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936
01939 1939화
그런 태수를 힐끔거린 김혁권이 조용히 말했다.
“대충 보니까 1시간 정도 후면 도착할 거 같네요.”
“……그러게요.”
“눈이라도 좀 붙이든가.”
그 소리에 오랜만에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친 태수가 옅게 미소 지었다.
“괜찮습니다. 혁권 씨가 더 피곤하시죠.”
“나 지금 신난 거 안 보여요?”
“보입니다.”
“오랜만에 돌아오니까 좋긴 하네.”
김혁권의 말에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요.”
“그래도 힌디어는 안 까먹었더라고. 다른 언어는 약간 가물가물하던데.”
김혁권의 감회서린 말에 태수가 역공을 펼쳤다.
“전혀 그렇게 안 느껴지던데요. 아는 분들도 여전히 많으시고.”
“다들 사는 게 다 고만고만한 거죠. 됐어. 왔으면 됐지. 좀 쉬어요. 도착하면 깨울게.”
“알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태수는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동안 많은 게 변했다.
전에는 어디서 오발 사격이 일어날지 몰라 이런 도로를 달리는 것도 긴장해야 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전쟁 지역이 축소되어 몇몇 도로들은 제한 없이 달릴 수 있다고 했다.
이잠바크도 많이 변했단 소식을 들었다.
그런 좋은 소식들로 인해 태수의 마음이 조금은 가벼울 수 있었다.
1시간 후.
“……캡틴.”
귀를 가늘게 울리는 목소리에 태수가 눈썹을 꿈틀거리다 눈을 번쩍 떴다.
덜컹덜컹.
아직 차 안이었다.
감각이 돌아오자 태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흐, 흐음. 잠들었나 봅니다.”
“피곤하셨겠지. 그보다 저기 봐요.”
“어떤 놈들이 검문, 검색한다고 폼 잡습니까?”
“보라고.”
김혁권이 재차 말하자 태수는 두 손을 내리고 앞을 바라봤다. 동시에 눈을 가늘게 뜨며 김혁권에게 물었다.
“저기…… 저기 맞습니까?”
“어떻게 생각해요?”
“맞는 거 같긴 한데…….”
태수의 목소리가 얼떨떨했다.
이잠바크다.
지금까지 이동한 거리는 물론 주변의 지형들을 봐도 분명히 이잠바크가 맞았다.
그런데 기억하고 있는 이잠바크의 모습과 너무도 달랐다.
마을 규모부터 2배 이상 커졌다.
지금도 건축 중인 건물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태수가 눈을 크게 뜨고 놀라는 사이 김혁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제 말이요.”
태수도 황당할 따름이었다.
그때 뒤에서 박성민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야, 이 싸람들, 안 되겠네.”
“네?”
“태수야, 저게 다 쓰러져 가는 마을이야? 아니, 어디에 총알 날아다니는데? 도대체가 말이야,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 말이야.”
박성민의 어이없는 목소리에 김혁권이 한 소리 했다.
“좀 있어 봐요. 우리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으니까.”
“있긴 뭘 있어 봐. 딱 걸린 거지. 뭐? 뒤에 폭탄이 떨어지는데 수술을 해? 거짓말도 적당히 해야 믿든지 말든지 하지.”
“좀!”
“찔리지? 완전 쿡쿡 찔리니까 저러지…….”
박성민의 중얼거림이 계속 이어졌다.
그런 박성민의 투덜거림은 관심도 없었다.
태수와 김혁권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모습에 그저 황당할 따름이었다.
지프는 곧 마을에 들어섰다.
가까이서 보니 놀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시장?”
“저기 관광객입니까?”
어이가 없었다.
변해도 너무 변한 이잠바크의 모습은 혼란만 가중시켰다.
지프는 곧 마을 광장 한쪽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순간 박성민이 이리저리 둘러보며 감탄하기 시작했다.
“이야, 마을 깔끔하네. 좋은데?”
“나도 여기가 이렇게 변할 줄은 몰랐다니까.”
“이젠 우리 솔직해집시다.”
“진짜, 사람 말 좀 믿읍시다.”
김혁권의 목소리에 점점 짜증이 담겼다.
가장 혼란스러운 사람은 태수였다.
지금 서 있는 장소는 마을 광장이었다.
그런데 있어야 할 게 없었다.
그건 바로 신혜미의 목상이었다.
몇 번을 둘러봤지만 그 커다란 목상이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가슴이 아파온 태수는 남몰래 주먹을 쥐었다.
그 주먹이 가늘게 떨리던 중이었다.
김혁권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태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래요?”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닌데?”
“…….”
“그 쓰러져 가던 마을이 이렇게 발전했잖아. 그거면 충분히 보람된 거 아닙니까?”
“그렇죠.”
태수의 무성의한 대답에 김혁권의 표정이 의아하게 변했다.
“말은 그런데 표정은 아니고. 도대체 뭐가 불만인 건지.”
“저 녀석도 배가 아픈 거야. 이건 사촌이 땅을 산 게 아니라 아는 사람이 로또 맞은 격이잖아. 배가 아플 만하지.”
“거참, 캡틴이 당신 같은 줄 아나.”
“나? 내가 뭐! 내가 또 어쨌다고, 이 뻥쟁이 아저씨야.”
박성민 말에 김혁권이 참다못해 발끈했다.
“내가 뻥친 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해!”
“됐거든. 내가 이제 아저씨 하는 말을 믿나 보자고. 절대 안 믿어!”
박성민과 김혁권은 또다시 티격태격했다.
하지만 태수는,
…….
실망을 넘어 기운이 쭉 빠졌다.
여기에 온 모든 이유가 사라졌다.
오아시스를 찾아 먼 길을 왔는데 신기루처럼 사라진 느낌까지 들었다.
허탈했다.
이들의 발전과 풍요로움은 축하할 일이었지만, 태수는 마음이 텅텅 빈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게 마을 광장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서성이던 중이었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태수 앞에 섰다.
노인이었다.
다가올 때까지만 해도 약간 우물쭈물했다.
그러나 태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그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단 표정을 지었다.
“#@^%#@$%@.”
뭐라고 말했지만 이젠 이쪽 언어를 잊은 태수에겐 알아듣지 못할 말이었다.
그때 김혁권이 얼른 다가와 그와 대화를 나눴다.
몇 마디 나눈 후 노인이 떨리는 눈빛으로 다가와 태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무릎을 꿇더니 그 손을 자신의 이마에 대며 중얼거렸다.
급작스러운 상황에 태수가 얼떨떨해하는 사이 김혁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이시여, 그를 다시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네요.”
“네?”
“누군지 모르겠어요? 잘 기억해 봐요.”
김혁권이 힌트를 주자 태수가 노인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는 터라 바로 알아볼 수 없었다.
안 되겠는지 태수가 몸을 낮춰 그와 눈높이를 비슷하게 맞췄다.
곧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눈시울이 벌겋게 변해 있는 그를 보던 태수가 멈칫했다.
압둘라함과 함께 마을 대소사를 관여하던 원로 중 한 명이었다.
“아! 당신은…….”
“…….”
울먹거리는 그가 떨리는 입술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에 깃든 무한한 감동이 태수의 가슴에 깊게 와 닿았다.
잠시 후.
태수와 김혁권, 박성민의 주변에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박성민은 다짜고짜 달려드는 사람들에 질겁하며 김혁권에게 물었다.
“뭐야, 이 사람들 뭐냐고. 왜 갑자기 우리한테 이러는 건데?”
“있어 봐요. 손 한 번 더 잡자고 이러는 거잖아.”
“그러니까 내 손을 왜 잡냐고. 아, 저 여자 예쁘다. 여기 내 손……. 젠장. 태수 손 잡네. 아니, 아저씨 말고.”
박성민은 이 순간에도 여유부렸다.
힐끔 쳐다본 김혁권이 나지막이 말했다.
“예림 씨한테 꼭 얘기해 드리기로 하고.”
“그건 반칙이지! 송 간호사 어디 있어. 난 그냥 넘어갈 거 같아요? 봐 봐. 거기 딱 봤어! 손만 잡는 게 아니라 아주 끌어안네. 어쭈? 안 떨어져? 내가 확 이를 거야!”
박성민의 수다를 김혁권이 몇마디로 잠재웠다.
“송 간호사도 아는 애…… 아니지, 이젠 처녀네. 참 많이 컸다.”
“아저씨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는데.”
박성민은 투덜거리면서도 아직 이 상황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런 두 사람의 대화는 태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손을 맞잡고 있는 사람들, 또 한 번씩 눈을 마주치고 포옹하는 사람들.
이들 모두 이곳 원주민들이었다.
중년인들은 하나둘씩 흰 머리가 생기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이제 청소년 혹은 성인으로 불려도 손색없었다.
태수만 2년 전에 마지막으로 방문했었다.
김혁권은 몇 년 전이었고, 박성민은 처음이다.
그러니 반응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태수 또한 혼자 찾아왔던 그때가 아직 눈에 선했다. 2년이란 시간이 짧다면 짧지만, 이렇게 새롭게 다가올 수도 있었다.
그들의 환대가 고마웠지만 아직 태수의 마음은 불편했다.
그때였다.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려오더니 사람들이 좌우로 조금씩 이동해 길을 만들었다.
그 사이로 청년들이 걸어왔다.
선두에 선 남자는 카르힘의 환한 얼굴이었다.
이내 태수 앞에 다가선 카르힘의 얼굴에 형용할 수 없는 반가움이 가득했다.
“오셨습니까.”
“네, 왔습니다.”
짧은 인사말이었지만 다른 말로는 이 만남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카르힘의 등장과 동시에 사람들이 조금 멀찍이 물러섰다.
태수가 궁금해할 무렵 김혁권이 사람들과 대화했는지 이유를 알려 줬다.
“카르힘이 청년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네요. 진취적으로 마을 발전에 이바지하고, 청년단을 구성해서 치안도 유지하고 있고요.”
그 소리에 태수가 카르힘을 바라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축하드립니다.”
“라함의 부탁이었습니다. 닥터 최가 지켜 준 터전을 우리가 가꿔야 한다고요.”
“그렇군요.”
“그런데 왜 표정이 좋지 않으신지…….”
카르힘은 슬쩍 눈치를 봤다.
태수가 웃고 있는데도 속에 담긴 어두움을 느낀 모양이었다.
하지만 태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당황해서 그렇습니다.”
“…….”
“급진적인 변화와 발전에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겠습니까. 이제 예전의 흔적들은 찾아볼 수도 없고요.”
태수는 광장을 둘러보며 에둘러 말했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카르힘의 눈빛이 반짝였다.
광장?
뭔가 느낌이 온 모양이었다.
예전부터 눈치가 빨랐던 카르힘이 태수에게 말했다.
“잠시 같이 가시죠.”
“…….”
“멀지 않습니다.”
말을 마친 카르힘이 먼저 돌아서 걸어갔다.
그러자 김혁권이 힐끔 쳐다봤다.
“갑자기 왜 따라오랍니까?”
“글쎄요. 가 보면 알겠죠.”
“아까부터 이상하시네.”
“그냥 좀 적응이 안 돼서요.”
그렇게 말한 태수는 먼저 카르힘의 뒤를 따랐다.
뭔가 분위기가 가라앉은 그 모습에 김혁권과 박성민은 어깨를 들썩이며 함께 걸어갔다.
이동 시간은 10분도 되지 않았다.
새로 지어진 커다란 건물을 돌아서자 허리 높이만큼 흙벽돌이 쌓인 담장이 나타났다.
담장 안에는 큼지막한 마당이 있고, 거기에 3층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던 중 정문 바로 옆에 적혀 있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닥터 최&신병원.
영어로 먼저 적혀 있고, 그 밑에 이곳 글씨가 적혀 있었다.
그 이름을 확인한 박성민이 황당한 표정으로 변했다.
“뭐야, 최신병원? 그럼 다른 병원은 구식 병원이라는 거야, 뭐야?”
“new라고 적혀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나도 알아. 발음 나는 대로 최신이라고 적혀 있는 걸 누가 모릅니까? 그게 더 이상하다는 거잖아.”
“그건 나도 좀 이상합니다. 닥터최신이라니.”
의아함은 잠시였다.
정문을 통과한 순간 그 의아함은 놀람으로 변했다.
병원 현관 바로 옆에 3개의 목상이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태수와 김혁권, 박성민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오른쪽은 태수의 모습이, 가운데에는 압둘라함이, 왼쪽은 신혜미의 목상이었다.
태수는 마을 광장에서 볼 수 없었던 신혜미의 목상을 발견했단 사실만으로도 안도했다.
그러나 김혁권과 박성민은 아니었다.
“저, 저기 신 선생 아니야? 얼라리요? 여기 있는 사람이 저기에도 있네.”
박성민이 태수와 태수의 목상을 번갈아 손짓하며 눈을 끔벅거렸다.
그런 반면 김혁권은 압둘라함의 목상을 가만히 쳐다봤다.
“노인네, 오랜만입니다.”
“아는 사람?”
“여기 예전 대표.”
“아이고, 그럼 인사드려야지.”
박성민은 압둘라함의 목상에 가볍게 목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