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56
기수는 무림맹 여인에게 말했다.
“아미파 거처에 가서 제자를 아무나 한 명만 불러다 주십시오.”
여인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고작 사람 붙잡아 놓고 하는 얘기가 다른 여자를 불러내 달라니.
“됐어요! 난 바쁜 일이 있어요.”
그녀가 돌아서자 기수는 그녀 앞쪽으로 가서 다시 말했다.
“아미파에 급히 전달해야 할 말이 있는데, 아시다시피 그쪽은 남자가 가까이 가지 못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발 제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나도 아미파에 아는 사람 없어요. 그런데 정말 그것 때문에 날 불러 세운 건가요?”
몹시 자존심이 상한 듯, 가시 돋친 목소리였다.
기수는 그녀가 뭔가 기대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 원 참… 남자가 말만 걸면 다 자기 좋아서 그런 줄 아는 건가?’
기수는 여자가 좀 덜 예쁘다고 해서 무시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여자가 예쁘건 아니건 분명히 한 사람의 인간이고, 그 인권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앞에 있는 여인도 인격적으로 대해주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여인으로 대해달라고 하면 문제가 좀 있다.
그건 이쪽 취향도 고려해줘야 할 거 아닌가.
‘야. 내가 아무리 궁해도 너하고는…’
기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은자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제가 그냥 해달라는 게 아닙니다. 이걸 드리겠습니다.”
여인의 눈빛이 달라졌다.
돈이 걸렸다면 얘기가 달라진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나 데리고 오면 되는 건가요?”
그러면서 슬그머니 은자로 손을 뻗었다.
기수는 손을 움켜쥐고 피하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아미파 제자면 됩니다.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말씀해주십시오.”
“기다리세요.”
여인은 잰 걸음으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기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 모습이었다면 아미파 거처건, 보타문 거처건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떠돌이 무림인 신분으로는 그녀들의 숙소는 물론, 밥 먹는 식당 근처로도 접근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여자에게 부탁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가 아미파 제자를 찾는 이유는, 어젯밤 따분한 시간을 보내면서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능소화와 아직 하지 못한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자영과 마무리하지 못한 일을 능소화한테 끝내면 얼추 그림이 될 것 같았다.
사실, 오랜만에 손으로 해결해볼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천하의 양기수가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중원 여인들에게 모독이 될 것 같아서 참았다.
잠시 후.
여인이 아미파 제자 한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기수는 그녀에게 약속한 은자를 건네주었고, 그녀는 콧바람 소리만 남기고 가버렸다.
“당신인가요? 우리 아미파에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한 게…”
따라온 아미파 제자는 나이가 어린 것으로 보아 서열도 낮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예. 사실은 능소저에게 전할 말이 있습니다.”
“사저에게요? 무슨 일이죠?”
“제가 아니라 어떤 여인이 벽소루라는 객잔 2층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벽소루요? 거기가 어디죠? 그리고 무슨 일로…”
“저는 얘기를 전달하기만 했을 뿐, 다른 건 모릅니다. 능소저에게 그렇게만 말하면 다 알 거라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전하라는 여인은 누구죠?”
“능소저와 아주 친한 사이라고 하더군요. 어쨌든 몹시 중요한 일이라니까 꼭 본인에게 전해주십시오. 그럼 저는 이만…”
기수는 꼬치꼬치 캐묻는 아미파 제자를 남겨두고 화양문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갈아입을 옷을 몇 벌 더 쇼핑한 후 벽소루로 가서 욕실 딸린 방을 잡았다.
벽소루는 바로 능소화와 하룻밤을 보냈던 곳이었다.
대충 그 정도 얘기하면 그녀가 알아차리고 찾아올 거라 생각했다.
잠복근무는 거기서 해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기수는 점소이를 불러, 2층으로 올라와 두리번거리는 미녀가 있으면 자기 방으로 안내해달라고 부탁하고 돈을 집어주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본래 얼굴로 돌아와 염정구심술 한 번 점검하고 10분쯤 지났을까?
급하게 계단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빠르기도 해라. 후후…’
과연 점소이의 안내를 받아 문을 연 사람은 능소화였다.
“기, 기소협!”
“오랜만이야. 문 닫아.”
능소화는 문을 잠근 후 기수에게 와락 달려들어 안겼다.
“보고 싶었어요!”
“나도.”
기수는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고 한동안 밀착감과 체취를 만끽했다.
그리고 입맞춤을 시도했다.
그런데 능소화가 고개를 돌려 피했다.
“자, 잠시만요….”
“왜 그래?”
전갈을 듣자마자 총알 같이 달려왔으면서 갑자기 빼는 건 뭔가 맞지 않았다.
“어째서 기소협이 돌아오셨단 소식을 제가 못 들었던 거죠?”
“응. 무림맹엔 알리지 않았거든. 좀 특수한 임무를 수행중이라…”
“특수임무요?”
“역도들의 뒤를 밟는 중이야. 놈이 무림맹에 숨어들었기 때문에 내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감시하기 위해서 안엔 들어가지 않고 있어.”
“아! 그랬군요.”
기수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시도했다.
상당히 고픈 상황이다 보니 좀 애절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능소화는 기수를 밀어내며 갑자기 굳은 표정을 지었다.
“물어볼 게 있어요.”
기수는 그녀의 표정이나 말투가 갑자기 차가워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오랜만의 만남을 기뻐하던 표정이 싹 사라졌다.
기수는 그녀 허리에 감았단 팔을 풀어주었다.
“무슨 일인데?”
“전에, 우리가 여기서 만났을 때 제가 물었죠. 백서린, 양여옥, 호운혜, 당운영과 사랑을 속삭이는 사이 아니냐고…”
“응. 물은 적 있지.”
기수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그때 뭐라고 대답하셨죠?”
“그런 일 없다고.”
능소화가 눈을 매섭게 뜨며 노려봤다.
“그런데 제가 그녀들을 만나봤더니 사실과 다르던걸요?”
“무슨 소리야? 난 거짓말 한 적 없어.”
사랑을 속삭일 시간이 어디 있나? 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내 예감은 절대 틀리지 않아요. 그녀들 모두 기소협 얘기만 나오면 눈이 반짝이고, 호흡이 가빠지고, 뺨이 발그레하게 상기되었어요. 진실을 얘기해주세요.”
“관찰력이 뛰어나군.”
“그녀들과 어떤 사이죠?”
기수는 입맛을 다셨다.
어렵게 능소화를 불러냈는데, 이런 난관이 매복하고 있을 줄이야…
“좋아. 네게 거짓말은 하지 않을게. 그녀들과 나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야.”
능소화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럴 줄 알았다고! 그런데 왜 나한테 거짓말 한 거죠?”
“워우! 워우! 진정해. 난 거짓말하지 않았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나와 그녀들의 사랑은 속삭이는 게 아냐. 그냥 행동으로 옮기는 거지. 우리 사이엔 말이 필요 없거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하핫! 애당초 네 질문이 잘못되었다고나 할까…”
“이 색마! 그렇다면 혈매궁 여인들과도 혹시…”
기수는 이왕 밝힌 거 더 감추지 않았다.
“그녀들과도 사랑하는 사이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능소화는 기수의 뻔뻔함에 어이가 없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그런데 지난번엔 왜 거짓말했어요?”
“무슨 거짓말?”
“내가 어떤 사이냐고 물었을 때…”
“다른 문파들과 똑같이 사부와 제자 사이는 아버지와 자식 같은 관계라고 말했지.”
“맞아요! 그런데 사랑하는 사이라는 게 말이 되요?”
“그녀들은 제자가 아니라 사매거든.”
“으아악! 이 나쁜 놈!”
능소화는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기수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기수는 살짝 피하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노, 놓지 못해?”
능소화는 다른 손과 발로 마구 기수를 때렸지만 정타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비로소 기수가 무림에서 적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고수란 사실을 떠올렸다.
손짓 발짓이 수그러들자 기수는 그녀를 놔주었다.
“이제 그만 가 봐.”
“뭐, 뭐라고요?”
“거짓말쟁이 소리 들으면서 만나고 싶지 않아.”
물론 지금 온몸은 스위치가 켜져서 난리였다.
능소화의 얼굴은 물론, 그 옷 속에 숨겨진 몸에 대해서도 이미 지난번에 검증일 마쳤기 때문에 간절한 바람이 있는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싫다는 사람 붙잡는 건 시간낭비였다.
능소화 말고도 사하나 양여옥, 당운영, 백서린 등 불러낼 여자는 얼마든지 있었다. 정 없으면 호운혜라도 불러내면 되는 것이다.
기수가 단호하게 나오자 능소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손바닥 자국이 남을 정도로 뺨을 한 대 시원하게 때려주고 돌아서서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의 무공으로는 그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 그리고 천하 무림이 존경해 마지않은 절대고수를 그냥 떠나보내기도 싫었다.
“당신. 나를 만날 때 이미 그녀들과 정인 관계였나요?”
“응.”
짧고 사무적인 대답이었다.
“그녀들끼리도 그걸 아나요?”
“당연하지. 난 늘 솔직하거든. 아무 것도 숨기지 않아.”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기소협을 계속 만나는 건가요?”
“네가 관찰했으니까 알 거 아냐. 그녀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능소화는 짜증 섞인 어조로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내가 어떤 상황에서건 솔직하게 대하니까…”
능소화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녀가 나가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가자 기수는 그녀 마음이 돌아설 가능성을 봤다.
“그녀들 중 누구도 나와 자고 싶다고 먼저 고백한 사람은 없었어.”
능소화는 발끈했다.
“날 비난하는 건가요?”
“아니. 난 그 점이 좋았다고 말하는 거야. 내가 원래 솔직한 사람이기 때문에 여자도 내숭떨지 않고 솔직한 게 좋거든. 그래서 네가 참 마음에 들었어.”
“지금은요?”
“지금은 네가 하기에 달렸지. 네 본능에 충실해서 솔직하게 날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박차고 나가서 후회하거나…”
능소화는 잠시 기수를 노려보다가 물었다.
“그녀들보다 내가 더 좋다는 뜻이죠?”
기수는 미소 지었다.
그렇게까지 명분을 만들고 싶다면야, 듣고 싶은 말을 해주면 그만인 것이다.
“다른 누구보다 네가 좋았어. 그래서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도 너만 불러낸 거 아냐. 꼭 다시 만나고 싶어서.”
물론 진짜 이유는 빼먹은 루틴 때문이지만…
능소화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다른 애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우월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책 없는 바람둥이에게 과연 기회를 줘야 할지는 결정내리기 어려웠다.
‘이 남자는 당금 무림 최고의 영웅이다. 단지 무공만 고강한 게 아니라 역모를 파헤치고 있어. 그 말은 단지 차기 무림맹주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지.’
게다가 젊고 잘 생기기까지 했으니 여자라면 당연히 열정을 품을 대상이었다.
‘하지만 백서린이나 양여옥 등을 주렁주렁 첩으로 거둬들이면 어쩌지?’
하는 꼴로 봐서는 첩의 수가 네다섯 명까지 늘어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실부인으로서 참아내기 어려운 일일 것이었다.
능소화는 저울 양쪽에 ‘최고의 신랑감’과 ‘바람기 및 자신의 자존심’을 각각 올려놓고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 면밀히 관찰했다.
그러나 평형을 유지할 뿐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았다.
“소화…”
그때 기수가 다가와 허리를 끌어안았다.
“저리 가요.”
그러나 미는 힘은 세지 않았다.
기수가 팔에 힘을 주어 잡아당기면서 하체를 아랫배에 비비는 순간, 능소화의 저울추는 한쪽으로 확! 돌아서버렸다.
신랑감이니, 바람기니, 자존심이니 하는 것들이 전부 다 싹 날아가 버렸다.
오로지 현재 자신의 배에 닿아 있는 뜨겁고 단단한 살덩이에 모든 정신이 쏠렸다.
동시에 그날 밤 이 객잔에서 있었던 일들이 전부 떠올랐다.
“아아….”
그녀의 입에선 달뜬 신음이 새어나오자 기수가 천천히 어깨를 감싸 안으며 부드럽게 입맞춤을 시작했다.
능소화는 속으로 마구 소리를 질렀다.
‘정신 차려! 이 남자는 색마야! 네가 왜 그의 수많은 여자들 중 하나가 되어야 하지? 당장 그를 밀쳐내고 문을 박차고 나가!’
그러나 그 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다른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남자하고는 이미 했잖아. 한 번 더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나?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면 서운하잖아. 결정은 나중에 내려도 되니까 일단 즐기자.’
두 번째 생각이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이 바뀌는 데는 과하지 않게 조금씩 자극해 오는 기수의 능숙한 입맞춤 솜씨가 큰 역할을 했다.
‘그래 기소협은 나의 첫 남자야. 분명히 나를 아끼고 존중해줄 거야.’
그렇게 생각한 능소화가 입을 떼고 말했다.
“기소협. 제가 제일 좋다는 말 진짜 믿어도 되죠?”
기수는 자기 가슴이 아닌 그녀 가슴에 손을 얹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그런데 난 입이 아닌 행동으로 사랑한다고 했던 말 기억해?”
“예.”
“그럼 이제부터 잡담은 중지. 입은 할 일이 따로 있어.”
“그, 그게 뭐죠?”
“천천히 가르쳐줄게.”
기수는 강기막을 펼치고 능소화를 번쩍 안아 침상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