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14
기수는 운기조식을 짧게 끝냈다.
낯선 군영이다 보니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3개 단전을 한 번씩 운용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효과는 있었다.
‘내일을 위해 일찍 자볼까?’
무장을 벗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어디선가 피리소리와 비파소리가 들려왔다.
‘예상대로군. 하지만 이번엔 너희들 뜻대로 안 될 거다.’
귀마개를 더 깊이 밀어넣는데 가까이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천막을 들추고 들어온 사람은 놀랍게도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무, 무슨 일이오?”
여인이 사뿐히 절을 한 후 말했다.
“소녀는 금영이라 하옵니다. 소협을 모시러 왔습니다.”
기수는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워! 워!… 모시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호호! 뭘 그렇게 놀라세요? 그냥 생각하시는 것 그대로랍니다.”
금영은 애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기수에게 다가왔다.
20대 중반의 상당히 예쁜 얼굴이었고, 몸매도 볼륨감과 날씬한 라인을 겸비하고 있어서 존슨이 주인의 명령도 없이 반응을 보일 정도였다.
금영은 곧바로 기수의 품에 안길 것처럼 다가왔지만 기수는 정색하고 일어서서 손을 내밀어 그녀를 저지했다.
“멈춰!”
“아! 놀라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준비가 되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금영은 바닥에 무릎 꿇고 앉더니 옷을 풀어 젖히고 벗으려 했다.
기수는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벗지 마. 다시 입어.”
“예? 하지만…”
“나를 모신다면서 명령에 거역할 생각인가?”
“아, 아닙니다.”
금영은 옷을 도로 입고 생글생글 웃었다.
직접 벗기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는 표정이었다.
기수의 명령이 떨어졌다.
“돌아서서 나가라.”
“예? 양소협. 오늘밤 저는 당신 것이에요. 원하는 대로 마음껏 다뤄주세요.”
기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넌 자존심도 없냐?”
기수 입장에선 사실 거절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곽염은 자기를 끌고 오기 위해 상자 가득 금덩이를 채워 넣어 선물한 바 있었다.
미녀 한 명 잠자리 시중들게 하는 것쯤은 거기에 비하면 쉬운 일일 것이었다.
생긴 것으로 보아 기루에서 잠시 빌려온 정도가 아니라 동창에서 직접 키운 여인임이 분명했다. 혈매궁 사매들과 같은 신분인 것이다.
그렇다면 잠자리 기술도 일정 수준 이상은 보장된다고 봐야 했다.
그러나 기수는 금영을 안고 싶지 않았다.
‘아무 거나 줏어 먹으면 식중독에 걸리는 법이지.’
채정과 키스했다 죽을 뻔 했으니, 적어도 경험을 통해 뭔가를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금영이 다소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자존심이라니요?”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를 위해 옷을 벗는 것 말이다. 아니지. 좋아하거나 말거나, 나는 오늘 처음 보는, 알지도 못하는 남자잖아.”
“그것은….”
“너도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아니겠지. 하지만 정말 하고 싶지 않다면 안 할 수도 있는 일이잖아. 안 그래?”
기수 입장에선 명분을 세워서 쫓아내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금영은 빤히 기수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옷매무새를 고쳐서 벌어진 앞섭을 여몄다.
기수는 입맛을 다셨다.
‘그냥 한 번 할 걸 그랬나? 설마하니 내일 전쟁에서 써먹어야 할 사람을 중독시키거나 죽이지는 않을 거 아냐. 아무리 동창이라도…’
그러나 기수는 그 생각을 억지로 눌렀다.
일단 말을 하고 보니까 조직의 명령이랍시고 창녀짓을 강요당하는 금영의 처지에 동정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기수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금영은 기수와 손을 잡은 게 부끄러운지 뺨을 붉혔다.
스스로 벗으면서 마음껏 가지고 놀라고 하던 사람치곤 의외의 반응이었다.
“저. 여기에 좀 앉아 있다가 가도 될까요?”
기수는 그녀에게 침상을 내주었다.
“한 서너 시간 쯤 자다 가.”
“예? 그, 그렇게 해도 되나요?”
“일찍 가면 내 명예에도 문제가 있잖아. 난 이래 뵈도 일단 한 번 했다 하면 두 시진은 너끈하거든.”
“두 시진이라고요? 호호!… 말도 안 돼요.”
“안 믿네?”
“믿을 얘기를 하셔야죠.”
기수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금영은 기수가 내어준 침상에 걸터앉았다.
기수 말대로 누워 잠을 청하지는 않았지만 도발적으로 다가올 때에 비하면 많이 풀린 표정, 편안하기도 하고 약간은 피곤하기도 한 모습이었다.
“당신이 정말 현현각 루주들을 제압했나요?”
“별다른 기법이 있는 건 아냐. 나도 나의 어떤 부분이 음공을 막아내는지 모르고 있어. 심법은 아닌 것 같고, 아마 체질 때문일 거야.”
“그, 그 얘기를 물어본 게 아닌데요.”
“여기 들어온 목적 중 그게 제일 중요한 걸 텐데 뭘…”
“제, 제가 여기 온 목적을 아시나요?”
“너 동창 소속이잖아? 직급이 뭐야? 번장인가?”
“아, 아뇨. 아직….”
“아! 지독한 놈들. 여자라고 너무 무시한단 말야. 솔직히 무공으로만 따지면 너도 역장들한테 지지 않을 텐데… 그렇지?”
금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독심술이라도 익히셨나요?”
“내가 또 모르는 게 없어요.”
염정구심술을 쓸 필요도 없었다. 동창 안에서 여성 요원들의 근로조건이 얼마나 불평등한지에 대해서는 5명의 사매들이 산 증인이었다.
“어떨 때는 화가 나기도 해요.”
“후후…. 아까도 얘기했지만 네가 원치 않는 일이라면 때려 치면 되잖아.”
“하지만 일단 조직에 속하게 되면….”
기수가 씩 웃으며 물었다.
“정말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새로운 인생을 개척해나갈 용기가 없는 거야? 내가 알기론, 요원으로 훈련받고 시험에 통과해서 현장에 배치될 정도면 능력이 부족한 건 아닐 텐데….”
금영은 기수를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사람에게 있어 최악의 상황이란 게 뭐겠어? 죽기밖에 더 해? 나 같으면 내 멋대로 살다가 죽을 거야. 이런 일을 하느니…”
금영은 살짝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흥! 이런 일이 뭐 어때서요?”
“남이 시키는 일이잖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금영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딴전을 피우다가 말했다.
“당신은 정말 특이한 남자군요.”
“세상에 오직 하나뿐이라고 할 수 있지.”
“자만심이 많아 보이기도 하고요.”
“너도 세상에서 하나뿐인, 유일한 존재잖아. 자만심이면 어때? 너 스스로가 아니면 누가 또 너를 알아주겠어?”
“다른 사람들의 평가는 상관없다는 건가요?”
“그건 다 허상이야.”
기수는 현대에서 20년을 살았다.
그곳에서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여기서 아무 의미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행한 모든 일들도 현대로 돌아가면 의미가 없을 것이었다.
본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아줄 사람이 없다는 얘기는 자신의 상황이기도 하기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금영이 다시 기수를 빤히 보다가 물었다.
“당신 혹시 남자를 좋아하나요?”
“무슨 소리야!”
“그럼 혹시 환관인가요?”
“맞을래?”
남자의 무기로?
“아무 이상이 없는 남자라면 자존심이 상하네요.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요?”
“예뻐. 몸매도 훌륭하고…”
“그런데 왜 저를 안지 않으세요? 얘기는 이불 속에서 해도 되잖아요.”
“나는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동시에 나를 좋아해줄 때만 안아. 그 외의 경우는 모두 폭력이잖아.”
물론 동창의 요원이 채정만큼 부담스럽다는 게 진짜 이유지만, 말은 얼마든지 멋지게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금영의 눈이 반짝거렸다.
“이젠 우리가 서로 친해졌으니까… 어때요?”
그러면서 옷을 슬쩍 벌리면서 가슴을 내밀어 보였다.
기수는 씩 웃었다.
“네가 목표의식 강하고 집요한 건 인정해줄게. 하지만 통할 사람한테 해야지.”
“당신 정말 이상한 남자군요.”
“세상에 오직 하나뿐이지. 후후….”
금영은 유혹을 포기하고 옷을 다시 여몄다.
그리고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 어린 시절 얘기를 꺼냈다.
“사실, 동창에 들어간 건 내 선택이 아니었어요.”
가난 때문에 외가에 맡겨졌다가 외삼촌이 돈 몇 푼 받고 관비로 팔아넘긴 게 그녀의 인생 진로를 결정한 것이었다.
기수는 그녀의 기나긴 스토리를 전부 들어주었다.
금영이 마지막에 말했다.
“만약 여기를 빠져나간다면 외삼촌을 꼭 죽이고 싶어요.”
“끔찍한 얘기를 태연한 얼굴로 잘도 하네.”
“그게 솔직한 심정인 걸 어쩌겠어요.”
동창에서 훈련받은 요원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다는 걸 기수는 알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짓을 했다.
“자! 이제 그만 나가 줘.”
“오래 있다 가라면서요?”
“얘기하다 보니까 자꾸 땡겨서 못 견디겠어.”
“땡기다니, 뭐가요?”
“널 덮치고 싶다고. 자! 어서 나가.”
“호호호!… 욕망이 시키는 대로 한 번 해보지 그래요?”
“그럼 짐승과 다를 바가 뭐냐? 어서 가.”
“알았어요. 보채지 마세요.”
금영은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기수는 남아 있는 그녀의 향기를 마신 뒤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 동창 소속만 아니었어도…’
후회하며 뒤척이는 사이 어느새 출정시간이 다가와서 밥 짓는 냄새가 군영 가득 퍼졌다. 기수는 잠을 포기하고 운기조식만 몇 차례 더 한 후 단검 조끼를 입었다.
밖으로 나가 보니 곧바로 동창 소속 고수 두 명이 다가와서 군례를 올렸다.
“밤새 편히 주무셨습니까?”
“식사를 준비할까요?”
챙겨주는 건지, 아니면 겁먹고 도망칠까봐 감시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밥을 먹고 수통에 물을 채우자 타고 갈 말이 준비되었다.
곽염도 말을 타고 나타났는데, 금빛 번쩍거리는 갑옷과 투구를 갖춰 입고 자루에 꽃무늬가 새겨진 화극을 들고 있었다.
비록 환관이지만 대장군처럼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밤사이에 들려온 피리소리, 비파소리 때문에 불안감을 느끼던 병사들은 수장이 번쩍거리는 모습으로 돌아다니자 어느 정도 안정되는 모습이었다.
기수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한 무리의 우두머리에겐 외관도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곽염은 기수 옆으로 다가와 자기와 함께 행동하기를 청했다.
따라 다니면서 보니 곽염은 부하들을 능숙하게 다뤘다.
필요한 요소마다 핵심적인 지시를 빠르고 명확하게 내려서 대군의 출정을 쉽게 이끌어냈다. 조직부터 잘 짜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면서 아침 안개 사이로 관군이 진격하기 시작했다.
창병, 방패수, 도부수, 궁수로 구성된 부대는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목표지점을 향했다. 기수는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아무리 현현각이 기괴한 술법을 사용한다 해도 이 정도 병력이 쳐들어오는 모습을 보면 겁을 먹겠는 걸.’
목표지점은 시야가 탁 트인 언덕.
적은 이쪽의 움직임을 진작부터 파악한 듯 했다.
과연, 안개가 걷히자마자 사마연합의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좌우로부터 요란한 함성을 지르며 몰려드는 적들.
곽염은 부장에게 지시를 내려 깃발 신호를 했다. 그러자 관군은 세 갈래로 나뉘어 좌우의 적을 상대하면서 중군은 계속 전진을 했다.
적이 주둔한 언덕 앞에 이르자 또 다른 사마연합군이 길을 막았다.
곽염은 몸소 선두에 나서 싸우면서 부하들을 독려했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죽여라!”
“와아아!…..”
관군은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자기들의 수장이 단지 명령만 내리는 게 아니라 직접 목숨 걸고 싸우는 모습을 보이자 다들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곽염은 단지 투구와 갑옷이 화려하기만 한 게 아니었다.
그의 무공은 기수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만들 수준이었다.
‘대단하군. 그 주군이란 놈은 도대체 어떻게 저런 고수를 길러내는 걸까?’
지난번 천호인 진유룡도 짧은 시간에 내상을 치유하고 무공이 증진되었는데, 곽염도 그런 과정을 거친 것 같았다.
가능하다면 청강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곽염의 무공이 이곤에 비해 약간 부족한 면은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사도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차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구파일방 장문인 급에 해당하는 고수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나타난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곽염을 따라 대형을 갖추고 움직이는 동창 고수들도 상당한 수준까지 훈련이 잘 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기수는 장검을 뽑아 들었다.
자기도 구경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공격을 개시하자 적 진영 한 쪽이 빠르게 무너졌다.
말에 탄 채 검을 휘두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다행히 새로 맞춘 검이 길어서 그나마 좀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