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3660
Chapter 429화.
신체발부 수지부모라고 했다.
그러니 부모님에게 상황을 알리고 허락을 받는 게 우선이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그만큼 이번 일은 태수도 무사하리란 장담을 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래서 아버지를 떠올렸는 지도 몰랐다.
스윽.
태수는 한적한 곳으로 움직였다.
태수는 의료캠프 끝에 세워진 철책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철조망 사이로 멀리 도시를 바라보며 휴대폰을 들었다.
한국 시간?
몰랐다.
혹시 잘 시간에 전화한다고 혼나더라도 허락 받는 게 더 중요했다.
일부러 집 전화로 했다.
날이 더워지면 몸에 열이 많은 아버지는 거실에서 주무시는 습관이 있어서였다.
뚜루루.
잠시 기다리자 역시 걸걸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데 야밤에 남의 집에 전화질이야?”
“아들이요.”
“잠도 없냐?”
“여긴 아침입니다.”
태수의 대답에 아버지는 더 당당하게 반응했다.
“자랑이다.”
“잘 주무시고 계셨어요?”
“그냥 놔두면 잘 자고 있을 사람을 굳이 깨워서 확인하는 저의가 뭐냐?”
아버지의 목소리에 짜증이 서리기 시작했다.
만리 타국에 떨어져 있는 아들이 오랜만에 전화를 해도 똑같았다.
태수는 그런 아버지라 더욱 좋았다.
그래서 넉살도 더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크흠. 소자 아뢸 말이 있어 전화드렸사옵니다.”
“……잠을 못 잔 거야. 안 잔 거야?”
“잘 잤습니다.”
“그럼 가서 세수를 해라. 집에 전화하는데 정신은 차리고 해야 할 거 아니야.”
아버지의 따끔한 질책이 들려왔다.
그래도 태수는 미소가 입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하.”
“세수하면서 허파에 바람도 좀 빼고.”
“아버지.”
“어디 목에 힘을 주고……. 너 왜 자꾸 안하던 짓하냐?”
아버지도 느낌이 평소와 다르단 걸 눈치 챈 모양이다.
태수는 차분히 말했다.
“말씀드려야할 게 있어서요.”
“……그래서 몇 개월인데, 애는 건강하고?”
“네?”
태수는 무슨 소린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풀어서 다시 물어왔다.
“사고 쳤다고 자진 납세하는 거 아니냐?”
“아들을 대체 어떻게 아시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게 뭐 어때서. 책임지면 되는 거지.”
“그건 그런데요. 아무튼 그 문제는 아닙니다.”
“에잉. 그럴 위인도 못될 놈.”
아버지의 실망스런 목소리에 태수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지금 이런 대화를 할 상황이 아닙니다.”
“자는 사람 깨우려면 그 정도 소식은 돼야 하는 거다.”
“그 이상입니다.”
“얼씨구. 그래. 뭐가 그렇게 중요한지 한 번 떠들어 봐.”
아버지는 선심 쓰듯 기회를 줬다.
태수는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고 말하기 시작했다.
“반년 전에…….”
처음 이창규와의 만남부터 그들이 왜 여기에 있고, 어떻게 흘러왔는지까지.
태수는 하나도 빠짐없이 털어놓았다.
그 상대가 아버지기에 더욱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서 가려고 합니다.”
“하나 묻자. 허락을 받자고 전화한 거냐?”
“아니요. 갈 겁니다.”
“다 정해놓고 왜 전화했는데?”
아버지가 재차 이유를 묻자 태수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바로 이 말을 하기 위해 전화한 탓이었다.
막상 꺼내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목에 힘을 주고 입을 열었다.
“제가 혹시라도 비행기 화물로 한국에 돌아갈지도 몰라서요.”
“그렇게 위험하냐?”
“애새끼들이 총 들고, 수류탄 달고, 기관총에 유탄 발사기에 아주 그냥 난립니다.”
“썩어 뒤져도 쳐다보지 않을 놈들 같으니라고.”
역시 아버지의 욕은 심의규정을 준수하면서도 자극적이었다.
막걸리 한 사발 들이켠 듯한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크으. 저는 왜 욕을 해도 이 맛이 안 날까요.”
“말 돌리지 마라.”
“……네. 말씀하십시오.”
태수가 멋쩍은 표정으로 휴대폰을 공손히 들었다.
잠시 숨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아버지의 침착한 음성이 들려왔다.
“태수야. 네가 혹시라도 작은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다면 말이다.”
“네. 아버지.”
“난 작아진 널 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마을 사람들에게 자랑을 할 거다.”
“…….”
태수는 순간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했다.
아버지는 개의치 않는지 이어서 말했다.
“마을 잔치를 열 것이고, 널 가장 좋은 자리에서 편안하게 쉬게 해줄 거다.”
“……네.”
“아무 걱정하지 말고, 그 무엇도 머릿속에 두지 말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라.”
“네.”
“그리고 그분들에게 전해다오. 감사하다고, 고맙다고, 꼭 전해다오……. 그럼 소식 기다리마.”
아버지는 그렇게 말을 마쳤다.
그런데 전화 끊어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흐으음.”
미약하게 떨리는 숨소리만 들려왔다.
태수는 아버지가 차마 전화를 먼저 끊지 못하고 있단 걸 직감했다.
말을 할까?
순간 고민했다.
그러나 태수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최대한 자연스럽고 차분하게 숨을 쉬었다.
“흐음……. 흐음…….”
자신의 숨소리가 아버지 귀에 닿을 수 있도록 송화부분을 꼭 붙이기도 했다.
서로 무뚝뚝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숨소리만 흘리고 있었다.
잠시라도 더 지금을 이어가려 전화를 끊지 않고 있었다.
태수는 아버지의 숨소리에 점점 익숙해져갔다.
그리고 아버지의 숨소리가 이렇게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단 걸 지금에서야 느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였다.
탈칵.
그제야 전화가 끊어졌다.
태수도 그제야 뜨거워진 휴대폰을 귀에서 뗐다.
‘기왕이면 살아서 돌아갈게요.’
속으로 자그맣게 못다한 말을 읊조렸다.
그리고 다시 첫 목적지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이제 그 무엇도 태수의 앞길을 막을 수 없었다.
곧 태수는 제임스의 의료 텐트에 도착했다.
사락.
가림막을 들어 올리며 기척부터 냈다.
“제임스, 닥터 최입니다.”
“들어와.”
“실례합니다.”
척.
안으로 들어서자 향긋한 토리티나 냄새가 났다.
제임스에게 아직 대접한 적이 없기에 태수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어?”
“향이 좋지? 마침 잘 왔어.”
“아, 네. 그런데 이 차는…….”
태수가 얼떨떨한 얼굴로 다가가자 제임스가 웃으며 말했다.
“닥터 행크스가 보내준 차야. 그 친구 3개월만 살게 해달라더니 4개월 차에 접어들었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네요.”
“차향이 좋아서 그런지 기분이 상쾌해지는 거 같아. 생산처에서 올해를 끝으로 몇 년 정비에 들어간다더군. 아쉬워.”
제임스는 토리티나를 가볍게 코끝으로 향을 맡고 입으로 가져갔다.
태수는 찻잔을 내려다보며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훗.”
“왜 그러지?”
“얼마 안 살았는데도 살아가는 게 참 재밌다고 느껴져서요.”
“무슨 일이 있나?”
제임스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태수는 찻잔을 들며 말했다.
“토리티나라는 차입니다. 순수 한국어로 이뤄진 이름이고요.”
“그래? 그럼 한국에서 생산되는 차가 영국까지 수출하는 모양이야.”
“원산지는 카슈미르입니다.”
“……음?”
제임스가 멈칫하며 바라봤다.
태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설명했다.
“카슈미르가 원산지라고요.”
“그래? 참 재밌군. 코앞에서 나는 차를 영국까지 두 번이나 비행기를 타고야 내 손에 들어오다니 말이야.”
“더 재밌는 건 저 차상자 안에 찻잎 중 하나는 제가 땄을 겁니다.”
태수의 말에 제임스 미간이 와락 좁혀졌다.
“그때 출동한다고 했던 게 이 차였나?”
“맞습니다.”
“허. 허허. 정말 재밌군. 재밌어.”
제임스도 이제 태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태수가 한 마디 덧붙여 말했다.
“잘못하면 이 차를 다신 맛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차밭이 망가져서 그런가?”
“아니요. 씨앗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걸 재배하게 세상이 허락하지를 않네요.”
“음. 좀 더 알아듣게 말해봐.”
“실은…….”
태수는 타이밍을 잡고 한인마을에 닥친 위기에 대해 말했다.
아버지와 설명의 폭이 크게 차이 났다.
제임스를 존경하고 존중하지만, 아버지와 비교할 순 없었다.
그런 태수의 이어진 설명에 제임스 눈에 힘이 들어갔다.
잠시 후.
태수는 토리티나 차가 든 잔을 만지작거리며 마무리 지었다.
“……그래서 다녀오고 싶습니다.”
“허락을 해달란 건가, 아니면 통보를 하는 건가.”
“저는 허락을 받고 싶어서 말씀드리는 거고요.”
“그리고?”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통보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태수는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며 최대한 부드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제임스의 굳어진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쪼르륵.
갑자기 차를 바닥에 쏟아버렸다.
태수는 그 돌발행동에 크게 멈칫했다.
“차를 왜…….”
“다시 마실 수 없다면 차라리 입에 길들이지 않아야 할 거 아닌가.”
“이번 위기만 넘기면 얼마든지 재배 가능합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나?”
제임스 눈빛이 무겁고 진지하게 변했다.
태수는 순간 뭔가 느낌을 받았다.
그냥 느낌으로 그치지 않고 조심히 물었다.
“제가 가지 않길 바라십니까?”
“맞아. 저 차가 사라지면 많은 이들이 즐거움을 놓치겠지.”
“네. 맞습니다. 그래서…….”
“하지만 찻잎은 사람을 살릴 수 없어. 내 양손에 자네와 찻잎을 백날 쥐어준다고 해도 내 결정은 똑같아.”
너무도 단호한 말이었다.
태수는 혹시나 싶은 마음으로 오해를 풀어줬다.
“찻잎은 그냥 하는 말이고요.”
“나 또한 찻잎은 예시로 들고 있어.”
“제임스. 거기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내 눈엔 닥터 최만 보여.”
“흠.”
태수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제임스가 이렇게까지 생각해주는 게 고마웠다.
하지만 마음은 이미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안타깝지만 이번엔 따를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이번엔 닥터 최가 잘못 생각하는 거야.”
“그렇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자네 생환을 장담 못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나.”
제임스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도 태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럴 겁니다.”
“그런데도 간다고?”
“제임스, 저는 참 작은 사람입니다.”
“무슨 의미지?”
제임스가 미간을 찌푸렸지만 태수는 여전히 덤덤하게 말했다.
“제임스가 큰 세상을 보고 듣고 경험시켜 주려는 걸 아는데요.”
“그걸 아는데?”
“제 눈에는 자꾸 작은 게 보이네요.”
“그래서?”
제임스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태수는 개의치 않고 부드럽게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제 눈에 보이는 작은 거부터 챙기겠습니다. 흘리지 않고 하나씩 챙기다보면 커지지 않을까요?”
“스스로 커지면 더 많은 자그만 걸 챙길 수 있어.”
“지금 놓친 게 다시 돌아올 거 같진 않습니다.”
“…….”
제임스는 묵직한 표정으로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럴수록 태수는 잔잔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제임스의 뜻에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꾸벅.
태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고개 숙였다.
고마움, 그리고 헤어짐의 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