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67
기수는 한참을 기다렸다.
그러나 신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가셨나요?]
역시 대답이 없었다.
“아 놔…. 가면 간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매너하고는…”
그 때, 곧바로 신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직 안 갔다.]
[하핫!… 그, 그러셨군요.]
식은땀이 흘렀다.
[네 요구사항은 내가 어떻게든 해결해보겠다.]
[정말입니까?]
기수는 뛸 듯이 기뻤다.
[네가 임무를 완수한다는 전제하에 나도 최선을 다해 방법을 찾아보겠다.]
[감사합니다! 하하하!…]
[마음 놓지 마라. 이제까지의 10명보다 앞으로의 2명이 더 어려울 수도 있으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하!…]
[다음에 다시 보도록 하지.]
[살펴 가십시오!]
기수는 보이지도 않는 신을 향해 허리를 90도 숙여 인사했다.
그가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으니까 어떻게든 좋은 쪽으로 결론 날 가능성이 컸다.
명색이 시간과 공간을 주도하는 신 아닌가.
기수는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심호흡을 했다.
오랜 고민. 엄마가 좋아? 미녀가 좋아?의 선택에서 해방된 느낌.
기분이 정말로 상쾌했다.
‘자! 이제 청소하러 가볼까?’
기수는 연안부 도수산을 향해 경공을 시전했다.
남은 사도는 두 명.
그들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게 하려면 청탑산 고수들을 최대한 많이 없애는 게 중요했다.
사도와 싸울 때 옆에 그들이 있고 없고는 큰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자꾸 그들의 계획을 방해해야 전략적으로 우위에 설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은 오랜 시간 철저한 준비를 해왔기 때문에 계속 변수를 만들지 않으면 저쪽 페이스에 끌려갈 공산이 큰 것이다.
‘햐아! 내가 전략적 사고까지 하다니… 많이 컸네…’
황궁비고에서 병법서를 독서할 때는 그냥 종이 위에 적힌 글자들을 읽는데 그쳤지만, 강호행을 하면서 실전을 경험하니까 현실적으로 하나씩 와닿는 느낌이었다.
산 교육을 받는다고나 할까.
도수산 근처에 도착한 기수는 일단 적의 기척을 살폈다.
‘150? 160?… 흠…. 만만치는 않네…’
그들에게 에워싸인다면 아무리 한귀비를 때려눕힌 자신이라고 해도 쉽게 빠져나오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러나 기수는 이미 태선사 부근의 지형을 숙지한 상태.
불리한 상황에 처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적의 배치 형태를 감지한 후 가장 인원이 적은 방향으로부터 접근해 들어갔다.
퓨퓨퓨퓨퓻!…..
“크아악!….”
“저, 적이다!”
“경보를 울려라!”
파천강기로 순식간에 10여명을 쓰러트린 기수는 종소리가 울리자 곧바로 후퇴하여 기도를 감추고 오행 상생순환으로 소모한 진기를 보충했다.
적은 산 전체가 시끄럽도록 고함을 지르고, 신호 호각을 불면서 침입자를 찾았지만 기수가 일부러 기도를 드러내지 않는 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충분히 기식을 고른 기수는 천천히 이동하며 적의 경계태세를 확인하다가 다른 각도에서 한 번 더 동일한 방식으로 습격을 가했다.
비명과 함께 다시 1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뒤늦게 몰려온 자들은 나름 대비책을 강구했다.
“모두 은혈대법을 끌어올려라!”
“흩어지지 말고 사찰 경내로 집결하라!”
기수는 그런 그들과 서둘러 싸울 이유가 없었다.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 태선사를 내려다보면서 휴식을 취했다.
‘후후… 너희들 정도의 숫자면 침입자 한 명쯤 문제없이 포위공격 할 수 있을 것 같지? 꿈 깨라. 너희들은 지금 나한테 포위된 거다. 후후후…’
아직도 130여 명이 남은 청탑산 무리.
그러나 기수는 그들 모두가 자기 손바닥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장무검은 애당초 명령계통이 다르다고 해도, 사도인 한귀비가 죽었으니까 이들은 현재 명령 대기 상태. 점조직의 특성 상 직속상관 라인의 허락 없이 제 멋대로 현재의 대열을 이탈할 수가 없는 것이다.
차라리 한귀비가 그들 보는 앞에서 죽었다면 차순위 명령권자에게 권리가 넘어갔겠지만, 현재의 적은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다.
기수가 자근자근 밟아 들어가도 공포에 질려 떨기만 할 뿐, 임의로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다.
느긋한 휴식을 마친 기수는 천천히 태선사 주변을 돌며 정찰했다.
‘이게 130명이 은혈대법을 끌어올린 기도인가? 무시무시하군. 후후…. 하지만 은혈대법은 오래 지속할수록 회복기간도 길어지는 단점이 있단 말야…’
시간이 갈수록 조급해지는 건 상대방이다.
‘경고를 좀 해줄까?’
기수는 담 밖에서 사찰 경내에 매달려 있는 범종을 향해 파천강기 한 가닥을 날렸다.
뎅!~ 하는 범종소리가 산속의 적막을 깨며 커다랗게 울려 퍼지자 청탑산 무리가 우르르…. 범종각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곳엔 이미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잠시 뒤.
범종각과 반대 방향에 있는 대웅전 지붕 일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적은 두 명이다! 부대를 반으로 나누어라!”
기수는 피식 웃고 담 밖을 돌면서 강력한 살기를 뿜어냈다.
“저 쪽이다!”
기도를 감지한 자들이 담을 넘어 달려오자, 기수는 선풍비로 후퇴하면서 간격이 좁혀질 때마다 파천강기로 맨 앞에 선 자의 무릎을 노렸다.
“크윽!… 으으…. 놈을 잡아라!”
청탑산 고수들은 전쟁 영화에서 ‘소대장님!’, ‘난 괜찮으니까 먼저 가!’ 하는 것처럼 앞 사람이 쓰러지면 뒷사람이 교대하면서 계속 따라왔다.
은형대법 활성화 상태라 파천강기에 관통 당하지는 않았지만 경공은 커녕 걷기도 힘들 정도의 부상을 입은 것이다.
‘멍청한 놈들. 한귀비는 눈치라도 빨랐는데…’
기수는 상대가 서너 명 정도 남을 때까지 유인하다가 한 순간 돌아서서 반격을 가했다. 은혈대법 상태라고 해도 기수의 화류 태포련에 휘감기면 방법이 없었다.
비명과 신음이 난무하는 상황을 파천강기로 마무리 한 후 온 길을 되짚어 가면서 다리를 다쳐 비틀거리는 자들을 하나씩 저승으로 보내줬다.
적의 숫자는 많았지만 한귀비와의 대결에 비교하면 아주 수월한 작업이었다.
태선사 근처로 다가가자 다른 자들이 몰려왔다.
기수는 미소 지었다.
선풍비가 있는 한, 그는 항상 자기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결국 그의 예상대로 160여명의 청탑산 패거리들은 기수 한 명에게 포위되어서 계속 숫자가 줄어들었고, 사찰 주변 숲엔 시체가 넘쳐나게 되었다.
그들이 엄격한 규율에 따르는 게 기수 입장에선 더욱 잘 된 일이었다.
공포를 느끼면서도 도망치지 않고 자기네들끼리 힘을 모아 어떻게든 해보려는 노력이 피해를 계속 누적시켰다.
결국 그들이 정신을 차린 것은 3시간이나 더 시달린 뒤였다.
사찰 경내에까지 시체가 쌓인 상황.
기수는 빠른 풋워크로 상대를 농락하던 무하마드 알리처럼 나비처럼 날아다니며 벌처럼 톡! 톡! 쏴서 적의 숫자를 계속 줄였고, 그때까지 살아남은 40여명은 침입자가 자기들 수준에서 어찌해 볼 상대가 아님을 깨달았다.
“퇴각한다! 각자 자기 근거지로 돌아가 명령을 기다려라!”
중간보스쯤으로 보이는 자의 자의적인 명령이 떨어지자 두려움에 떨던 청탑산 고수들은 미친 듯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런, 이런….”
기수는 그들의 뒤를 따르며 손에 닿는 대로 마무리를 지어 주었다.
그러나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도망쳤기 때문에 모두를 잡을 수는 없었다.
기수는 중간보스로 보이는 자를 쫓았다.
나머지는 살아서 도망간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무려 4시간 가까이 은혈대법을 운용했기 때문에 그들이 다시 대법을 쓸 수 있는 상태가 되려면 아주 긴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기수가 따라붙자 중간보스는 계속 뒤를 힐끔거리며 사력을 다해 경공을 펼쳤다.
간격은 좀처럼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10분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부터 조금씩 거리가 멀어지는가 싶더니 마침내 기수는 완전히 뒤쳐지게 되었다.
그것은 물론 상대에게 스스로 도망쳤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기수가 페이스를 조절한 것이었다.
10분 동안 뇌파 동조를 마쳤기 때문이다.
기수는 구보 정도의 속도로 천천히 따라가며 오행류 상생순환을 반복했다.
치고 빠지는 전술이 성공적이었다고 해도, 중장거리에서 저격하는 식으로 파천강기를 집중해서 썼기 때문에 내력소모를 보충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꼬박 하루를 따라간 기수는 태원에 도착했다.
서너 시간쯤 뒤처져 성안으로 들어간 기수는 일단 시장에 들러 옷을 새로 사 입고 나오는 길에 대장간에서 유성추도 하나 샀다.
그리고 시장 모퉁이를 돌면서 얼굴을 바꾸고 중간보스가 들어간 동네 근처의 객잔에 들어가 음식을 시켜 먹고 차도 마셨다.
30분 정도 지난 뒤 확인해 보니 도망친 자는 푸줏간의 주인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자기 가게를 둘러보고, 점원들에게 잔소리도 하면서 일상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기수는 더 가까운 객잔으로 가서 점소이에게 물었다.
“욕조 딸린 방 있나?”
“죄송합니다. 저희 집엔 목욕통이 없습니다.”
아쉬웠지만 나중에 옮길 생각을 하고 일단 방을 잡아 운기조식을 하면서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중간보스의 머리속은 이번 태선사 사건에 대한 생각으로 하루 종일 꽉 차 있었다.
푸줏간 문을 닫고 점원들이 잠자리에 든 후, 그는 자기 방에서 이번 일을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직선거리로 50여미터 쯤 떨어져 그와 뇌파가 동조된 기수는 답답했다.
‘뭘 고민해? 있는 그대로 쓰면 되지.’
그러나 푸줏간 주인은 나름 심각했다. 모두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자신의 결정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결국 고민은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기수는 그의 망설임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저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조직 내에서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자를 골랐기 때문에 지난번 난주에서 기다리던 때보다는 나은 성과로 이어질 거라는 게 그나마 기대되는 바였다.
‘아! 따분한 잠복근무여…’
기수는 잠복근무의 따분함을 날려 보낼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난주와 너무 멀었다.
차라리 소항산이 훨씬 가까웠다.
‘사매들한테 연락할 방법이 없을까?’
하루 정도 자리를 비워도 된다면 잽싸게 소항산까지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자기가 없는 사이에 적에게 집결 명령이라도 내린다면 안 되기 때문에 태원을 떠나는 건 제외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를 떠나지 않고 사매를 불러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다가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대상은 사매들이 아니지만 이곳에 머물면서도 외부와 연락할 방법이 있었다.
천마교의 연락용 기호를 객잔에 그리면 되는 것이다.
천마교 교주를 만났던 죽림은 소항산보다도 더 가까웠다.
자영 등이 아직 죽림에 머물고 있다면, 연락을 받아 이곳으로 온다면 잠복근무를 보람차게 보낼 수 있었다.
기수는 즉시 내려가서 객잔 입구와 자기가 머무는 방 문설주에 기호를 그렸다.
그리고 마교도가 올 때까지 오행 상생순환 수련을 시작했다.
예전 난주 때보다는 훨신 집중이 잘 되는 편이었다.
그것은 아무래도 장무검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강적의 존재는 훌륭한 동기가 되는 것이다.
‘주군이란 자는 장무검보다 강하겠지?’
아무리 약속을 중시한다고 해도, 상대방이 자기보다 하수라면 만만하게 봤을 것이다.
그러나 장무검은 주군이란 자를 경계하는 게 분명했다.
남의 손을 빌어 그의 수족을 쳐낸 것만 봐도 짐작이 가능했다.
‘낭비할 시간이 없어!’
기수는 여자를 불러들일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폐관수련 하는 기분으로 수행에 정진하자!’
그는 기호를 지워버리려고 아래로 내려갔다.
객잔 입구의 석필자국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는데 한 사람이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왕대인 아니십니까? 반갑습니다. 하하…”
40대 중반의 생전 처음 보는 남자였다.
그러나 짐작 가는 게 있었다. 천마교 교도임이 분명했다.
‘아! 딱 한 발 늦어버렸네… 난 결국 여자를 만나야 하는 팔잔가?’
기수는 그를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가서 자리를 권해 앉힌 후 역용을 풀었다.
자기 신분을 밝히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입을 열기도 전에 마교도가 먼저 말했다.
“아! 이제 보니 혈매궁 궁주님이셨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가 만난 적이 있던가요?”
사내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대 교주님이 시해당하셨을 때, 저도 죽림에서 함께 싸웠습니다.”
“아! 그랬군요.”
슬쩍 상대의 기도를 확인해 보니 마령급은 되는 것 같았다.
기수는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교주님의 장례는 어찌 되었습니까?”
“교도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성대하게 잘 치러졌습니다. 궁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기수가 머리를 찾아와 주어서 입관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는 의미였다.
“그랬군요. 그럼 지금 교주는….”
“혈천제님이 맡게 되었습니다.”
“아!…. 그녀가…”
여인이 교주, 혹은 장문인,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였다.
아미파나 보타문처럼 애당초 여인들로만 이루어진 문파가 아니라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혈천제가 선택된 것은 그만큼 그녀의 무공이 인정받고 있다는 의미였다.
문득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다른 뜻은 없고 힘내라고, 열심히 하라고 어깨를 다독여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