를 어떻게 불러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보타문 거처 근방까지 접근한 기수는 갑자기 어둠 속에서 튀어나오는 검은 그림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럴 줄 알았어! 내가 이럴 줄 알았다고!”
그 검은 그림자의 정체는 놀랍게도 호운혜였다.
기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물었다.
“여,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하마터면 공격할 뻔 했잖아.”
“흥! 양호법님이 보타문의 잡년을 만나러 올 줄 알고 기다렸어요.”
“날 기다렸다고? 며칠이나….”
도대체 자기가 언제 올 줄 알고 숨어 있었단 말인가.
“그,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하지 않기는…”
그녀의 집요함에 겁이 나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바른대로 말해보세요. 우리 둘 다 만나지 않겠다고 한 후 보타문의 계집을 다시 만나셨죠?”
“내가 그랬나?”
호운혜는 발끈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두 사람 모두에게 실망했다. 이기적인 사람은 싫다. 그만 나가달라고 내쫓으셨잖아요!”
“그게 안 만나겠다는 얘기는 아니잖아.”
호운혜는 어이가 없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하핫! 길지도 않은 인생. 미워하고 싸우며 살기엔 너무 아깝잖아. 설령 실망했다고 해도 서로 반성하고 고치며 보듬고 사는 게 인생 아니겠어?”
“흥! 그럼 왜 그녀에게만 기회를 준 거죠?”
“설마…. 난 그렇게 편협한 사람이 아냐.”
호운혜의 눈이 빛났다.
양십일의 시선이 자신의 가슴에 고정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기수는 원래 사하를 만나러 이곳에 왔다.
그녀의 매끄러운 피부, 잘 빠진 몸매가 그리웠다.
그러나 호운혜와 비교했을 때 딱 한 가지 약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가슴의 볼륨감이었다.
사실, 호운혜와 사이즈로 견주어서 우위를 점할 여인은 거의 없었다.
문제는 기수가 광혼랑의 깊게 파인 상의 사이로 드러난 가슴골 때문에 발동이 걸린 상태라는 점이었다.
올 때는 사하 생각을 하고 왔지만 멜론 두 개를 보니까 존슨이 다른 방향을 가리켰고, 거기에 따라 마음도 바뀌었다.
사실, 호운혜가 뭐 크게 잘못한 것도 없지 않은가.
다만 사하가 약간 더 좋았을 뿐이지, 호운혜가 미워진 것은 아니었다.
호운혜는 양십일이 자기가 아닌 보타문의 거처를 찾아왔다는 사실에 화도 나고 자존심도 상했지만 그의 뜨거운 눈빛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다.
“그럼 제게로 다시 돌아와 주실 건가요?”
기수가 아무리 멜론을 먹고 싶어도 그런 약속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난 솔직히 어느 한 쪽을 정하지 못하겠어. 그때그때 마음을 따라 움직일 뿐이야.”
호운혜는 어이가 없었다.
떡을 양손에 쥐고 이쪽저쪽 다 맛보겠다는 파렴치한 수작 아닌가.
자기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그런 말을 노골적으로 하나 싶었다.
뺨을 한 대 후려치고 욕을 실컷 해준 후 떠나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머리의 생각일 뿐, 몸은 달랐다.
양십일과 마주 선 순간부터 저 아랫쪽 깊은 곳이 근질근질, 후끈후끈 거려서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 욕정을 해소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호운혜의 눈빛이 물기 머금고 반짝이는 모습을 본 기수는 슬쩍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말했다.
“우리 달도 밝은데 산책이나 갈까?”
“어디로요?”
“글쎄. 일단 남문 밖에서 만나는 게 어때?”
“날 따돌리고 도망치려는 생각은 아니겠죠?”
기수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진한 키스를 한 번 해준 후 말했다.
“나 못 믿어?”
“미, 믿어요….”
달아오른 두 사람은 각각 따로 본진을 빠져나가 밖에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