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30
장기를 몇 판이나 두었을까.
처음엔 자영이 이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판이 거듭될수록 기수도 만만치 않게 승수를 올렸다.
나중엔 자영도 인정했다.
“너. 생긴 것보다는 머리가 좋구나.”
“감사합니다!”
칭찬의 주체가 그녀이다 보니 많이 기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녀와 장기 두는 게 몹시 즐겁기는 했다.
자영은 수가 막혔을 때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면서 입술을 모아 앞으로 내밀고 판을 뚫어져라 주시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 얼굴이 진짜 귀여웠다.
배시시 눈웃음치며 미소 지을 때만큼이나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밤이 깊자 한백랑이 들어와서 말했다.
“아가씨. 주무실 시간이 한참 지났습니다. 내일 하시죠.”
“그런가? 어쩐지 아까부터 자꾸 눈이 감기더라니.”
자영은 두던 장기판을 밀어냈다.
기수 입장에선 초반에 적의 마와 이쪽 상을 바꿨기 때문에 승산이 높은 판이었지만 그녀가 판을 엎는다면 어쩔 수 없었다.
자영이 기수에게 말했다.
“넌 여기서 자라.”
“예?”
“아가씨!”
기수와 한백랑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자영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양십삼은 다른 데서 자면 오늘밤 오빠가 보낸 자객한테 죽을 거야. 한백랑도 그 정도는 알고 있잖아?”
“하지만 아가씨! 남녀가 어떻게 한 방에서 잡니까?”
“그렇긴 하지?”
자영이 기수 쪽을 봤다.
기수는 물론 굳이 원한다면야 명령에 불복종할 마음은 없었지만, 그래도 한백랑이 워낙 길길이 날뛰니까 마음에 없는 소리를 했다.
“예. 그것은 안 될 일입니다.”
그리고 자영이 남녀관계에 상당히 무지하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자영은 한백랑에게 물었다.
“양십삼이 묵을 천막은 만들었어?”
“예. 제 천막 밖으로 배치했습니다.”
“둘이 천막을 바꿔.”
“예? 왜요?”
“자객이 와도 너와 내가 양쪽에서 지키고 있으면 감히 접근을 못할 거 아냐.”
“그, 그렇긴 하겠죠. 하지만 아가씨가 호위를 지켜주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일이었다.
“괜찮아. 맞수를 잃고 싶지는 않거든.”
한백랑은 자영과 기수, 그리고 장기판을 번갈아 봤다.
추룡선생과 바둑을 둬서 번번이 지기만 하던 데다가, 이번에 그가 암천제에게 고자질을 했으니까 자영의 성격상 두 번 다시 그를 부를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기수가 자영의 여흥을 전담하게 될 터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준비할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그래, 양십삼 너도 가서 짐 옮기는 거 좀 도와줘.”
한백랑은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저 혼자 하겠습니다.”
군영에 임시로 짐을 풀어 놓은 물건들이지만 남자에게 보이긴 싫었다.
기수가 자영에게 말했다.
“아가씨. 오늘 밤은 제가 다른 곳에서 자고 오겠습니다.”
“다른 곳 어디?”
“제 짐도 옮겨야 하고요. 만약 자객이 온다고 해도, 제가 여기 아예 없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밖은 위험한데…”
“하핫! 전 천제님의 마령과 대결해서도 이겼습니다.”
“이기긴! 고작 3초를 버텼을 뿐이지. 그것도 운으로.”
“운도 실력 아닙니까?”
“그렇게 말할 수도 있긴 하지만…”
“제 몸 하나쯤은 지킬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그럴까? 한 밤중에 옮기는 것도 번거로우니까…”
기수는 자영의 허락을 받고 자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군막 밖으로 나온 기수는 주변을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자영의 큰 천막에 여러 개의 작은 천막들이 이어져 있는 모습이 마치 개미집 같기도 하고 미로 같기도 했다. 그리고 주변 공간 역시 널찍해서 특별대우 받는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암천제의 동생이기도 하고, 또 기이한 마공을 보유하기도 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곳을 벗어난 기수는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이다가 슬그머니 군영을 벗어났다.
그에겐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자신이 복제한 원본 사내를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자영 옆에 원하는 동안 있으면서 필요한 정보를 빼낼 수 있었다.
기수는 빨래하고 말리는 옷 한 벌을 슬쩍 집어 들고 사내 숨겨둔 곳으로 가서 낙옆더미를 헤집고 사내를 깨웠다.
“으음…. 으헉!”
정신을 차린 사내는 달빛 아래 자기가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기수는 웃으며 본래 얼굴로 돌아갔다.
“하하!… 뭘 그리 놀라나?”
“으악! 너, 너는 뭐냐? 요괴냐?”
“후후… 뭐 그런 비슷한 거라고 할 수 있지. 암천제에게 볼일이 있어서 너의 얼굴을 빌어 잠입할까 생각중이거든.”
“그, 그런 수법이 통할 리가 없다!”
기수는 미소 지었다.
“이미 통했는데?”
“서, 설마…”
“그래. 너의 동료들과 방주, 심지어는 암천제까지 나를 양명으로 알고 있지.”
“마, 말도 안 돼….”
“단 한 가지 문제가 남아있는데 말야.”
“그, 그게 무엇이냐?”
불안감에 사내의 목소리가 떨렸다.
“네가 살아있으면 언젠가 발각될 수도 있단 말이지.”
“허억!”
사내는 비로소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게 되었다. 그는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제, 제발 살려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전 아무에게도 이 일에 대해 말하지 않고 즉시 이곳을 떠나버리겠습니다!”
“천마교에 충성을 맹세한 건 어쩌고?”
“그, 그건…. 꼭 칼을 들고 전쟁을 하지 않아도 명왕님을 모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후후… 사고방식이 유연하네.”
“제발 살려주십시오. 고향엔 아내와 딸이 제가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럴까? 나도 성이 같은 너를 굳이 죽이고 싶지는 않은데…”
“잘 생각하셨습니다. 제발…”
“설령 네가 군영으로 돌아와서 사실을 밝힌다고 해봤자 간단히 죽여 버리고 다른 얼굴로 바꾸면 내겐 아무 문제도 안 돼. 저기 저 나무 보이지?”
사내는 기수가 턱짓으로 가리킨 나무를 봤다.
순간, 파파팍! 하는 파공음과 함께 나무줄기에 구멍이 뚫리는가 싶더니 두 동강이 나서 쓰러져버렸다.
사내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이제까지 무림 고수에 대한 소문과 전설을 많이 들었지만 사오 장이나 떨어진 거리에서 나무에 구멍을 뻥! 뻥! 뚫는 수법은 금시초문이었다.
“이젠 내 얼굴을 봐.”
기수의 얼굴이 차례차례 여러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사내의 놀라움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 무공과 자유자재의 역용술이라면 자기가 아무리 진실을 밝히려 노력한다 해도 목숨만 잃을 뿐 상대를 찾아내지는 못할 것 같았다.
“다, 당신 같은 고수는 처음 봅니다.”
기수는 주머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어 양명에게 주었다.
“즉시 고향으로 돌아가서 아내와 딸을 데리고 다른 곳을 찾아 정착해.”
“이,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목숨만 살려주시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마누라와 자식이 고향을 떠나는 데 대한 보상이야. 받아 둬.”
“가, 감사합니다.”
기수는 돌연 말투를 바꿔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그냥 죽여 버리는 게 더 확실하려나?…. 쉽기도 하고.”
사내는 땅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빌었다.
“아닙니다! 전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겠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명교 쪽으로는 눈도 안 돌리고 살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기수는 턱짓을 했다.
“그럼 가 봐. 저 옷 걸치고.”
“가, 감사합니다!”
멀어지는 양명을 보며 기수는 생각했다.
‘그 정도 겁을 줬으면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겠지?’
중원 무림에 와서 지내는 동안 살인에 대해 무감각해진 것이 사실이었다.
한 자리에서 100명을 죽이라고 해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해치울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죽일 이유가 있을 때였다.
근무 교대하고 돌아가다가 우연히 자기를 만났을 뿐인 양명에겐 해당사항이 없었다. 더구나 마누라와 어린 딸까지 있지 않은가. 살기 위해 거짓말로 꾸며대는 경우도 있지만 염정구심술로 확인하는 기수 앞에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금화 하나 정도면 보상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깨끗하게 마무리를 하고 복귀한 기수는 다음날 아침부터 자영의 장기 상대를 해주어야 했다.
자영은 이길 때는 집중력을 발휘했지만, 지면 투덜거리고 짜증내고 싫증을 냈다.
자기가 실수해서 지면 판을 뒤집어 엎어버리기도 했다.
기수 입장에선 그녀 기분을 맞춰주고 싶었지만, 일부러 져주고 싶어도 장기 실력이 그 정도가 되지 못했다.
그냥 이기기 위해 열심히 두다가 자영이 실수를 하지 않으면 꼼짝없이 지는 거고, 만약 헛수를 두면 이기는 식이었다.
자영은 져서 화를 낸 다음에도 30분만 지나면 또 두자고 기수를 불렀다.
저녁을 먹고 한참 장기를 두는데 한백랑이 들어와서 말했다.
“아가씨. 출정계획이 연기되었답니다.”
자영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우리가 거의 다 이긴 거 아니었어?”
“무림맹 놈들이 장원 주변에 기문진을 설치하고, 전에 없이 강력한 방어태세에 돌입했다고 합니다.”
“현현각은 도대체 뭐하는 거야?”
“들리는 얘기에 의하면 현현각주가 비룡검문의 양십일이라는 호법과의 싸움에서 양패구상하여 지금 종적이 묘연하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기수를 향했다.
기수는 양손을 내저었다.
“저와는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양씨가 한둘인가요? 우리 형 아닙니다.”
다행히 자영과 한백랑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기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작명 센스에 대해 반성했다.
‘아무래도 성을 바꿔야겠어. 그리고 13번째는 형제가 너무 많아.’
자영은 투덜거렸다.
“흥! 제갈세가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리고 현현각 각주도 사실은 별 거 아닐 거라고 내가 그랬잖아.”
그리고 그녀는 두던 장기판을 쓸어버리며 말을 이었다.
“아! 지겨워. 그럼 여기에 도대체 얼마나 더 오래 있어야 하는 거야?”
기수는 자기가 유리한 판을 핑계 김에 망쳐버리는 자영이 얄미웠다.
‘이번 판은 이길 수 있었는데…’
그때 자영이 곁눈질로 슬쩍 눈치를 보다가 기수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일부러 엎은 게 들키는 순간이었다.
자영은 볼을 붉히고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한백랑. 우리 과일이나 과자 좀 갖다 줘.”
“알겠습니다.”
그녀가 나가자 자영은 배시시 웃으며 기수에게 물었다.
“눈치 챘어?”
“물론입니다.”
“미안. 호호호!…..”
“대충 웃음으로 넘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럼 어떻게 해줄까? 보상해줄게.”
기수는 보상 방법에 대해 순간적으로 몇 가지를 떠올렸다.
그러나 아직 손도 못 잡은 사이에 요구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들 뿐이었다.
“오늘은 장기 그만 두게 해주십시오. 하루 종일 뒀더니 어지러울 정도입니다.”
“그럴까? 좀 많이 둔 것 같긴 하네.”
“고맙습니다. 그럼 전 이만…”
기수가 일어서자 자영이 만류했다.
“가지 마. 너 없으면 심심해. 장기 말고 다른 거 하자.”
기수는 엉거주춤 다시 앉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거 뭐 말입니까?”
“글쎄. 뭐가 있을까?”
한백랑이 과일을 놓고 나가는 동안 자영은 자기가 할 줄 아는 다양한 놀이들을 제시했지만 기수 입장에선 모두가 다 생소했다.
“휴우…. 그나마 장기가 제일 낫겠네요. 오늘은 이만 가서 자고 내일 아침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러자 자영이 뜻밖의 말을 했다.
“가지 마. 난 너와 함께 있는 게 좋아.”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도 잘 모르겠어. 너하고 같이 있으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기분이 이상해져. 추룡선생이나 다른 남자들한테는 이런 느낌이 든 적 없는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하핫! 그, 그런가요?”
“혹시 이런 느낌이 남녀가 사귄다는 건가?”
예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그녀가 기수 입장에선 어이없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뭐. 비슷한 것 같기는 합니다.”
“너도 나하고 있는 게 기분 좋고, 가슴 두근거리고 그래?”
“무, 물론입니다.”
자영은 생긋 웃었다.
“아! 다행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그럼 우리 이제 사귀는 게 맞는 건가?”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그럼 앞으로 계속 장기를 두면 점점 더 깊이 사귀는 게 되는 거지?”
“글쎄요. 장기는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문제지요.”
자영이 탁자에 팔꿈치를 받치고 한 손으로 턱을 괴며 귀여운 얼굴로 물었다.
“사람이 어때서? 너, 혹시 장기 없이도 더 깊이 사귀는 방법 알아?”
“물론입니다. 가르쳐드릴까요?”
“응! 배우고 싶어.”
기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좋습니다. 아가씨는 방금 최고의 교사를 선택하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