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14
기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림맹 사람들이 자기한테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다 죽어가는 걸 살려줬는데, 나한테 이럴 수 있나?’
기수는 은근히 부아가 치미는 걸 억지로 누르고 물었다.
“이대로 놓아 보낼 수 없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주일비가 말했다.
“궁주님은 지금 천마교 교주를 만나기 위한 교환조건으로 저들을 데리고 간다는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이 마교를 몰살시킬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들을 이리로 부르십시오.”
기수는 어이가 없었다.
“천마교 교주를 무림맹으로 부르라고요? 올 것 같습니까?”
주일비는 곧바로 다음 대안을 얘기했다.
“그럼 우리도 함께 데려가 주십시오.”
“어쩌시려고요?”
“약속장소에 미리 매복하고 있겠습니다.”
기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소는 저들이 정할 것입니다. 저는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따라가서 기습을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기수는 헛기침으로 목을 고른 후 말했다.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저는 무림맹과 사마연합의 정전 및 평화를 중재하고자 노력중입니다. 그런데 이런 계책을 내시는 게 영 불편하군요.”
주일비는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천마교 교주가 왔다면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부디 중원 무림을 위해 허락해 주십시오.”
명색이 무림맹주인데 약간은 저자세라고 느껴질 만 한 말투였다.
기수의 무공이 너무 압도적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기수는 길을 막고 있는 수백 명의 무림맹 사람들을 향해 큰소리로 물었다.
“여러분도 모두 같은 생각입니까?”
주변이 술렁거렸다. 누구 하나 나서서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분위기 상으로 보면 주일비만 애가 닳은 게 아닌 듯 했다.
기수로서는 당황스런 상황이었다.
소림, 무당을 비롯해 수많은 방파의 수장들이 지난번 현현각의 첫 습격 때 목숨을 잃었는데, 그 장소가 바로 이곳, 화양문의 장원이었다.
전대 장문인의 피가 배어 있는 장소에 오고 보니까 다들 적개심과 복수심에 불타게 되었고. 주일비는 맹주로서 그들의 의견을 대변하는 거라 볼 수 있었다.
기수는 주일비 좌우에 서있는 장문인들 얼굴을 봤다.
단순히 주일비 한 사람뿐만 아니라 새로 문파의 수장이 된 사람들 모두가 복수를 원하는 눈빛이었다.
‘전대 장문인의 복수라… 포기할 수 없는 목표겠지…’
계속 밀리다가 이제 그 무서운 현현각주가 죽고 없으니 다들 용기를 내는 모양인데, 하필이면 자기 일을 방해한다는 게 문제였다.
‘이것들을 확! 그냥…’
사매들에게 얘기했듯이 힘으로 밀어붙이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현재 무림맹의 전력으로는 자신을 막을 수 없다는 게 기수의 판단이었다.
주일비를 비롯한 구파의 장문인들 무공 수준은 암천제보다 뛰어나다고 보기 어려운 정도. 합격진 같은 걸 쓴다면 꽤 귀찮아질 수도 있지만, 그건 혈매궁에도 있으니까 밀린다고 볼 수 없었다.
머릿수로 밀기엔 자신과 혈매궁이 현격한 힘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눌러버릴까?’
그러나 기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일단 말로 해보고, 정 안 되면 힘쓰는 건 마지막 수단으로 남겨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비룡검문이나 보타문, 십절금왕문 등의 입장도 고려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기수가 좌우를 둘러본 후 큰소리로 말했다.
“여러분에게 실망했습니다!”
군웅들이 술렁거렸다.
“무림맹이 사마연합보다 나은 게 무엇이겠습니까? 파사현정(破邪顯正)! 사도를 깨트리고 정의를 바로 세운다는 숭고한 목적에 따르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상대를 초청해놓고 매복을 하자고요? 아니면 몰래 습격을 하자고요? 그게 정말 명문정파들로 이루어진 무림맹 사람들 입에서 나올 소립니까?”
꾸짖는 음성은 장원 전체에 도도하게 울려 퍼졌다.
주일비를 비롯한 장문인들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기수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핵심을 정확히 짚어 얘기하니까 대꾸할 말이 없었다.
기수의 말이 이어졌다.
“도리를 놓고 따져도 그럴진대, 하물며 이들은 우리 혈매궁이 잡은 포로입니다. 당신들이 무엇을 했기에 남의 포로를 가지고 멋대로 계책을 세웁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우스운 일 아닙니까?”
무림맹과 혈매궁이 남이라고 확실한 선언을 하자 주일비를 비롯한 명숙들의 표정이 한 번 더 굳었다.
“궁주. 곡해가 있는 것 같은데…”
“말씀해 보십시오. 내가 뭘 오해했는지.”
“그러니까… 그게….”
주일비는 할 말이 없었다.
기수가 다시 말했다.
“길을 비켜주십시오. 우리 혈매궁은 우리 식으로 이번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그 뒤에 무림맹이 알아서 다시 포로를 잡건, 매복을 하건 마음대로 하십시오.”
주일비는 그렇게 쉽게 비킬 수 없었다.
지금 아니면 언제 암천제를 사로잡고, 천마교 교주에 접근할 수 있단 말인가.
“궁주. 궁주도 한 때 무림맹에 몸을 담지 않았소? 그리고 지금 화양문에 머물고 있기도 하고… 그러니 정도(正道)를 따라주시오. 내 부탁하겠소.”
“매복을 애기하면서 여전히 정도를 주장하시니 앞뒤가 맞지 않는군요. 예전에 한 때 무림맹에 입맹하려 했지만, 이런 무림맹이라면 사양합니다. 그리고 화양문에 머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즉시 나가겠습니다.”
그리고 기수는 양호중 쪽을 봤다.
양호중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계속 머물러 주십시오!”
주일비가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양호중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마주 봤다.
그는 비록 무림맹 소속이긴 하지만 무림맹으로부터 받은 은혜보다 혈매궁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더 컸다.
장원과 난주를 되찾아준 은인인데 밖으로 내칠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집 주인이 허락을 했으니 주일비의 입장은 더 곤란해졌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젊은 군웅들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기수를 막을 명분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원망 섞인 시선을 보내는 자들도 있었다.
그것은 필시 매복이니 기습이니 하는 얘기들을 꺼냈기 때문인 듯 했다.
주일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기수와 싸울 수는 없고, 결국 복수할 기회를 이렇게 놓쳐버린다고 생각하니까 아쉽기 짝이 없었다.
“좋소. 원하는 대로 하시오.”
주일비가 비켜서자 다른 장문인들도 그를 따랐다.
이왕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으니 그냥 끝까지 밀고 나가고 싶었지만 상대가 워낙 고수이다 보니 그건 불가능했다.
무림은 정사를 따지기 이전에 힘이 지배하는 세상 아닌가.
기수는 사매들에게 눈짓을 해서 사인교 좌우를 지키도록 했다.
혹시라도 ‘사부님의 원수!’ 어쩌고 하면서 점혈 당한 암천제를 기습할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무사히 장원을 빠져나온 기수는 뒤를 돌아봤다.
미련이 남았는지 무림맹 군웅들이 장원 문 앞에 모여 있었다.
‘쳇! 겁들은 많아가지고…’
어쨌거나 힘을 쓰지 않고 마무리된 것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탁지연이 다가와서 말했다.
“궁주. 미행에 대비해야 할 것 같아.”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기수는 사인교를 버리고 자영은 한백랑이, 암천제는 남자 마령이 업도록 했다.
아홉 명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다른 수작을 부리지는 못할 것이었다. 이제 교주를 만나러 가는 길인데 괜히 기수한테 맞을 짓을 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출발 준비를 확인하는데 자영이 기수에게 말했다.
“고마워…”
작은 목소리였지만 기수 귀엔 확실히 들렸다.
기수는 단지 자기 입장에 충실한 거였지만, 포로인 그녀는 덕분에 살았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기수는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주변 사매들, 특히 공주 눈치를 살폈다.
의외로 반응은 날카롭지 않았다.
눈썹 한 번 꿈틀거리고 말았을 뿐이었다.
‘어라? 왜들 이러지? 가출 한 번에 분위기가 싹 바뀐 것 같은데?….’
공주가 본능을 억눌러 참을 정도면 뭔가 엄청난 각오를 다진 것 같았다.
‘하핫! 이거 버릇 나빠지겠는 걸?’
어쨌거나 또 꼬집힐 일은 없을 거라는데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앞으로 사매들한테 미안한 짓을 하지 말자고 굳게 다짐도 했다.
한백랑을 따라 한참을 가자 낯선 기척이 하나둘 씩 느껴졌다.
천마교 측에서도 인원을 동원하여 경비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인데 기습을 논해? 어떤 때 보면 참 한심하단 말야.’
사공이 많은 무림맹보다는 일월신교나 천마교 같은 시스템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멍청한 놈이 교주가 되면 순식간에 망한다는 게 문제겠지만…
얼마간 더 들어가자 마령급으로 보이는 교도 4명이 일행을 맞았다.
한백랑은 자영을 내려놓았고 점혈을 풀어주었다.
암천제도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제 여기부터는 천마교의 영역인 것이다.
암천제와 자영은 스트레칭으로 뻐근한 몸을 풀고 관절도 돌려주면서 혈매궁 사람들을 노려봤다.
사매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기수는 여유 만만한 표정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암천제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무리 자기편이 많은 곳이라고 해도 기수와 다시 싸울 용기는 나지 않았던 것이다.
한백랑은 일행을 깊은 숲 속으로 안내해 들어갔다.
한참을 가자 흰색 군막 하나가 세워진 게 보였다.
군막 앞에 이르자 한백랑이 손짓으로 기수를 제지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세요.”
그러더니 암천제, 자영, 사로잡힌 마령등과 함께 군막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에서 인사를 하고, 경과보고를 하는 듯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5분쯤 뒤에 밖으로 나온 자영과 마령은 안색이 창백했다. 그러나 그 중에도 안도하는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적에게 포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부지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한백랑이 나와서 기수에게 말했다.
“들어오시지요.”
기수가 들어가자 사매들도 그를 따랐다.
군막 내부는 꽤 넓었다.
달랑 의자 2개에 탁자 하나뿐이라 더 휑해 보이는 것도 있었다.
기수는 맞은편에 선 세 사람을 보고 심호흡을 한 차례 했다.
암천제는 상관없었지만 천마교 교주 왼편에는 혈천제가 서 있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에 가슴이 서늘해져 왔다.
그리고 천마교 교주.
그는 머리카락과 눈썹과 수염이 전부 새하얀 백발이었다.
그런데 피부엔 주름이 하나도 없어서 몇 살인지 도무지 짐작이 불가능했다.
주안술 같은 인위적 느낌 없이 자연스러운 얼굴인 것으로 보아 반로환동(返老還童)의 경지를 넘어선 것으로 짐작되었다.
키는 170 중반이고 체형도 약간 마른 편.
그러나 치켜 올라간 눈썹 아래 형형한 안광을 발하는 두 눈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것 같았고, 우뚝한 코와 굳게 다문 입술도 몹시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그대가 혈매궁 궁주 기수인가?”
“그렇소.”
기수의 대답하는 태도에 혈천제, 암천제, 한백랑이 깜짝 놀라 움찔거렸다.
오체투지를 해도 모자랄 판에 그렇소라니…
천마교 교주는 손짓으로 그들을 진정시켰다.
“과연, 나와의 독대를 청할 정도의 배짱이로군.”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현현각주를 죽였고, 암천제와 자영을 사로잡았으며, 만나기로 하되 시간과 장소를 마음대로 정하라고 했다니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던 터였다.
직접 만나보니 과연 청년영웅의 기상이 헌앙한 사내였다.
무엇보다 주눅 들지 않고 자기를 대하는 태도가 묘하게 신경이 거슬리면서도 마음에 들었다.
그는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자리에 앉도록 하지.”
기수는 상대가 의외로 포용력이 있는 것을 보고 대한민국에서 교육받은 대로 노인을 공경하는 자세를 갖춰주기로 했다.
“고맙습니다.”
혈매궁 궁주로서 천마교 교주와 대등한 조건으로 만난다는 입장은 초반에 밝혔으니까 더 이상 상대의 비위를 거스를 필요가 없었다.
천마교 교주는 뒤에 서있는 사매들을 보고 기수에게 물었다.
“모두들 저기 서있도록 할 생각인가?”
기수는 천마교 교주 뒤에 혈천제와 암천제가 서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우리도 두 명만 남도록 하지요.”
사매들은 의논한 후 탁매와 예매를 남기고 나머지는 한백랑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머리로는 탁지연, 힘으로는 공주가 8명 중 가장 믿을만하기 때문에 뽑힌 것이었다.
천막 안에 6명만 남게 되자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고수들끼리 처음 만났을 때 탐색전은 피할 수 없는 과정.
기수는 천마교 교주로부터 합비 비슷한 기운을 느꼈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약간은 허술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합비처럼 기척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하고 있었다.
‘현현각주와 합비 어르신의 중간쯤이라고 보면 되겠군.’
기수는 한 차례 온몸을 휩쓸고 지나가는 전율을 느꼈다.
강자와 마주함으로 인해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호승심.
‘이 사람과 겨뤄서 이길 수 있을까?’
손바닥에 땀이 차오르고 호흡도 약간 가빠졌다.
그리고 강호엔 참으로 고수가 많다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다.
천마교 교주도 눈을 빛내며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기수는 그 역시 자기와 비슷한 생각 중임을 짐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