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55
청탑산 고수 중 한 명이 살아난 것은 기수의 실수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실수한 척 보이려고 상당히 애를 쓴 결과였다.
나머지 15명의 죽음을 확인한 기수는 수혈을 찍은 적과 뇌파를 동조시켰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채로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처음엔 괜한 짓을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가 깨어나고, 당황하고, 의문을 품고, 안도하는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됐어! 역시 거리가 떨어져도 통하는 거였어.’
기수는 천천히 상대의 뒤를 따라갔다.
염정구심술의 부작용(?)을 처음 알았을 때는 놀라고 당황했지만, 지금은 마음 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예전에 아투사의 단검이 보석에 반응할 때, 한귀비 추적은 정확하고 확실했다.
거기에 비교하면 이 뇌파 동조방식은 거의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루에 한 번만 쓸 수 있다는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당사자가 길을 선택할 때의 심경이 실시간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그가 간 길을 고스란히 되짚을 수 있었다.
‘이거 진짜 괜찮은데? 그러고 보면 난 진짜 대단하단 말야. 무에서 유를 창조했으니…’
마치 바이아그라가 본래 심장 질환 치료를 목적으로 개발되었지만 발기 부전 치료제로 쓰이게 된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었다.
관건은 발상의 전환을 하는 안목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기수는 그런 면에서 자기는 진짜 천재라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기쁜 일이었다.
기수는 충분한 거리를 두고 목표를 따라갔다.
혈천제가 어떻게 되었는지, 천마교의 향후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당장은 청탑산 고수가 자기를 어디로 이끌어줄지가 더 중요했다.
놈들이 본격적으로 인원을 모아 활동을 시작한 만큼 가능한 모든 정보를 모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기수는 현재 사도 3명의 얼굴을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어디에서 찾아야할지는 여전히 안개 속이었다.
‘저놈이 그 셋 중 한 명에게로 갔으면 좋겠는데…’
기수는 그가 마을에 들러 음식을 시켜먹는 동안 옷을 사서 갈아입었다. 그리고 가까이 접근하는 상황이 발생해도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역용까지 했다.
다시 이어진 추격.
기수는 그가 보고할 상급자를 곧 만날 거라 기대했지만 예상과 달리 계속 서쪽으로 가기만 했다.
중간에 객잔에 들러 자기도 하면서 낙양을 지나더니 급기야는 장안까지 지나쳤다.
‘감숙성이면… 혹시 무림맹과 대치한 제갈세가로 가는 건가?’
그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갈세가의 은신처를 알아낸다면 사도 중 한 명을 만나는 것 이상의 성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기수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그를 따라갔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그의 종착지는 화양문 근처의 가게였다.
야채를 파는 시장 내 상점.
기수 입장에선 맥 빠지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라, 기수는 상점 근처의 객잔에 방을 얻고 멀지 않은 곳에서 놈의 동태를 감시했다.
염정구심술 추적법의 좋은 점은, 눈과 귀를 그에게서 멀리 떨어진 상태로도 완벽한 감시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주변과 접촉하는 감정의 상태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가 지금 어떤 사람과 만나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꼬박 하루 동안 감지한 바에 의하면, 그는 그 야채 가게의 주인이었다.
고향에 일이 있어서 다녀온다며 세 명의 점원에게 일을 맡겼고, 돌아와서 한 바탕 창고와 장부를 맞춰본다며 난리를 피웠다.
점원들은 청탑산과 관련이 없는 것 같았다.
아예 무공을 모르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다음날 아침. 사내는 직접 손수레를 끌고 화양문으로 들어갔다.
그 야채가게에서 식자재를 공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무림맹 근처에서 감시하고 있구나!’
기수는 그가 직접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무림맹 내부에도 청탑산 패거리의 첩자가 있을 거라 짐작했다.
그래서 무림맹에 입맹하러 온 떠돌이 무사 흉내를 내며 손수레의 뒤를 따라갔다.
손수레가 도착한 곳은 주방.
화양문에 사는 무림인이 많은 만큼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도 많았다.
손수레를 끌고 간 자는 야채를 안으로 날랐고, 누구와도 접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수는 그의 마음속에 약간은 긴장하는, 그리고 약간은 겁먹는 느낌이 생겨남을 감지했다. 상관을 만나려는 게 분명했다.
기수는 식당으로 들어가 소속 없는 무림인들에게 배식되는 쪽에 앉았다.
접선 장소를 직접 볼 수는 없지만 마음은 조급하지 않았다.
차분히 앉아 염정구심술에 조금 더 집중하는 것으로 대상의 현재 상태, 하는 얘기 등을 모두 감지할 수 있었다.
마치 패러사이트를 심어 놓은 퀸의 심정과도 같았다.
기수의 예측대로 그는 자기 상관을 만났다.
그러나 얘기를 나눈 것은 아니고, 밤에 만나자는 눈짓 신호만 교환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얘기를 나눌 수는 없을 것이었다.
기수는 한 가지에 집중했다.
바로 상관의 얼굴이었다.
원거리라서 그런지 처음엔 그 모습이 잘 떠오르지 않았지만 집중을 거듭하자 얼굴을 형상화시킬 수 있었다.
나이는 40대 초반.
옷차림으로 보아 무림문파 소속은 아니고 허드렛일을 하는 일꾼 차림이었다.
기수는 식당 안에 비슷한 차림의 사람들이 많음을 확인했다.
바로 빈 그릇을 치우고 탁자를 닦는, 객잔으로 치면 점소이 역할을 하는 자들이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무림문파의 제자는 어려서부터 입문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고, 요리를 직접 하는 숙수도 신분이 확실한 사람만 쓰니까 결국 화양문에 잠입하려면 일꾼 밖에는 방법이 없었을 것이었다.
기수는 음식을 천천히 먹으면서 상관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그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기수는 일하는 그의 모습을 잘 기억해두었다.
그리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그가 향한 곳은 거리의 대장간.
여러 무기들 중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유성추였다.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손으로 쥐는 느낌이 좋았다.
대장간 골목에서 던지고 받기를 해서 알맞은 무게를 고른 후 계산을 치른 기수는 야채가게 후문이 나 있는 골목으로 가서 담장에 기대어 섰다.
잠시 후 손수레가 나타났다.
수레 끄는 사내는 기수를 발견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현재 난주 시내에는 차고 넘칠 정로도 무림인이 많았다.
무림맹이 계속 밀리고 쫓기던 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우선 무림맹이 더 이상 밀리지 않을 뿐더러, 천마교와 수로맹이 떨어져나갔고, 제갈세가가 역적이라는 소문까지 퍼지고 있었다.
방관하던 무림인들 사이에서 지금쯤 무림맹 편에 서면 뭔가 떡고물이 떨어질 것 같다고 기대할 만 한 상황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기수 같은 차림새의 사내는 발에 채이는 돌멩이보다 흔히 볼 수 있는 게 현재의 난주 시내였다.
손수레가 기수 옆으로 지나갈 즈음 기수가 말했다.
“늦었네.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뭐, 뭐라고?”
“친구들 따라 가야지.”
퍽! 소리와 함께 사내의 얼굴이 뒤로 젖혀졌다.
기수의 소매에서 날아온 유성추에 제대로 맞은 것이다.
그는 그 와중에도 반격을 하려 했지만, 상대는 자기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듯 모든 공격을 정확하게 막아냈고, 반대로 유성추 공격은 모두 성공시켰다.
결국 그는 손수레 옆에 쓰러져 허무하게 숨을 거두고 말았다.
기수는 상대의 사망을 확인한 후 현장을 떠났다.
이제 무림맹 내의 적 첩자를 알아냈으니 길안내 해 준 녀석을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
그를 제거함으로써 천마교에서 있었던 일은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게 되었다.
기수는 객잔에 들러 새옷을 사 입고 또 다른 얼굴로 역용하여 아까의 화양문 내 식당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허드렛일로 바쁜 첩자에게 염정구심술을 시전했다.
시간이 10분 정도 걸리긴 했지만 완벽하게 새로운 동조가 이루어졌다.
강도로 따지면 상대를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때가 가장 심하고, 마음을 읽는 건 보통, 지금처럼 뇌파 연결만 해두는 것은 아주 미약했다.
그래서 첩자는 잠시 고개만 한 번 갸웃거렸을 뿐, 자기 몸에 일어난 변화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기수는 잠시 식당에 앉아 첩자와의 동조를 재차 확인해보았다.
밤에 만나러 가서 어떤 보고를 듣게 될지 궁금해 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후후… 가봤자 못 만날 거야.’
첩자는 궁금히 여길 것이고, 조직원이 죽었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안전에 위협을 느껴 이곳을 빠져나가거나, 명령을 받기 위해 윗선과의 접촉을 시도할 게 분명했다.
둘 중 어떤 선택을 하건 기수를 고위층으로 안내해줄 거라는 데는 변함이 없었다.
‘아! 진작 이 방법을 생각해냈더라면…’
가장 좋은 점은 가까이 있지 않아도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연결이 확실히 된 것을 확인한 기수는 장원 밖으로 나가 객잔을 잡았다.
첩자가 언제 움직일지 모르니까 언제든 자유롭게 떠날 수 있도록 본래 신분을 계속 감추기로 한 것이다.
객잔마다 무림인들이 가득해서 제일 비싸 보이는 곳을 찾아 들어갔다.
점소이가 자리를 안내하며 물었다.
“식사를 드릴까요? 다른 손님도 더 오시나요?”
“묵어갈까 하는데.. 목욕통 딸린 방 있나?”
“물론입니다. 하지만 요즘 방값이 좀 올랐는데…”
“돈은 걱정 마.”
“예! 알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헤헤헤…”
기수는 피식 웃었다.
자기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욕조부터 찾았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사매들을 소항산에 놔두고 천마교로 갔고, 거기서 또 바쁘게 추격해 오다보니 지금은 혼자였다.
물론 화양문 안에는 자기를 반겨줄 미녀들이 있지만, 지금은 첩자가 언제 움직일지 모르기 때문에 본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자기가 온 줄 알면 무림맹주부터 시작해서 번거로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었다.
기수는 점소이가 가져온 음식을 먹고 혼자 목욕통에 들어가서 물을 데운 후 오행류 상생순환을 시작했다.
역용과 염정구심술을 걸어둔 상태로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운기조식보다 좋았다.
1시간 정도 몸 상태를 끌어올린 기수는 밖으로 나와 물기를 말리고 옷을 입었다.
기수는 첩자가 언제 움직일지 모르기 때문에 대기 상태로 있어야 했다.
멍하니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했다.
상생순환도 시간 때우기 용으로 하려니 집중도가 떨어졌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딴생각이 났다.
‘자영과 마무리를 못하고 여기까지 와버렸네.’
밖으로 나갈 준비를 마쳤던 수억 마리가 갑자기 변경된 일정 때문에 나흘씩이나 대기 상태로 있게 되었으니 엄청 짜증날 것 같았다.
‘건강에 안 좋을지도 모르는데…’
기수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첩자가 움직여서 고민을 멈출 수 있었다.
기수는 객잔에 그대로 있었지만, 약속장소에 상대가 나타나지 않자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첩자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기수는 미소 지었다.
‘자. 이제 네 주인에게 나를 안내해.’
그러나 기수의 기대와 달리 그는 화양문으로 돌아갔다.
애써서 무림맹에 잠입했는데 그 신분을 잃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기수는 맥이 풀려 버렸다.
‘아!… 쓸데없이 조심성은 많아가지고…’
그들 입장에서야 신중하게 움직이는 게 좋겠지만, 기수는 기약 없는 잠복근무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멍하니 기다리는 건 질색인데…’
기수는 침상에 벌렁 드러누웠다.
비전의 추적술을 개발해낸 것까지는 좋은데, 상대가 움직이지 않으면 이쪽에서도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천마교로 돌아가 볼까?’
교주의 죽음 이후 어떻게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자영을 만나면 건강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었다. 추적해 올 때와 달리 자기 혼자서 경공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면 해뜨기 전에 도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부상서의 감시와 달리, 이 임무는 남에게 맡길 수 없었다.
자리를 비운 사이 놈이 움직인다면 은밀하게 움켜쥔 단서가 사라질 가능성이 컸다.
시험해보지는 않았지만 염정구심술이 난주에서 북경까지 이어질 것 같지도 않았다. 설령 이어진다고 해도 가까이에 있어야 상황에 따른 대처가 가능한 것이다.
기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까짓 잠복근무. 해주마.’
야채가게 부하의 죽음을 확인하고 나면 즉시 움직일지, 아니면 더욱 움츠러들지 알 수 없는 일. 두 경우에 모두 대응하려면 기다려야 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오감을 동원하여 사냥감을 추적하는 사냥꾼 모드를 경험해봤는데, 그때만큼 짜릿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겁먹은 첩자와의 인내심 대결에서 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결심하고 1시간 쯤 지나니까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시간이 생겼으니까 상생순환으로 연공이나 하자.’
그런데 그것도 이전처럼 집중력이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사매들과의 빡빡한 스케줄 중간 중간에 시간을 최대한 쪼개가며 연공을 했다면, 지금은 남아도는 시간을 때우려고 하는 거니까 아무래도 마음가짐이 달랐다.
기수는 억지로 연공을 지속했다.
집중력은 다소 떨어지더라도, 어쨌거나 연공을 하면 할수록 진원지기가 성숙해지는 건 마찬가지니까 괜히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 밝자 지루함을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웠다.
기수는 아침을 시켜 먹은 후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화양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주변을 살피다가 한 여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 잠시만 시간을 좀 내주시겠습니까?”
그러자 그녀는 기수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요?”
기수는 좀 더 잘 생긴 얼굴로 역용할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하지만 네 얼굴도 만만치 않은데…’
기수는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제가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여인은 한 번 더 기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팔짱까지 끼면서 말했다.
“얘기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