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465
01468 1468화
그 후로는 서로 지내 왔던 대화들을 이어 갔다. 박성민과 엄예림에 대해서도 서로 모르는 부분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런데 엄수찬 차관은 대화를 하던 도중 조금씩 머뭇거렸다.
태수도 그걸 눈치챘지만 먼저 말을 꺼내진 않았다.
아마 휴직이란 이유로 뭔가를 부탁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미국에 가는 게 우선이었기에 모르는 척할 뿐이다.
박성민이 약혼하고 며칠이 지난 후, 태수는 인천국제공항 내 면세점 라운지에 앉아 있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보니 이륙까진 1시간 정도 남은 상태였다.
마침 휴대폰이 울렸다.
띠링띠링.
-삼촌, 조심히 다녀오세요.
-저희 걱정은 마시고요. 선물은 삼촌이 보기에 딱 좋아 보이는 걸로…….
윤사라와 주영수의 문자였다.
시간을 보아하니 점심시간 무렵이었다.
아이들이 잠깐 틈을 내서 문자를 보낸 모양이었다.
이런 사소한 문자 하나에도 아이들이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가득 느껴졌다.
고마웠다.
함께할 시간도 별로 없었는데 정이 오감이 있어 정말 행복했다.
휴대폰을 손에 쥔 태수는 창밖을 바라봤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공항에 비행기들이 가득했다.
잠시 감상에 젖어 있는 사이 유리창을 통해 이쪽으로 접근하는 김혁권의 모습이 보였다.
“오셨습니까.”
“유리를 너무 깨끗이 닦아 놨네.”
풀썩.
그가 반대편 자리에 앉자 태수는 시선을 돌려 바라봤다.
전과 달리 까칠한 인상에 태수가 조금 놀랐다.
“잠을 못 주무셨습니까?”
“아니, 뭐, 대충. 그보다 닥터 박은 발리에서 아주 깨가 쏟아진다던데. 응급 끝나고 바로 공항 달려가서 한국 뜰 줄은 몰랐지.”
“왜 말을 돌리십니까?”
“말을 돌리기는. 내 얼굴이야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보다 그 음료수 좀 마십시다.”
김혁권은 목이 타는지 갑자기 태수가 들고 있던 음료수를 낚아챘다. 그 손길이 다소 다급했다.
태수는 그가 음료수를 마시는 모습까지도 의아하게 바라봤다.
탁.
음료수 잔을 내려놓은 김혁권은 여전한 태수의 시선에 멈칫했다.
“왜요?”
“혹시 송 간호사님을 두고 가시는 게 내키지 않으시다면…….”
“그건 아니고, 이틀 정도 잠을 설쳐서 좀 까칠한가 보네.”
“잠을 설쳐요? 혹시 두 분이, 흠흠.”
“이 의사가 뭐라는 거야. 그게 아니라……. 됐어요. 그래, 우리끼리 뜨거운 밤을 보내느라 잠 못 잤어. 이제 됐어?”
김혁권이 툴툴거리자 태수가 더욱 강렬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아닌 거 같은데요.”
“맞다니까.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는데 비즈니스석이니까 좀 쉬면서 가겠네. 뭐해요? 가기 전까지 시간 많은데 뭐라도 더 먹어야지.”
김혁권은 할 말만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미니 뷔페로 향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태수는 어느새 김혁권의 옆에 바짝 다가갔다.
“혹시 이사장님께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니요.”
“그런데 왜 그러세요?”
“그냥 둘이 뜨거운 밤을 보냈다니까.”
김혁권의 대답이 영 신뢰가 안 갔다. 태수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을 대목이기도 했다.
“그렇게 대충 둘러치지 마시고요.”
“아, 몰라.”
휘휘 손을 저은 김혁권은 흔들림 없이 간단한 식사와 음료를 챙겼다.
곧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지만 태수는 여전히 김혁권을 쳐다보고 있었다.
샌드위치를 한 입 물려던 김혁권이 결국 한마디 했다.
“왜 자꾸 사람 부담스럽게 쳐다보고 그럽니까?”
“진짜 사실대로 말씀하지 않으실 겁니까?”
“별거 아니래도.”
“제가 혁권 씨를 진찰하게 하실 겁니까?”
태수가 으름장을 놓자 김혁권이 멈칫했다.
태수는 진찰할 때 단순하게 병만 파악하지 않는다.
김혁권의 몸에 남은 아주 자그마한 흔적들을 찾아 사실을 추론해 가는 눈치가 정말 대단했다.
평소에는 흘리듯 바라보며 넘어가지만, 제대로 살피기로 작정한 태수의 눈썰미를 피해 간다는 게 쉽지 않았다.
김혁권은 그걸 알고 있지만 괜히 투덜거렸다.
“나도 간호사지만 병원 놀이 싫어하는 거 아시면서 이럽니까?”
“그러니까 왜 그런지 말씀하세요. 그냥 웃자고 넘어가기에는 상태가 너무 좋지 않으십니다.”
“…….”
“그럼 진짜로 시작하도록 하죠.”
태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정말 진찰할 자세를 잡았다. 그러자 김혁권이 더 견디지 못하고 두 손을 내젓기 시작했다.
“알았어. 내가 졌어. 내가 졌다고요.”
“그래서요?”
“병원장님이 좀 무리하셔서 간호하느라 며칠 잠을 설쳤습니다. 됐죠?”
“병원장님이요?”
태수가 미간을 좁히자 김혁권이 말했다.
“이제 괜찮다고. 포도당하고 아미노산 하나씩 투여하고 하루 푹 쉬니까 많이 좋아지셨다니까.”
“먼저 뵙고 올 걸 그랬습니다.”
“이런 말할까 봐 둘러치는 거 아닙니까. 병원장님도 신경 쓰이게 하지 말라고 얼마나 당부를 했는데.”
김혁권의 진솔한 말에 태수 얼굴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
“저에게 정말 비밀로 하실 거였으면 푹 쉬고 오셨어야죠.”
“좌우간 괜찮다고. 진짜라니까.”
김혁권의 말에도 태수는 의심을 풀지 않았다.
“좀 드시고 계세요.”
“지금 전화하면 난 뭐가 되는데.”
“먼저 절 속이려고 하신 게 잘못된 거죠.”
태수는 끄덕도 하지 않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 순간 김혁권이 나지막이 말했다.
“지금 전화하면 병원장님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자신이 발길 잡는다고 생각하진 않겠어요?”
“…….”
“진짜 괜찮아졌고, 별다른 문제도 없어요.”
“음.”
짧게 숨을 내쉰 태수가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본 김혁권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잘 생각했어요. 혹시 걱정하거들랑 접으라고 합디다.”
“네. 떠난다고 생각하니까 좀 예민해진 거 같습니다.”
“나도 사실 좀 그렇긴 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걱정할 사람은 아니잖아.”
김혁권의 말대로였다.
황석찬 병원장도 안다. 장시간 간호를 하려면 스스로 건강해야 한단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정말 웃긴 일이었다.
태수는 품었던 걱정을 얼른 날려 버렸다.
이제 막 한국을 떠나는 길이다.
여러 생각으로 머릿속을 흩트리고 싶지 않았다.
모든 걸 한쪽으로 미뤄 놓고 우선 스미스와 만날 그 시간이 빨리 다가오길 희망했다.
장시간 비행 후 태수와 김혁권은 워싱턴에 도착했다.
미국 공기?
태수와 김혁권에겐 특별하게 감흥을 주진 못했다.
입국장을 나서자 마중 나온 사람들이 길게 서 있었고, 그중에 한국어 피켓도 곳곳에 보였다.
무심코 바라보며 지나치던 중 태수와 김혁권은 한 피켓에 시선이 멈췄다.
-환영! 최태수, 김혁권.
삐뚤빼뚤하지만 정성 가득한 한국어였다.
그 피켓을 들고 있는 백인을 본 태수와 김혁권이 빙긋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닥터 데이먼.”
“오, 닥터 최, 미스터 김!”
닥터 데이먼은 얼른 피켓을 내리고 다가오는 두 사람에게 손을 내밀며 환영했다.
가볍게 악수를 마친 뒤 태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매번 나오지 않으셔도 잘 찾아가는데요.”
“닥터 최를 마중 나오는 건 제 기쁨 중 하나입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태수가 한국식으로 고개를 숙이자 닥터 데이먼도 어색하게나마 따라 했다.
“언제나 환영이죠. 그보다 피곤하시겠습니다. 가시죠.”
“그런데 스미스는 오늘 시간이 괜찮으십니까?”
같이 이동하면서 태수가 묻자 닥터 데이먼이 가볍게 미소 지으며 반문했다.
“피곤하진 않으십니까?”
“좀 피곤한데, 그래도 미국에 오니까 이상하게 서둘러지네요.”
“그런데 오늘은 그냥 쉬셔야 할 거 같습니다. 안 만나 주실 거 같거든요.”
닥터 데이먼의 말에 태수가 의아하게 바라봤다.
“수술이 있습니까?”
“수술은 아니고, 오늘은 다른 일이 조금 있습니다.”
“그러시군요. 그래도 병원에 가서 인사부터 드려야죠.”
태수가 적극적으로 말했지만 닥터 데이먼은 고개를 저었다.
“내일 호텔로 찾아가신다고 하셨습니다.”
“많이 바쁘신가 보네요.”
“항상 똑같죠.”
닥터 데이먼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호텔은 태수가 워싱턴에 올 때마다 묵는 호텔의 스위트룸이었다.
넓게 강이 보이는 전망 좋은 거실에 태수와 닥터 데이먼이 나란히 서 있었다.
닥터 데이먼이 먼저 태수에게 말했다.
“스미스 박사님이 한국의 일로 신경을 많이 쓰고 계십니다.”
“아차, 데이먼에게 인사부터 해야죠. 그때 먼 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오셨는데, 사정이 그래서 대접이 시원치 않았습니다.”
태수가 인사하자 닥터 데이먼이 정색했다.
“우리 사이가 이거밖에 안 됩니까?”
“…….”
“인종도 나이도 다 다르다고 해도 난 닥터 최와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친구 맞죠. 친한 사이일수록 사소한 걸 잘 챙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태수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여도 닥터 데이먼은 뚱한 얼굴로 바라봤다.
“난 그런 거 모릅니다. 닥터 최가 보고 싶어서 다녀온 거고, 본 걸로 된 거니까요.”
“고맙습니다.”
“고마워하지 말고 당연하게 생각하란 말입니다.”
“그러시다면. 다음에 연락드리면 또 오실 거죠?”
태수가 스리슬쩍 너스레를 떨었지만 닥터 데이먼은 퉁명하게 대답했다.
“이번에 하는 거 봐서요.”
“많이 비우고 왔습니다. 그때처럼 쫓기는 마음은 없습니다. 조금씩 여유도 찾아가고 있고요.”
“진짜요?”
“조만간 술 한잔하시면서 직접 가늠해 보시면 되겠네요.”
태수는 둘러서 말했지만 닥터 데이먼은 눈치 좋게 알아들었다.
“위스키 한병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다섯병?”
“그 정도라면 제 섭섭한 마음이 좀 풀리겠네요.”
“꼭 그렇게 모시겠습니다.”
태수가 미소 짓자 닥터 데이먼도 뚱한 표정을 거두고 같이 미소를 보였다.
그때 김혁권이 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전망 죽이네. 물론 우리라면 이 정도 숙소에 묵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말입니다.”
“신경 좀 썼습니다.”
“그거야 알아서 하셨겠고, 스미스는 언제 온답니까? 내일 얘기 끝나면 바로 병원에서 수술 한 건 하려나?”
“좀 더 쉬시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닥터 데이먼의 반문에 김혁권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돈 벌러 왔으면 돈 벌어야지.”
“여전하십니다.”
“당연한 말씀.”
김혁권은 소탈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도 닥터 데이먼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다.
한국에선 속물로 보일지 몰라도 미국에선 당연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었다.
또한 김혁권 입장에선 이미 존스홉킨스병원에서 실력을 입증했기에 별 문제는 없었다.
닥터 데이먼은 태수와 김혁권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존스홉킨스에서 두 분이 같이 수술하신 경우는 없었죠?”
“생각해 보니 그동안 저희 둘이 겹쳤던 기간이 없네요.”
“두 분의 호흡이 어떨지 사뭇 기대됩니다.”
닥터 데이먼은 순수하게 기대감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태수와 김혁권은 잠깐 서로를 마주 보고는 닥터 데이먼을 향해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음 날 오후.
태수와 김혁권은 호텔 방에서 스미스를 맞이했다.
악수로 서로를 반긴 세 사람은 푹신한 소파에 자리했다.
스미스가 먼저 두 사람을 둘러보며 말했다.
“푹 쉰 모양이야.”
“아주 편하게 쉬었습니다. 시차의 영향이 약간 남아 있지만 그래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태수의 말에 김혁권이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스미스가 말했다.
“일단 중요한 말부터 하지.”
“네.”
“여기 한국에서 이메일로 받은 자료들을 가져왔어.”
스미스는 서류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가동된 노트북 화면에는 동영상 자료와 서류들이 한 폴더에 가득 담겨 있었다.
그걸 본 태수가 심각한 얼굴로 변했다.
자신도 황석찬 병원장에게 말로만 들은 내용인데, 이렇게 자료가 만리타국까지 넘어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 대답은 김혁권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병원장님이 닥터 스미스에게 보냈다고 했어요. 영상 자료나 데이터를 차분하게 확인할 곳은 여기뿐이기도 했고.”
“그랬군요.”
끄덕.
김혁권이 고개만 끄덕이자 스미스가 이어서 말했다.
“좌우간 내가 먼저 확인하고, 그에 대한 자료들을 조사해서 가져왔지.”
“이걸 직접 준비하셨습니까?”
“물론. 이건 내 일이니까.”
스미스의 말에 태수는 사실 엄청 놀랐다.
환자가 석정현 이사장이라고 해도 스미스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움직일 상대는 아니었다.
매출이나 규모로는 동성그룹과 상상도 못할 만큼 차이 나는 미국의 거대 기업 임원들을 대할 때도 심드렁한 스미스였기에 더더욱 적극적인 모습이 놀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