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6
016화
* * *
돌아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많지 않은 사람 수로 등짐을 바리바리 지고 수레도 두 대나 끄는 호란 일행은 딱 좋은 표적이었다.
폭도가 된 하늘인들이 수없이 덤벼왔다.
그래도 짐을 빼앗길 일은 없었다.
호란도 맹렬히 활약했지만 추선이 그야말로 붕붕 날았다.
호란이 등에 진 짐을 내려놓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에 이미 예닐곱 명은 묵사발이 났다.
짐 지는 몫을 남들에게 다 떠넘긴 게 이 때를 위해서였다고 강변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이렇게 사람 패는 걸 잘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평소엔 어떻게 꿈적도 안 하고 온종일 경인 나으리 곁에 서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중간쯤 가니 이미 지붕 달린 외바퀴수레로 짐 나르는 것이 거석 부수는 어린 몫꾼과 흥사원관 가추선이란 소문이 도적 떼 사이에 다 돌았다.
그 후로는 습격이 거의 없었다.
거석 몇 개를 달음질로 따돌리고, 도저히 못 따돌린 한 놈은 호란이 깨부수고, 일행은 반나절이 지나기 전에 완씨 별택으로 돌아왔다.
별택에 도착한 호란은 깜짝 놀랐다.
경재가 일행을 맞으러 직접 대문 앞까지 나와 있었다.
“중한 일을 해주었구나. 모두 수고했다.”
웃으며 치하하던 경재는 사람 수가 모자란 것을 보더니 표정을 바꾸었다.
“호란이란 아이의 동생을 데리러 간다더니 어떻게 된 것이냐? 찾지 못하였느냐?”
진심으로 걱정하는 목소리에 호란은 감격하고 말았다.
매정하기만 한 줄 알았던 경인 나으리께서 하란이를 이렇게 걱정해주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추선이 답했다.
“아이는 피난민 일행과 함께 있다 합니다. 한돌이 데리러 갔으니 곧 찾아내 무사히 보호할 것입니다.”
“다행한 일이다.”
“무얼 여기까지 나오셨습니까. 돌보실 일이 많사오니 어서 안으로 드소서.”
추선은 이상하게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대문 안으로 들자마자 추선은 수하 두 사람에게 가져온 짐을 내려놓고 끄르라 명했다.
두 장정이 각자 짐을 붙잡고 끈을 풀기 시작했다.
그 등 뒤에서 추선이 스윽 손을 들어 올렸다.
꽈드득.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수하 하나의 목이 부러져나갔다.
뒤늦게 살기를 느낀 다른 하나가 황급히 저만치 물러섰다.
동료의 목을 쥔 추선을 보고 상황을 깨달은 그가 귀신같은 얼굴로 덤벼들었다.
“이….”
그는 뱉으려던 욕설을 끝맺지 못했다.
삽시간에 대문 안에 시체 두 구가 누웠다.
다들 황겁한 가운데 추선이 경재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마님, 어서 피신하실 준비를 하소서. 모든 것이 소인의 죄입니다.”
경재가 조용히 물었다.
“이놈들이 무엇을 하였느냐?”
“종들이 다 고해 바쳤습니다. 제가 작은 어른 행장을 준비하는 틈을 타서 한 놈이 별택 위치를 바깥에 발설했다 합니다. 작은 어른께서 곧 먼길 떠나실 거란 이야기까지 흘러나갔습니다.”
“…….”
경재가 분노로 부들부들 떨었다. 보기 좋은 이마에 힘줄까지 돋았다.
추선이 계속 말했다.
“오는 길에 도적 떼가 무수히 왔으나 모두 쭉정이뿐, 내군서 힘깨나 쓴다던 놈은 한 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무리를 짓고 일을 꾸미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변이 닥치기 전에 먼저 움직이셔야 합니다.”
경재는 더 듣지 않았다. 종을 불러 사람을 모으고 짐을 모두 추려오게 했다.
그사이 추선은 다시 시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작은 어른, 이쪽 수레에 실린 짐이 미진하기는 하나 모두 작은 어른의 행장입니다. 은산에 수레가 갈 수 있는 길이 하나뿐이니 극히 위험합니다. 한시바삐 출발하소서.”
“알았다.”
바삐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던 경재가 안색이 변해 돌아보았다.
“허나 호위는! 그 한돌이란 이가 아직 안 돌아오지 않았느냐? 떠날 것이라면 다른 이를 더 뽑아야….”
추선이 고개를 저었다.
“마님, 부끄럽사오나 바닥에 누운 저 두 놈도 제가 나름 믿던 것들이었습니다. 세상이 뒤집히면서 양심도 도리도 다 뒤집혔으니 믿고 작은 어른께 딸려 보낼 이가 땅 위에 단 하나가 없습니다.”
그러더니 추선은 갑자기 호란을 끌어다가 경재 앞에 세웠다.
등 뒤에서 추선이 호란의 어깨를 두 손으로 강하게 짚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 호란이는! 호란이는 다릅니다! 저의 지음지기 원외군 대장 아웅의 천거를 받았고 이제껏 진정을 다하며 능력과 충성심을 보였습니다. 호란이라면 믿고 보낼 수 있습니다. 이 아이가 피와 살을 아끼지 않으며 작은 어른을 모셔 끝내 대업을 이룰 것입니다!”
경재의 눈이 촉촉해졌다. 그가 호란에게 다가와 두 손을 잡으며 물었다.
“네가 그리해 주겠느냐? 네가 진정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시문을 모시겠느냐?”
호란은 영문을 몰랐다. 상황이 하도 정신없이 변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추선이 밑도 끝도 없이 자기를 추켜올리는 것도 이상했고 어디에 보낸다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시문을 모시겠냐는 말만은 알아들었다. 호란은 얼른 대답했다.
“예! 시문 님을 위해선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고맙구나….”
경재가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네가 그리해 준다면. 네가 문을 보필하여 세상을 바로 세우고 이 땅에 법력이 되돌아오도록 해준다면. 내가 힘을 되찾는 즉시 제일 먼저 네 동생을 치료해 주마. 어떤 병이든 단숨에 나을 것이다.”
“저, 정말이세요?”
호란은 뛸 듯이 기뻐했다. 이제 동생이 몫을 할 가망이 생긴 것이다.
추선이 말했다.
“동생 일은 걱정 마라. 한돌이 무사히 데려올 것이고, 그러고 나면 네가 돌아올 때까지 우리가 잘 보살필 것이다.”
“물론이다. 내가 직접 그 아이를 거두마. 약속하마.”
경재도 덧붙였다.
호란은 감사 인사도 제대로 하고 시문 님을 모시고 어딜 가야 하느냐고도 묻고 싶었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이미 다들 이리저리 움직이며 피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추선이 바닥에 놓인 등짐에서 커다란 자루 하나를 꺼내서 단 앞에 내던졌다.
와르르 철커덕 자잘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네가 말한 대로 네놈 집에서 무슨 도구나 걸낭 비슷하게 생긴 것은 모조리 쓸어 담아 왔다. 빠진 것이 있어도 나는 모른다.”
단이 굽신거렸다.
“감사합니다, 나리. 덕택에 살았습니다요.”
단은 자루를 들어 올려 수레로 가져가려 했다.
안에 무거운 게 많은지 영 힘에 부쳐 보여 호란이 대신 들어주었다.
호란이 자루를 들고 수레로 다가가자 마지막으로 행장을 점검하던 추선이 일렀다.
“앞쪽 한 간은 윗전께서 드실 것이니 짐은 뒤쪽에 실어라. 단 녀석은 맨 앞 난간 있는 곳에 앉혀 길잡이를 하게 해라. 아 참, 그렇지. 너 외바퀴수레를 몰아본 적이 있느냐?”
“몇 번 있어요.”
하늘인이 못 짊어질 무게는 별로 없지만 그래 봐야 팔은 두 개뿐이라 부피가 큰 짐은 주로 외바퀴수레로 날랐다.
좌우 중심이야 힘으로 잡으면 되고, 길이 닦이지 않은 땅이나 산길은 바퀴가 하나인 쪽이 훨씬 다니기 수월했다.
추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레가 달리는 동안 위께서 최대한 편히 계시도록 주의를 기울이거라. 속도를 줄일 때는 비틀거리지 않게 양팔에 힘을 주어야 한다. 출발할 때와 멈출 때 버팀쇠 올리고 내리는 것 잊지 말고.”
시간 없다던 추선은 그 외에도 잔소리를 한 아름 덧붙였다.
그사이 한쪽에서는 경재가 시현을 붙들고 당부의 말을 잇고 있었다.
이야기 끝에 경재가 굵은 노리개를 하나 꺼내들었다.
비취 박힌 금제 향갑으로 패물을 삼고 매듭으로 술을 늘인 단작노리개였다.
“이것은 이 어미가 온강 살 적에 절친하던 이로부터 받은 것이다. 수복을 기원하는 물건이니 항시 몸에 지녀 어미에게 작은 위안이라도 주도록 해라.”
“그러겠습니다.”
시현은 노리개를 받아들었다. 그런데 향갑 표면에 손가락이 닿은 순간 시현이 움찔했다.
그가 눈을 크게 뜨고 경재를 보았다.
“어머니….”
경재는 거의 우격다짐하듯 향갑노리개를 시현의 품에 밀어 넣었다.
그가 눈을 부릅뜨고 아들에게 말했다.
“환란의 와중에도 어미가 너를 위해, 너를 위해 가져온 물건이다. 귀하게 지니며 네 몸을 위하겠다고 약속하여라!”
시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약속하겠습니다.”
“가거라.”
경재는 아들이 수레에 오르는 것도 보지 않고 주변을 재촉해 피신 준비를 하러 안으로 들어갔다.
난중에 경재의 곁을 비우게 되자 마음이 급해진 추선까지 배웅을 서둘러, 세 사람은 도망이라도 치듯 황급히 별택을 나서게 되었다.
호란이 수레를 끌고, 단이 바로 뒤에 앉아 길을 일렀다.
“이 길은 외길이니 죽 내려가시면 됩니다. 산을 다 내려가면 그때부터 앞길을 잡아 드리겠습니다.”
“알았어.”
빠르지만 일정한 속도로 산길을 닫으며 호란이 물었다.
“그런데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예에?”
단이 큰 소리를 냈다가 황급히 목소리를 줄였다.
그가 당황해서 물었다.
“아니 나리, 아니 나리. 설마 모르고 나오셨습니까? 뭔지도 모르고 경인 나리님께 약조를 하셨습니까?”
“난 그냥 시문 님 모시라니까 모시겠다 했지. 왜?”
“지금 그 분지서 본 괴인을 찾으러 가는 겁니다. 문께서 괴인을 쫓아 변고를 해결하겠다 하셨으나… 막연한 방향만 알 뿐 어디까지 가서 무얼 해야 하는지 하나도 모릅니다요.”
그제야 호란은 길 나선 목적을 알게 됐다.
“그렇구나. 한동안은 남운관에 못 돌아오겠네.”
“하이고, 나리. 그걸 모르고 떠나셨으니 어떻게 합니까. 아직 하란 나리도 못 찾으셨는데….”
단이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호란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뭐 어때. 얘기 들어보니 어차피 내가 할 일이었네.”
“예?”
“하란인 한돌도 있고, 경인 나으리께서도 보살펴주시겠다 했고…. 어쨌든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시문 님을 모시고 괴인을 쫓아서 이변을 바로잡는 거잖아?”
“예.”
“그러니까 당연히 내가 해야지.”
단은 놀란 듯 눈을 깜박였다.
못 알아들은 것 같아서 호란은 다시 말했다.
“추선도 내가 본 중에 손꼽히는 몫꾼이지만 거석하고 싸우는 건 나만 못할걸. 별택에 있던 몫꾼 중에 몫이 가장 큰 사람은 나였어. 그러니 내가 가장 어렵고 중요한 일을 맡는 게 당연해.”
“아, 예….”
단이 좀 재미있다는 표정을 하더니 작게 소곤거렸다.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 전 또, 닳고 닳은 어르신들께서 아무것도 모르는 호란 나리를 굽고 삶는구나 하고 속으로 애가 탔지 뭡니까.”
“그땐 진짜 아무것도 모르긴 했어.”
“그래도 괜찮으시잖아요. 호란 나리는 큰몫꾼이시니까요.”
“응! 난 무얼 맡아도 몫을 하니까!”
호란이 기분 좋게 대답했다.
산길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호란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수레를 멈췄다.
내려갈수록 나무와 수풀이 적어져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산길 초입에 하늘인 남녀 십여 명이 모여 있었다.
저쪽에서도 수레를 발견했는지 위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한달음에 산을 오른 무리가 사방에서 수레를 둘러쌌다.
기세와 표정이 위협적인 게 딱 봐도 좋은 뜻으로 온 무리가 아니었다.
눈꼬리가 비열하게 생긴 여자 하나가 앞으로 나와서 호란에게 말했다.
“너 가진 것이 많네? 이럴 땐 같은 하늘인끼리 돕고 살아야지? 좀 나눠 쓰자. 네 몫도 서운치 않게 남겨 줄게.”
호란은 수레채를 놓고 앞으로 나섰다.
하마터면 수레가 기울 뻔했으나 단이 늦지 않게 버팀쇠를 내렸다.
“이 물자는 하나도 빼지 않고 중요한 일에 쓰일 거야. 나눠줄 수 없어.”
호란이 거절하자 여자의 어조가 위협적으로 변했다.
“너 아주, 지금이 평시인 줄 아나 본데….”
“됐어, 됐어. 물러나라. 그 꼬맹이는 네가 상대할 애가 아니야.”
무리 사이에서 걸어나온 것은 내군 이직… 뭐더라 갈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