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id RAW novel - Chapter 59
0058 그 냥의 하루
내가 동물들에게 연기를 가르치는 사이, 연희 아줌마는 알고 있는 작가 인맥들을 통해 몇 개의 시나리오를 가져왔다.
“일단 이 중에서 촬영할만한, 사장님이 생각하기에 동물들이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시나리오를 좀 골라주시겠어요? 아, 이게 완성된 시나리오는 아니라는 것도 조금 감안해주세요. 아무래도 아는 사람들에게 부탁하긴 했지만, 제작 확정이 돼야 페이 지급이 되니까 완성도가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거든요.”
“으음……. 한 번 볼게요.”
나는 곧장 몇 개의 시나리오 뭉치를 바라보았다.
‘행복하게 해줄 개? 오……. 사람이 개로 환생해서 사랑하던 사람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내용이네? 나쁘지 않은데…….’
가장 처음으로 본 시나리오는 내용 자체만 보자면 꽤 괜찮은 편이었다.
아픈 동생을 위해 헌신한 누나의 노력에도 죽음을 맞이한 동생. 그 동생이 개로 환생해서, 슬픔에 빠져 있던 누나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내용이었다.
드라마로 쓰기에는 딱- 좋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바로, 동생이나 누나. 그리고 그 외의 기타 등장인물들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등장동물이 아니라, 등장인물이 필요한 시나리오는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건 나중에, 따로 기회가 되면 만들어 보는 걸로 해야겠네요. 아무래도 처음부터 연기자를 쓰기엔 좀…….”
“네. 그러면 그건 따로 킵해놓으라고 할게요.”
연희 아줌마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아직 여러개가 남아 있는 시나리오를 하나씩 확인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현 상황에 쉽게 촬영할 수 있고, 괜찮아 보이는 시나리오 하나를 선택했다.
“그 냥의 하루. 이걸로 할게요. 따로 연기자를 쓸 필요가 없는 시나리오가 지금 당장은 이거 뿐이네요. 다큐 형식에 가까운데다 내레이션이 있긴 한데……. 내레이션은 제가 하면 되는 거니까요.”
“네. 연락해서 시나리오 완성하라고 해둘게요. 완성되면 알려드릴테니, 기다려주세요.”
“잘 부탁드릴게요.”
연희 아줌마는 자기만 믿으라는 듯이 엄지를 척! 들어올리며 다시금 3층으로 사라졌다. 계단을 올라가며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모습을 보면 그 시나리오 작가를 사람에게 전화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때 ‘그 냥의 하루’의 시나리오가 완성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시나리오가 완성되자마자, 그 시나리오대로 촬영을 시작했다.
○ ◑ ● ◐ ○ ◑ ● ◐ ○
“남캣은 오늘도 자신만의 일과를 보냅니다.”
나는 미리 촬영 된 영상을 보며, 내레이션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이미 영상 자체는 모두 찍어둔 상황이었기에 만들어진 영상에 내가 내레이션을 입히는 수준으로 영상을 마무리하면 되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스타트를 끊은 나는 다음 화면을 보며 미리 써져 있는 대본과 약간의 애드립을 섞어 내레이션을 이어갔다.
“남캣이 하루를 시작하는 건 이른 아침. 새벽녘입니다. 원래 고양이들은 야행성이지만, 함께 사는 사람들의 영향으로 주행성으로 바뀌어 있죠.”
실제로, 남캣은 대화가 통하는 나와 살기 시작하면서 야간 보다는 낮에 깨어 있는 타입으로 바뀌어 있었다.
“새벽녘에 잠에서 깬 남캣은 밤 사이 집에 별 일이 없었는지 둘러봅니다. 그 와중에, 제 앞을 가로막는 것들은 가차없이 밀고 지나갑니다.”
“끄앙!”
쿨쿨 자던 도중 남캣에게 짓밟히게 된 치킨이가 찡얼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물론, 남캣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서 걸음을 옮겼다.
“집을 한 차례 둘러본 남캣은 그대로 담벼락을 타고 넘어갑니다. 부엉이도 이기고, 군견과도 맞먹을 수 있는 녀석에게 담벼락 따위는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남캣은 정말 담벼락을 타고 집 밖으로 빠져나갔었다. 설치해둔 CCTV로 미리 확인하여 알고 있던 것이 아니었더라면 엄청 놀랐을 장면이었다.
“담벼락을 타고 집 밖으로 빠져나간 남캣은 집과 카페 주변 역시 한 차례 둘러봅니다. 앗, 그런데 그 때 주변을 지나가던 길고양이 한 마리를 마주칩니다.”
“넌 뭐냐. 안 꺼져?”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죠. 자기 영역을 침범당했다고 여긴 남캣은 가볍게 하악질을 하며 길고양이를 위협합니다. 하지만 남캣의 힘을 알지 못하는 길고양이는 겁도 없이 남캣을 향해 이빨을 드러냅니다.”
“너나 꺼져.”
“안 되겠네.”
“서로가 이곳을 영역이라 주장하는 두 고양이들은 결국 격돌하게 됩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상 속 남캣은 길고양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녀석은 제게 마주 달려오는 길고양이의 냥냥펀치를 가볍게 피해내며, 그대로 녀석을 두드려 팼다.
“길고양이는 남캣에게 너무나도 손쉬운 상대였습니다. 결국, 길고양이는 꼬리를 말고 호다닥 도망치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죠.”
“별 것도 아닌 게 까불긴.”
“늘상 있는 승리였지만, 남캣은 기뻐하며 평소보다도 도도한 발걸음으로 마저 순찰을 돕니다. 길고양이 외의 특이사항을 발견하지 못한 남캣은 다른 이들이 잠에서 깨어날 때 즈음 다시금 집으로 돌아갑니다.”
남캣은 아주 약간의 도움닫기만으로 담벼락을 타고올라가, 다시금 집 안으로 들어왔다.
담벼락을 타고 넘는 사람을 방비하기 위한 구조물이 있었지만 남캣을 막는데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왔어요?”
“남캣이 집으로 돌아오니, 어느 새 깨어난 폭신이가 남캣을 맞이합니다. 강한 힘을 가진 남캣이라 호감을 가진 건지는 몰라도, 폭신이는 남캣에게 무척 살가운 반응을 보입니다.”
실제로 폭신이는 남캣을 좋아하고 있었다. 남캣도 폭신이가 남캣을 좋아하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꽤나 호감을 보이고 있었다.
“남캣은 자신을 맞이해주는 폭신이와 가볍게 몸을 부비고, 서로를 그루밍 해줍니다. 두 고양이는 집안의 유일한 네발짐승 커플이죠.”
사람이 하는 것이었다면 바로 19금을 박아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서로를 핥아준 두 녀석이었다.
“몸단장을 마친 남캣은 다른 동물과 함께 직장으로 출근을 합니다. 바로 옆의 카페가 남캣의 직장이죠. 그곳으로 들어간 남캣은 로비의 중앙에 위치한 테이블로 향합니다. 그곳에 남캣의 최애 쿠션이 있기 때문이죠.”
“으음.”
“쿠션을 이리저리 밟으며 앉기 딱 좋게 만들어낸 남캣은 방석에 몸을 말아 앉으며 스스로 만족합니다.”
영상에 담긴 남캣은 정말 스스로의 행동이 마음에 드는 듯이 살짝 미소 짓는 듯한 모습까지 보였다.
“그리고, 그 때 카페에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손님들은 입구에서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간식 자판기에서 동물들의 간식을 구매합니다.”
“내놔.”
“남캣은 간식 자판기에서 간식을 구매해, 음료를 구매하기 위해 카운터로 향하는 사람들을 하나씩 붙잡습니다. 남캣이 자리를 잡은 곳이 카운터와 간식 자판기의 사이였기에 모든 사람들이 남캣에게 붙잡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 통행료.”
“손님들은 남캣에게 통행료로 간식을 지불하고서 카운터로 향합니다. 순식간에 간식 한 줌을 얻어낸 남캣은 행복한 모습으로 간식을 재빨리 해치웁니다. 음료를 주문한 손님들이 방해하기 전에 간식을 모두 먹을 속셈이죠.”
간식을 해치운 남캣은 제게 다가오는 몇몇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간식을 먹는 도중이었다면 짜증냈겠지만, 이미 간식을 해치운 상태였으니 까칠함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애교를 부리는 것으로 맛있는 것을 얻어낼 수 있음을 알고 있는 남캣은 제게 다가온 손님들에게 간식을 요구합니다. 그렇게 애교를 부리며 충분한 간식을 확보해 포만감을 느낀 남캣은 다시금 어슬렁거리기 시작합니다.”
배를 채우고 어슬렁거리기 시작한 남캣이 향한 곳은 잔디밭이었다.
“새대가리. 잠깐 몸 좀 풀까?”
“……그대와는 싸우지 않을 거요. 난 이미 포기했소.”
“아 그러지 말고.”
“저기 가서 그대보다 더 강한 청호와 싸우시게.”
“남캣이 유부에게 대련을 요청하지만, 유부는 그런 남캣을 거부합니다. 군견 출신인 청호와의 대련을 목격하고 완전히 의욕을 잃었기 때문이죠. 덕분에 남캣은 무척 아쉬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청호와의 대련은 적당히 할 수 없기 때문에 무척이나 고된 일이었으니 말입니다.”
매일같이 치고받던 유부와는 다르게, 청호와의 싸움은 주에 한 번 정도였다.
몸풀이처럼 할 수 있는 유부와의 대련과는 다르게,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야 하는 청호와의 대련은 남캣에게도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어쨌거나, 몸풀이를 할 수 없다는 것에 아쉬움을 드러낸 남캣은 다시금 카페를 어슬렁거렸다.
이래저래 얻어맞은 기억이 있는 거위들은 남캣을 피했고, 토끼들은 포식자의 기운을 느꼈는지 옹기종기 모여 오들오들 떨었다.
그렇게 하루동안 카페를 어슬렁거리고, 사람들에게 간식을 받아먹는 영상이 잠깐 이어졌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영상이 휙휙 넘어가더니 저녁 시간이 됐다.
“저녁이 되자, 남캣은 집의 구석으로 향합니다. 바로, 폭신이와의 비밀 데이트를 위해서죠.”
남캣이 먼저 좁은 곳을 통과해, 쉽사리 접근하기 힘든 구석진 곳으로 이동했다. 잠시 후 그 뒤를 따라 폭신이가 도착하며 둘만의 연애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남캣과 폭신이는 그루밍을 해주며 서로에 대한 애정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잠시동안 애정을 드러내던 남캣이 갑자기 움직입니다. 바로, 자신의 암컷을 위해 맛있는 것을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폭신이를 살짝 떼어놓은 남캣은 곧바로 주변을 살피더니 집 안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주방 근처에서 널부러져 있는 두 마리의 라쿤에게로 다가갔다.
“뭐고?”
“간식 좀 꺼내봐.”
“……맡겨놨나?”
“훔쳐봐. 내가 망 봐줄게.”
“진짜가? 니가 왠 일이고?”
“시끄럽고, 빨리.”
남캣은 두 마리의 라쿤을 포섭하더니, 두 마리의 라쿤이 주방을 뒤지기 시작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암컷에게 간식을 주기 위해 라쿤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간식을 함부로 훔치지 못하게 막는 인간들을 저지하고, 그런 인간들의 하수견인 청호의 접근을 차단하는 역할까지 맡았습니다.”
혹시라도 나나 누나 혹은 청호가 접근하는 것을 경계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녀석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라쿤들이 서랍을 열고 그 안에 들어 있는 간식들을 털어낼 때 까지 나나 누나는 물론이고 청호까지도 그 녀석들에게 접근하는 일은 없었다.
물론, 짜여진 대본대로 나타나지 않은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라쿤들과 협업하여 간식을 얻어낸 남캣은 그 간식을 물고서 폭신이에게로 향했습니다. 남캣은 그곳에서 맛있는 것을 가져온 수컷을 기쁘게 맞이하는 폭신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남캣은 해가 완전히 지고, 짙은 어둠이 내려앉을 때 까지 폭신이와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것을 끝으로 짤막한 다큐나 다름없는 영상 ‘그 냥의 하루’라는 제목의 영상이 마무리 되었다.
“수고하셨어요!”
녹음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연희 아줌마가 다가와 수고했다며, 음료 한 잔을 내밀었다.
말을 해서 건조해진 목에 수분을 공급해주니 꽤나 편안해졌다. 하지만 약간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근데, 정말 괜찮을까요? 찍고 보니까 드라마라기 보다는 관찰 예능에 가깝지 않아요?”
“뭐 어때요? 보는 사람들은 드라마라고 생각할 건데요. 그리고, 픽션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요.”
꿇릴 것 하나 없다는 듯한 연희 아줌마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남은 편집을 부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