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Devouring Mage RAW novel - Chapter 137
137화
EPISODE.69
“이 밤에 여긴 웬일이십니까?”
떠나기 전, 인사를 나누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게다가 굳이 꼭 지금일 필요도 없었다.
‘내가 떠나기로 한 게 내일 정오쯤이었으니…….’
아침에 인사를 나눴어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을 테니까.
“그냥. 하고 싶은 이야기가 좀 있어서…….”
그렇게 중얼거린 무야호가 갑작스레 발끈하며 소리쳤다.
“설마 이 몸이 주는 술은 못 마시겠다는 거냐. 수컷?”
“그럴 리가요.”
러셀이 씩 웃자, 무야호가 손에 들고 있던 호리병을 가볍게 던졌다.
찰랑찰랑.
포물선을 그리는 호리병, 안에든 술이 찰랑이는 소리가 귓가에 가볍게 울리고.
그것을 받아들기 무섭게 무야호가 또 다른 호리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전에 축제에서 마시던 커다란 호리병과는 달리, 손바닥 한 뼘 정도 크기를 가진 작은 호리병이었다.
퐁-.
술병을 따자 진한 주향이 방안 가득 감돌기 시작하고.
술을 한 모금 들이킨 무야호가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서두를 꺼냈다.
그간 러셀과 대결을 하며 했던 생각이라던가, 이것저것들.
“생각해보면 꽤 재미있었지. 아무리 몸풀기 수준이라지만, 아침마다 나와 그 정도 대련을 벌여줄 녀석이 이 섬에는 단 하나도 없었거든.”
“그 몸풀기에 매번 탈진해 쓰러지는 사람도 좀 배려해주셨으면 합니다만.”
“엄살떨기는.”
러셀이 중얼거리자 무야호가 낄낄거리며 그의 등허리를 퍽퍽 두드렸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 나가길 얼마쯤.
러셀이 제 몫의 술을 절반 정도 비워냈을 때, 무야호가 입을 뗐다.
“사실 말이야 수컷. 이렇게 이야기를 하자고 한 건, 네게 부탁할 것이 하나 있어서다.”
“부탁이요?”
답지않게 진중한 얼굴에 러셀이 들고 있던 호리병을 내려놓았다.
무야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좀 생각을 잘 해봤는데 말이야…….”
“……?”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건지.
“수인족들이 섬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마땅히 받아 줄 만한 나라가 없더라고.”
전에도 설명한 바 있듯, 이만한 수의 수인족들이 갑작스럽게 나타나 국가를 세운다고 하면 반길 만한 나라는 단 하나도 없을 테니까.
안타깝게도 그것은 러셀의 자국인 엔디미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말인데, 수컷. 네가 다리 역할을 좀 해줬으면 좋겠다.”
“다리라면, 정확하게 어떤 역할을 말하시는 겁니까? 설마 엔디미온의 영토를 툭 떼어 달라는 부탁을 하시는 거라면 아무리 저라 해도…….”
“아앙? 이 몸이 그런 염치 없는 부탁을 할 것 같냐. 수컷?”
러셀의 말을 무야호가 툭 끊었다.
“그저, 우리들이 살 수 있을 만한 작은 땅 하나를 내어 줬으면 한다는 거지.”
그게 그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기 무섭게, 러셀의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 하나가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무야호 님……?”
“아? 응. 그래. 그런 거야. 그러니까……, 우리 수인족들이 수컷. 네가 있는 나라로 들어가겠다고 말을 하고 있는 거다.”
표정에서 생각이 드러난 것인지, 무야호가 대꾸하며 입을 쩝쩝거렸다.
“그 인간들의 세상에는 영지라는 게 있다고 하던데, 우리 수인족들이 살 수 있는 영지가 있었으면 한다는 거지. 조금 번거롭고 귀찮긴 하겠지만, 필요하다면 너희들 왕에게 고개를 숙일 준비도 되어있고 말이야.”
꽤 왈가닥에 저돌적인 면이 있다지만, 러셀이 보아온 무야호는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이 굉장히 강한 편이었다.
그런데 그런 이가, 형식적이나마 엔디미온의 귀족 위를 받아도 상관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결정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생각이 있었을지는 굳이 따져볼 가치도 없었다.
“물론 우리도 공짜로 그런 걸 해 달라고 떼를 쓸 생각은 없어.”
그리 말하며 무야호가 술로 목을 축였다.
“우리 수인족들은 은혜를 잘 아는 종족이니 말이야. 그 뭐시냐, 영역 다툼? 전쟁? 그런 게 나면 우리도 한 손 거들어 줄 수 있다는 이야기지.”
그들이 살 수 있는 영지를 내어 주는 대가로서, 수인족들을 병력으로 거두어들일 수 있다면 어떻게 따져보든 엔디미온에게는 상당히 남는 장사다.
하물며 그 수인족들을 이끄는 것이 수왕, 무야호임에야.
‘문제는 엔디미온이 아니라, 수인족들이겠지.’
그렇기에 물었다.
“괜찮겠습니까?”
“응? 뭐가 말이냐?”
“무야호님은 수인족들의 왕이지 않습니까. 수왕께서 다른 국가의 귀족이 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요.”
“어, 음.”
러셀의 물음에 무야호가 애매한 얼굴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전에도 한번 짧게 설명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수왕이라는 자리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왕(王)과는 거리가 멀어.”
“……?”
“뭐랄까, 왕이라기보다는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쯤으로 여겨야 한다고나 할까?”
자신도 설명이 부족했다고 여겼는지 겸연쩍은 표정으로 덧붙였다.
“왕국 밑에 들어간다고 우리가 더 이상 수인족이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고…….”
“왕이나 군주(君主)가 군림하며 통치하는 자라면, 수왕이라는 자리는 일족을 대표하는, 뭐 그런 겁니까?”
“어어. 대충 비슷해. 맞았어. 똑똑한걸?”
확실히.
인간들이 생각하는 왕이나 군주와는 꽤 다른 개념이다. 오히려 짐승 무리의 우두머리와 조금 더 흡사한 구조.
그리 생각하니 오히려 쉽게 이해가 되었다.
‘수(獸)인족이니까.’
이제 여기서 남는 궁금증은 왜 그것을 자신에게 부탁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야호는 물론 수인족들 역시 어느 나라에서나 탐낼 만한 세력이다.
지금과 같은 결정을 했다면, 굳이 엔디미온이 아니라도 받아 줄 나라는 차고 넘쳤다.
그런 물음에 무야호가 대꾸했다.
“뭐, 그렇긴 하겠지만……아무래도 우리들에 대해 잘 아는 인간은 수컷. 네 녀석 말고는 없지 않겠어? 그러니 다리 역할도 더 잘해 줄 수 있을 테고. 뭐 부담되면 어쩔 수 없다만…….”
“아닙니다.”
러셀이 고개를 저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은 엔디미온의 백작이자, 예비 부마(駙馬)였다.
딱히 권력을 휘두르거나 이용해 본 적은 없었지만, 제안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확답은 못 하지만, 말은 꺼내 보겠다-라는 거군.”
그리 중얼거리며 무야호가 턱을 쓸어내렸다.
“예. 그에 대한 답변은 이곳을 드나드는 상인들을 통해 전달하겠습니다만……그럼 섬을 나서는 것은 언제쯤이 되겠습니까?”
“글쎄? 이것저것 고려해 보면 넉넉하게 2, 3년쯤은 걸리지 않을까?”
그리 중얼거린 무야호가 삼백안을 날카롭게 떴다.
“생각해보니 수컷, 특별한 일이 없다면 네 녀석을 다시 만나는 것도 앞으로 2, 3년 후라는 말이 되는군.”
이어 러셀의 전신을 훑으며 말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열심히 노력해 두라고. 그때는 백 합 정도는 즐겨 볼 수 있도록 말이야.”
벌써부터 그때가 기대된다는 듯.
투지를 불태우는 무야호의 모습에 러셀은 그저 고소(苦笑)할 따름이었다.
* * *
지난 사십일 간, 펜릴의 수인들과 꽤 많은 친분을 다졌기 때문인지.
그렇지 않으면 ‘월력석’을 찾아다 준 은인이었기 때문인지.
떠나는 러셀을 배웅하기 위해 나온 수인족의 수는 꽤 많았다.
어젯밤 이야기를 나눈 무야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걸 가져가라. 수컷.”
목책을 세워 만든 펜릴의 정문.
그 앞을 가득 채울 정도로 모여든 수인들의 선두에서 무야호가 무엇인가를 러셀에게 건넸다.
“이건……?”
꽤 날카로워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짐승의 송곳니를 꿰어 만든 목걸이였다.
러셀이 그것을 건네받자, 무야호가 자신의 입술을 위로 까뒤집었다.
텅 비어버린 송곳니 자리를 내보이며 말했다.
“흐언 내 홍홋니로 만흔거히다. 흐컷.”
“예……?”
“내 송곳니로 만든 물건이라고.”
까뒤집었던 입술을 내리자 목소리가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뭐, 특별한 힘이 있는 건 아니고, 그게 있으면 돌아가는 동안 다른 수인족들이 네게 시비 걸지는 않을 테지. 그 외에 특별한 기념품 하나를 가져간다 생각해도 좋고.”
마음 씀씀이는 고맙다만, 어쩐지 텅 비어버린 무야호의 송곳니 자리를 떠올리며 러셀이 되물었다.
“이빨을 이렇게 막 뽑아도 되는 겁니까?”
무야호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때. 조금만 기다리면 다시 날 텐데.”
영구치가 빠지면 두 번 다시 이가 나지 않는 인간과는 달리, 수인족은 이를 뽑더라도 몇 번이고 다시 자라나는 모양.
‘그렇다면 다행이고.’
러셀이 목걸이를 거는 것을 확인한 무야호가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쳤다.
“그럼 잘 가도록 해. 수컷. 나랑 했던 이야기, 잊지 말고.”
“저도 무야호님과 수인족 분들을 다시 뵙는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손을 흔들어대는 수인족들의 인사를 뒤로하며, 러셀은 빠른 속도로 쿠릴 아일랜드의 정글을 주파했다.
파바바밧-!
처음 안쪽으로 들어갈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
그럴 수밖에.
처음에는 이름을 알리기 위해 여러 수인족들과 일부러 전투를 벌이며 들어갔으니까.
게다가, 무야호가 건네준 이빨 목걸이 때문인지. 딱히 전투를 걸어오는 수인들 역시 없었다.
파밧-!
그렇게 순식간에 정글을 벗어난 러셀은 어렵지 않게 섬 밖으로 나가는 상선을 얻어 탈 수 있었고.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흘러-.
우우우웅.
염탑의 워프 게이트 밖으로 빠져나오며 러셀이 로브의 옷깃을 여몄다.
열어둔 창문을 통해 조금 쌀쌀해진 바람이 흘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하긴, 그럴 만도 한가?’
쿠릴 아일랜드에서 보냈던 두 달의 시간에, 오가는데 걸린 시간을 합치면 약 넉 달.
‘계절 하나를 통째로 건너뛴 시점이니.’
따뜻한 남부의 섬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왕도로 돌아오니 겨울이 성큼 다가온 것이 체감이 되었다.
꽤 오래 왕도를 비웠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러셀은 마탑의 꼭대기, 탑주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왕국의 국경에서 첫 번째 워프 게이트를 이용한 시점부터, 자신이 돌아왔다는 것은 보고가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마주 보고 인사를 드리는 것이 스승에 대한 예의였던바.
우우웅, 띵-.
부유석을 타고 최상층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탑주실의 문이 열린다.
덜컥-.
그와 함께 다리아 집무실 특유의 달큰한 냄새와 함께 홍차향이 뿜어져 나오고.
‘또 티타임을 즐기고 계신가보군…….’
무심코 집무실로 발을 들이려던 러셀이 멈칫했다.
“……왔구나. 그대여.”
전혀 예상치 못한 이를, 다리아의 집무실에서 맞닥뜨렸기 때문이었다.
이지적인 보랏빛 눈동자에 그와 같은 색의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왕녀라기보다는 기사에 가까운 복장을 한 여인.
엔디미온의 제1 왕위 계승자이자, 자신의 약혼녀.
헤카테 라트모스가 무감각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뒤이어, 친근한 웃음소리와 함께 다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가선 기별 한 번 주지 않던 무.정.한 막내 녀석이 드디어 돌아왔구나.”
지금의 이 상황이 재미있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장난기가 잔뜩 어린 음성.
‘무정한’이라는 말이 가슴에 콕콕 박혔다.
‘윽.’
용을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