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50
기수는 사매들과 함께 산채 주변을 산책했다.
눈 돌아갈 정도의 경치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내 집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풍경이 꽤 봐줄 만 했다.
“여기에 정자가 하나쯤 있으면 좋겠네. 연못도 파고…”
기수의 말에 탁지연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궁주. 건물을 지으려고?”
“응. 왕총관한테 얘기해뒀어. 건물 몇 채 신축했으면 해서…”
“그런 건 우리하고 상의했어야지!”
“그런가? 그럼 왕총관과 얘기하고 필요한 게 있으면 추가해.”
“알았어. 돈은 얼마나 쓸 수 있는 거지?”
“수로맹에서 받은 거 전부.”
“정말 그래도 돼?”
“너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짓고 꾸며 봐. 단, 산채 공간이 허용하는 한에서. 아! 그리고 내가 짓기로 한 거 하나는 건드리지 말고.”
“그게 뭔데?”
“왕총관이 얘기해줄 거야.”
사매들은 산책하다 말고 우르르 몰려갔다.
다들 나중에 어떤 집을 어떻게 꾸미고 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았다.
혼자 남은 기수는 부하들을 데리고 무극환혼진을 점검했다.
수풀이 우거지면서 진의 완성도가 높아졌지만 일부는 수리가 필요한 곳도 있었다.
그리고 오후에는 모두를 연무장에 모아놓고 수련의 성과를 점검했다.
예전에 가르쳤던 도법을 제법 그럴듯한 수준까지 연마한 게 확인되었는데, 인상적인 것은 다들 눈빛이 또렷하고 기합소리도 우렁찼다.
왕사동이 옆에서 물었다.
“어떻습니까? 마음에 드십니까?”
“열심히 수련한 건 알겠군. 의욕도 넘치고.”
“부끄럽습니다. 천하의 혈매궁의 제자로 아직 부족한 게 많습니다.”
“천하의 혈매궁?”
“저희도 소문을 들었습니다. 삼황맹을 짓이겨 놓고, 수로맹의 은인이 되었으며, 역모의 수괴를 쫓고 있다는 얘기 말입니다.”
기수는 미소 지었다.
다들 눈빛이 살아있는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군이란 자가 똥줄이 탈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소항산에까지 역모 얘기가 퍼질 정도면 이젠 천하가 다 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천마교를 건드린 건가?’
약간은 감정적이라고 느껴지는 대응을 한 것은, 어쩌면 내부의 불안감을 누르기 위해서 ‘우리가 이 정도 힘이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위력시위처럼 느껴졌다.
적이 마각을 드러낼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는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이쪽의 힘을 키우는 것이었다.
기수는 모두를 모아놓고 새로운 초식 시범을 보이고, 그들의 자세를 교정해주었다.
부하들은 쩌렁쩌렁한 기합을 토하며 열심히 배웠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서는 자신과 사매들의 연공에 시간을 투자했다.
음양대법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뒷마당에서 실전 비무부터 했다.
일단 기운을 소진시킨 다음에 대법을 하는 편이 조금이라도 더 효과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음날도 오전엔 진을 확인하고, 오후엔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녁 먹은 이후엔 사매들과 대련하는 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사흘째거 되는 날 북경으로 보냈던 제자가 돌아왔다.
혼자가 아니라 중년 사내 한 명과 동행했다.
키가 작고 얼굴은 시커멓고, 차림새는 시장에서 배추장사나 생선장사를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발놀림이 경쾌했고, 눈빛도 예리했다.
기수는 그를 객청으로 맞아들였다.
사내가 먼저 정중히 포권을 한 후 말했다.
“혈매궁 궁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전 마연이라고 합니다.”
기수는 마주 포권을 하고 그의 기도를 살핀 후 물었다.
“마령입니까?”
“그렇습니다.”
“천마교에 있었던 일에 대해 얘기해줄 수 있습니까?”
기수뿐만 아니라 사매들도 모두 궁금한 표정이었다.
마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외인에게 교 내부의 일을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기수로서는 답답한 얘기였다.
“교주님의 생사 정도는 얘기해줄 수 있지 않습니까?”
“교주님은 살아계십니다.”
“아! 역시…”
그러나 마연의 표정을 보니 기뻐할 상황은 아닌 듯 했다.
“궁주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교주님이요?”
“두 분 천제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긴히 상의할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천마교 수뇌부를 만나고 싶었다.
사실, 지금의 상황엔 어느 정도 자신의 책임도 있었다.
천마교의 탈퇴를 종용한 게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천마교 쪽에선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기수 본인은 미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좋습니다. 함께 갑시다.”
기수가 일어서자 사매들도 따라 일어섰다.
마연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궁주님 한 분만 가실 수 있습니다.”
공주가 즉시 반발했다.
“천마교 소굴로 궁주만 보내라고? 그럴 수는 없어!”
탁지연을 비롯한 다른 사매들도 마찬가지 생각인 듯 했다.
기수는 그녀들을 달랬다.
“천마교는 지금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는 상황이야. 외인을 안으로 들이는 게 굉장히 조심스러울 거라고.”
결국은 사매들이 물러섰다.
“가서 한눈팔지 말고, 용무 끝나는 대로 곧장 돌아와야 돼.”
왜 한눈이란 단어를 강조하는지 기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걱정 마. 금방 돌아올 거니까.”
그렇게 사매들을 작별하고 나온 기수는 수로맹주의 옥패를 써먹고 싶었지만 마연은 배도 거절했다.
그를 따라 경공을 펼쳐 꼬박 하루를 달려 도착한 곳은 이름 모를 바위산이었다.
소항산에서 남서쪽으로 굉장히 먼 거리를 왔는데, 그 동안 주변에 큰 성이나 마을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보니 천마교의 총단은 꽤나 오지에 자리 잡고 있었군.”
기수의 말에 마연이 대답했다.
“여기는 피신처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이제부터 제가 디디는 자리만 그대로 따라 디디셔야 합니다.”
기수는 기문진법이 펼쳐진 것을 알고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한참을 들어가자 대나무밭 한가운데 모인 십여 채의 모옥이 보였다.
그리고 강력한 기도들이 감지되었다.
기수는 살짝 겁이 났다.
‘너무 대책 없이 따라온 건 아닐까?’
교주와 두 천제가 만나자고 하는데 아무런 준비도 없이 쉽게 응한 게 잘못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수는 두려움을 떨치는 의미로 내공을 집결시켜 그 기척을 일부러 드러내어 보였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긴장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기수는 그들 사이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발견했다.
자영과 혈천제, 한백랑과 소혼랑, 광혼랑 등이었다.
‘아! 한눈팔지 말라는 게 바로 이 상황을 얘기하는 거였구나.’
기수는 그녀들 옆에 있는 암천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기수에게 주눅이 든 상태라 시선을 똑바로 받지 못하고 피했다.
혈천제가 포권을 하며 말했다.
“궁주님을 뵙습니다.”
기수도 마주 포권을 했다.
그녀가 예전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사무적으로 대하는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거리감이 느껴져서 좀 섭섭하기도 했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교주님이 궁주님을 찾으셔도 연락할 길이 없어 답답했는데,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기수는 그녀의 안내에 따라 모옥으로 들어갔다.
그 안엔 천마교 교주 선유환이 정좌하고 있었다.
기수와 함께 들어온 혈천제와 암천제는 깜짝 놀라 그를 부축했다.
“교주님!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누우십시오.”
선우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켜라.”
기수는 그의 상태를 단번에 감지할 수 있었다.
불규칙한 호흡과 미약한 기도로 미루어 몹시 위독한 상태가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바른 자세로 앉아 기수에게 맞은 편 자리를 권했다.
“오랜만이군.”
“예. 몸이 안 좋아 보이는 데 편히 누우시지요.”
선우환은 기도만 약해진 게 아니었다.
얼굴도 전에 만났을 때보다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구유마존이라는 무시무시한 별호를 가진 그이지만, 지금은 생기가 다 빠져나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약한 노인의 모습이었다.
기수는 그와 친분이랄 게 없는 사이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제가 맥을 좀 짚어 봐도 될까요?”
선우환은 단호한 어조로 거절했다.
“그럴 필요 없네.”
“하지만…”
“난 적과 일 대 일로 싸웠고, 그에게 졌네.”
목소리를 일정하게 이어가는 것만도 힘들어 보여서, 혈천제와 암천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기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선우환은 잠시 숨을 몰아쉰 후 말을 이었다.
“졌다면 죽어야지. 그게 승부의 바른 귀결 아니겠는가?”
기수는 한 차례 심호흡을 했다.
지금 이 정도의 몸 상태라면 앉아 있기도 힘들 것이었다.
그러나 선우환은 혈매궁주 앞에서 천마교 교주가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듯 꼿꼿한 자세와 말투를 유지하고 있었다.
죽음도 별 거 아니라는 그의 태도를 보며 기수는 생각했다.
‘내가 이 사람보다 무공과 정력은 더 강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곧고 강인한 모습은 흉내 내기 어렵구나.’
뭔가 사나이다움을 배우는 느낌이었다.
‘그래. 리더가 되려면 이런 모습도 있어야지.’
기수는 공연히 시간을 끄는 것이 그에게 더 괴로울 수 있다고 생각해서 더는 몸 상태에 대해 개의치 않기로 했다.
“저를 찾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우환의 입가에 힘겨운 미소가 걸렸다.
“역도를 처단하기 위해 혈매궁과 천마교가 힘을 합치자는 제안은 아직 유효한가?”
“물론입니다.”
“내가 이 꼴이 되었어도 말인가?”
“더욱 돕고 싶습니다.”
선우환의 미소가 짙어졌다.
“고마운 얘기군.”
그는 좌우로 시선을 돌려 혈천제와 암천제를 한 번씩 본 후 말했다.
“이 두 아이를 자네에게 맡겨도 되겠는가?”
“예? 무슨 말씀이신지…”
기수뿐만 아니라 혈천제와 암천제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선우환이 다시 말했다.
“상대는 나보다 고수였네. 그에게 내상을 입히기는 했지만, 거기까지가 내 한계였지. 지금 이 둘의 힘만으로는 그를 막을 수 없네. 자네가 이 두 아이를 부하로 삼아주게.”
기수는 선우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협지 보면 주인공한테 문파를 막 선물하기도 하던데… 지금 그런 상황인가?’
그러나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기수는 선우환이 지금 몹시 절실한 상태라는 걸 알았다.
남이 약할 때 내 이득을 취하는 것은 기수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제가 혈천제와 암천제를 도와 교주님의 원한을 갚고 천마교의 맥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부하는 당치도 않습니다.”
혈천제와 암천제는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 혈천제는 묘한 감정이 담긴 표정으로 기수를 봤다.
선우환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기쁘군.”
기수는 역시 그럴 줄 알았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선우환은 자기를 시험해본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진심도 있었을 것이다. 그와 싸운 사도가 한귀비 수준이라면 혈천제와 암천제가 상대하기 버거울 것이고, 혈천제가 패하면 천마교 전체가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천마교의 존속을 위해서는 지금 혈매궁의 도움이 절실한 것이다.
기수는 기꺼이 그 도움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걱정 마십시오. 교주님. 천마교의 맥은 앞으로도 면면히 이어질 것입니다. 제가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고맙군. 정말로…”
선우환은 눈을 감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장에선 정말 마음 든든한 얘기였다.
물론, 기수 입장에서도 천마교는 큰 힘이 될 수 있었다.
적이 단지 사도 세 명 뿐이라면 자기와 사매들만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겠지만, 청탑산 고수들을 생각하면 아군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혈천제와 암천제, 그리고 자영과 마령들이라면 충분한 역량이 있었다.
“이제 좀 눕고 싶군.”
혈천제와 암천제가 황급히 그를 부축하여 침상에 뉘어주었다.
기수는 슬그머니 다가가 그의 완맥을 잡았다.
혈천제와 암천제는 제지하지 않았고, 선우환도 잠시 흠칫했지만 그냥 내버려두었다.
기수는 내공을 끌어올려 선우환의 몸 상태를 확인해보았다.
“으음….”
기수는 신음을 토했다. 기경팔맥이 다 끊어져서 당장 죽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끔찍한 상황이었다.
기수는 심호흡을 한 후 내공을 더욱 끌어올렸다.
“제가 잠깐 운기를 해보겠습니다. 저항하지 마십시오.”
“쓸데없는 짓일세.”
그러나 기수는 선우환의 말을 무시하고 진기를 운용했다.
“으으….”
선우환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도도한 장강의 물줄기 같은 진기가 몸으로 흘러 들어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