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88
기수는 표정을 지우고 능소화에게 물었다.
“나와 혼인할 생각이 없다고?”
아무래도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그래. 난 사부님이 정해주는 남자에게 시집 갈 거야.”
속으로는 ‘그게 너야!’라고 절규했지만, 겉으로는 새침한 표정을 유지했다.
기수 입장에선 왠지 모르게 섭섭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갈 데까지 간 사이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능소화는 냉소를 지었다.
“흥! 같이 자기만 하면 내가 무조건 네 여자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 그런 건 아니지만…”
“여자도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 앞길을 결정할 줄 알아. 무조건 남자에게 종속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그, 그런가?”
확실히 옛날이라고 해서 다 유교 윤리관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과 명나라는 사람들 사고방식이 다른 것이다.
기수는 살짝 오기가 생겼다.
‘네가 아무리 페미니즘의 선구자처럼 말해도 몸은 절대로 나를 떠날 수 없을 거다.’
그걸 당장 확인시켜주고 싶었다.
기수의 눈빛에 열기가 드러나자 능소화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금 무림에서 혈매궁주보다 더 나은 신랑감을 찾기는 불가능했다.
더구나 자신은 이미 그와 몸을 섞은 사이.
혼인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을 때는 그가 돌아설까봐 전전긍긍, 좌불안석이 되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기수는 밀어낼수록 더욱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출정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기수의 그 한 마디에 사하와 능소화의 몸에 불이 확 당겨졌다.
그러나 천마교 쪽에서 두 명의 소방관이 출동했다.
소혼랑과 광혼랑이었다.
“궁주님. 지금 우리와 함께 가셔야 합니다.”
사하와 능소화는 그녀들의 출현에 당황했다.
“아직 우리 얘기 안 끝났어!”
그러나 광혼랑이 인상을 썼다.
“그건 갔다 와서 해. 이년들아.”
“뭐, 뭐라고? 이년?”
소혼랑도 인상을 쓰며 나섰다.
“그래. 이년들아. 너희 맹주가 궁주님은 우리와 함께 가라고 했거든. 따지고 싶으면 그 사람한테 가서 얘기해.”
그리고는 기수의 양 팔을 각각 하나씩 끼고 자기들 가슴을 꾸욱~ 눌러 문지르면서 그를 연행해 가버렸다.
사하와 능소화는 분하고 어이가 없었지만 출정 직전에 천마교와 싸움을 할 수는 없는 일이라 결국 참아야 했다.
기수도 능소화에게 자신의 능력 재확인시킬 기회를 뒤로 미루었다.
소혼랑은 병력 집결지로 가면서 또 쓸데없는 질문을 했다.
“쟤들이 나보다 잘 빨아?”
“너.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랬지!”
옆에서 광혼랑이 자신감 있는 어조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아미파와 보타산 출신들이 뭘 알겠어?”
“하긴…”
자기네들끼리 정답을 찾아내고 있었다.
혈천제는 출정을 서두르는 중이었다.
무림맹과 경쟁한다는 사실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한 모습이었다.
무림맹이 뽑은 곳은 위주, 천마교가 뽑은 곳은 양현으로, 양현까지의 거리가 사오리 정도 더 멀기는 했다.
총 인원은 250명으로, 좌호법 광혼랑과 우호법 소혼랑, 그리고 암천제와 자영이 각각 15명의 마령과 30명의 교도로 45명씩을 지휘하고, 교주 혈천제와 기수가 본진으로 마령 30명과 교도 40명을 지휘하기로 했다.
나머지 마령과 교도들은 허창에 남았다.
250명은 무림 문파끼리의 싸움이라면 상당히 많은 인원이지만, 상대가 군대라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그러나 정면 대결이 아닌 적을 교란시키려는 것이기 때문에 그 목적에는 적당한 인원이라고 할 수 있었다.
허창의 성문을 빠져나간 천마교 병력은 그 지역 출신 마령과 교도를 앞세워서 양현까지 곧장 달려갔다.
어두운 밤.
관도는 텅 비어 있었다.
안 그래도 통행이 뜸한 시간인데다 전운까지 감돌고 있으니 사람들이 집밖으로 나서지를 않는 것이었다.
기수는 혈천제와 함께 선두에 위치해 달렸다.
원래 척후병, 선발대, 정찰대 역할은 부하들에게 시키는 게 맞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특별했다. 청탑산 패거리가 매복하고 있다가 이쪽의 움직임을 먼저 발견한다면 기습의 효과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가장 기감이 뛰어나고 경공도 빠른 두 사람이 그 역할을 맡은 것이다.
허창에서 출발한 지 30분 만에, 기수는 한 무리의 적을 발견했다.
혈천제에게 수신호를 하자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기는 적에 대한 어떠한 기척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수의 신호에 따라 후속 부대의 움직임을 정지시킨 후 기수와 혈천제는 각각 좌우로 우회하여 매복한 적 진영을 덮쳤다.
“웨, 웬 놈이냐!”
나뭇가지 사이로 몸을 숨기고 있던 3인 1조의 정찰팀은 확실히 청탑산 고수들이었다. 기수가 접근하는 기척을 감지하자마자 그들은 민첩하게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러나 미리 알고 접근한 기수의 공격을 막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두 명이 제압당하는 동안 한 명이 품 안에 손을 넣어 바통 사이즈의 긴 대나무 통을 꺼냈지만, 그는 어느새 그림자처럼 나타난 혈천제의 일 장에 등을 맞고 즉사하고 말았다.
기수는 공중에 떠서 빙그르르 도는 죽통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제압한 두 명의 마혈을 눌러 꼼짝 못하게 한 후 둘 중 무공이 좀 더 센 것으로 보이는 놈에게 염정구심술을 시전했다.
“너희들의 임무는 뭐지?”
포로가 대답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은 후 계속 질문하는 기수 특유의 심문이 시작되었고, 혈천제는 옆에서 의아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연락 방법은?”
“모두 몇 명이나 되지?”
“황도독도 이곳에 와 있나?”
“너희들 말고 다른 자들은 어디에 배치되어 있느냐?”
질문이 끝난 뒤 기수가 혈천제에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놈들은 관군의 야습에 대비하고 있었어. 병력 이동이 발견되면 이 죽통으로 불꽃을 쏘아 올리는 거지. 청탑산 패거리는 400명 정도가 세 군데 분산 배치되어 있는 것 같아. 그리고 황호의 소재는 이들도 몰라. 세 곳의 점령지마다 모두 세 도독의 깃발들이 세워져 있는 모양이야.”
혈천제가 포로와 기수를 번갈아 본 후 물었다.
“그건 어떻게 알아낸 거야? 너. 혹시… 내 마음도 읽을 수 있어?”
“고수한테는 잘 안 돼. 위험하기도 하고.”
“그래? 아쉽네…”
“뭐가?”
“내 마음을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네가 알면 좋을 것 같아서…”
“하핫!… 알지. 다 알아.”
갑자기 소녀 감성을 드러내는 그녀가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혈천제가 다시 교주의 얼굴로 돌아와서 말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목표로 삼아야 하는 거지?”
“반군 쪽이 수월하고 전과도 많이 올릴 수 있겠지만, 그들을 공격하면 결국 청탑산 놈들이 달려들어서 우리를 협공하거나 퇴로를 차단할 거야.”
혈천제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400명이 셋으로 나뉘어 있으면 적어도 130명은 상대해야 한다는 거네…”
그들의 힘은 익히 알고 있었다.
이쪽 인원이 2배 가까이 많지만 상당한 피해가 예상되었다.
혈천제가 결심한 듯 말했다.
“청탑산 놈들을 먼저 치자! 어차피 싸워야 할 거라면 그들에게 기습의 효과를 노리는 편이 나을 거야.”
기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죽통을 보고 뭔가 작전이 생각난 것이다.
“교도 중 한 명을 여기에 남기자.”
“어쩌려고?”
기수는 혈천제에게 자기 생각을 얘기해주었다.
그리고 천마교 기동대는 다시 양현을 향해 달렸다.
기수와 혈천제가 계속해서 길을 열었다.
양현 가까이 당도하자 기수는 병력을 야산에 머무르게 했다.
그리고 혈천제와 단 둘이 토성을 넘어 마을로 들어갔다.
그들의 목적은 은밀하게 돌아다니면서 적의 배치 상황을 살피는 것.
다른 교도들은 발각될 수도 있기 때문에 멀리 머물게 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무인지경으로 양현 내부를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기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군영에 접근해 보았다.
그러나 황호의 기도는 감지되지 않았다.
황호뿐만 아니라 다른 도독도 없는 것 같았다.
대장 막사엔 깃발만 잔뜩 서있을 뿐이고, 그 안에 있는 사람의 기도는 평범한 무관 수준이었다.
‘어디 다른 곳에 뭉쳐 있는 모양이군.’
아쉬웠지만, 한편으론 오늘의 미션은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수는 청탑산 패거리의 숙소를 찾아내고 그들의 수가 140명 정도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혈천제와 함께 조심스럽게 빠져나온 기수는 본대가 숨어 있는 야산으로 돌아가 신호를 기다렸다.
그로부터 30분 정도가 더 지난 후.
양현이 소란스러워졌다.
먼저 청탑산 고수들이 움직였고, 그 뒤로 반군 기병들이 진문을 나섰다.
척후병으로부터 불꽃 신호가 올라왔기 때문이다.
반군은 그게 기수가 남겨 놓은 천마교 제자가 한 일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기수와 혈천제는 병력이 양현을 떠난 뒤에도 한참을 더 기다렸다.
그리고 그들이 충분히 멀어졌다고 판단되자 병력을 둘로 나누어 양현을 공격했다.
한 부대는 기수가, 다른 한 부대는 혈천제가 지휘했는데, 부대를 둘로 나눈 만큼 미리 보아 둔 목표물들을 효율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다.
군량과 치중을 불태우는 게 첫 번째 목표였고, 남아 있는 청탑산 패거리를 척살하는 게 두 번째 목표, 그리고 반란군을 닥치는 대로 죽이는 게 세 번째 목표였다.
천마교의 마령과 골라 뽑은 교도들은 닥치는 대로 불을 지르고 적을 죽였다.
최정예 전력이라 실력이 충분한 데다 적은 주력이 빠져나가 텅 비다시피 한 상태이니 싸움은 해보나마나였다.
사방에서 연달아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비명이 난무했다.
기수는 1시간 정도 반군 진영을 박살낸 후 퇴각명령을 내렸다.
반란군의 병력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에 아직도 공격해야 할 목표가 많이 남아 있었지만 기수는 다른 것을 노렸다.
양현을 빠져나온 기수의 부대는 관도변에 매복했다.
기수는 자신의 지휘를 따르는 천마교도들에게 명령했다.
“드러나지 않는 곳에 몸을 숨긴 채 휴식을 취하라.”
그렇게 기다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파공음과 함께 일단의 무리가 경공을 펼치며 다가왔다.
출동했다가 가짜 신호를 알아차린 청탑산 무리가 황급히 복귀하는 것이었다.
기수는 수신호로 전투 준비 명령을 내린 후 적의 선두가 통과하는 순간 수풀 밖으로 뛰어나가며 파천강기를 난사했다.
“크아악!…”
“으아악!…..”
청탑산 무리들 입장에선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양현 쪽에 불길 치솟는 게 보여서 다급한 마음에 경공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길 옆 숲에서 갑자기 무시무시한 고수가 나타나 진형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천마교의 마령과 교도들도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그들은 전대 교주를 죽인 원수가 바로 청탑산 무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 놈이라도 더 죽이겠다는 각오로 어느 때보다 힘을 냈다.
기수는 그들 중 자기가 열심히 키운 여성 마령들이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뿌듯한 보람을 느꼈다.
계속 이어진 전투.
청탑산 무리는 기수, 그리고 천마교의 매복 협공이라는 두 위협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지리멸렬했다.
워낙 갑작스럽게 당하다 보니 제대로 된 전투대형조차 갖추지 못했고, 결국 3분의 2 가까운 사상자를 낸 뒤 나머지만 겨우겨우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천마교도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청탑산 패거리들을 상대로 이만큼이나 일방적인 승전을 거둘 것이라고는 그들도 기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결과가 나온 원인을 곧 알아차렸다.
모두의 시선이 기수에게 향했다.
청탑산 고수들의 무공은 마령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은혈대법을 쓰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승리가 가능했던 것은 한 수에 한 놈 꼴로 적을 제압하는 기수의 압도적인 무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마교도 중 누가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다들 기수를 향해 고개 숙여 목례를 했다.
존경과 감사가 담긴 인사였다.
기수는 미소로 화답한 후 그들을 좀 더 위쪽으로 이동시켰다.
경공으로 달려온 자들 다음으로 반란군의 기병이 올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기수는 천마교도들에게 길 위를 가로지르는 밧줄을 여러 곳에 걸도록 했다.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이라 밧줄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귀환하던 반군 기병은 선두가 멈추고, 그 뒤로 말들이 급히 속도를 줄이려다 뒤로부터 밀려 넘어지는 볼썽사나운 꼴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말 울음소리와 비명, 고함이 난무했고, 기수와 천마교도들은 일제히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기병들은 청탑산 고수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격이 떨어졌기 때문에 천마교의 마령이 아닌 일반 교도들도 어렵지 않게 처치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만약 평원에서 정면대결을 벌였다면 기병의 장점이 발휘될 수도 있었겠지만, 어두운 길에는 밧줄이 걸려 있고, 말들은 자기네끼리 엉키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전투력이 발휘될 리가 없었다.
결국 반군 기병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천마교도들은 말을 모두 노획했고 그들 중 가장 크고 빨라 보이는 놈을 골라 기수에게 타도록 했다.
졸지에 전원이 기병으로 변신한 천마교도들은 기수와 함께 다시 양현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