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71
171화
* * *
“몫꾼들이 도망갔다고? 너희를 남겨두고 간 거야?”
소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같이 살던 반민 주민들을 놔두고 도망친 하늘인 무리는 전에도 보았다. 지금 마을에 보이는 주민도 반절은 반민이었다.
하지만 소영과 다른 하늘인들은 왜 남겨진 걸까? 자진해서 남은 걸까?
신경이 쓰였지만 소영은 물론 앞뒤에 줄 선 마을 사람들도 다들 이 화제를 꺼리는 표정이었다. 호란은 나중에 분위기를 봐서 다시 묻기로 마음먹었다.
소영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너랑 너네 나으리는 하방에서 왔지?”
“맞아. 우리 옷 보고 안 거야?”
호란은 작은 고름으로 여며진 제 웃옷을 내려다보았다. 다천관 속령을 벗어나 북방으로 접어든 뒤에는 확실히 중부식 옷 입은 사람을 거의 못 봤다.
“옷만 갖고는 모르지. 이 동네서도 하방 옷 많이 입어. 특히 유행 찾고 멋 내는 사람들이…. 근데 너네는 그런 사람들이랑 좀 달라 보여서.”
“중부 옷이 유행이야? 북쪽 옷도 멋있는 거 같은데.”
“중부가 이 동네보다 더 잘살게 된 지 한참 됐으니까. 여튼.”
소영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이 동네 관리 나리도 아니고. 호위가 적은 걸 보면 북쪽 광산에 마력석 구하러 온 사람 같지도 않고…. 이 망해가는 동네를 뭐하러 다니는 거야?”
“어, 그건….”
호란은 말을 해도 되는지 몰라서 잠깐 주저했다. 그의 망설임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소영이 황급히 덧붙였다.
“이, 이상한 생각으로 물어보는 거 아냐! 우리 나쁜 생각 하나도 없어. 너네 연고지가 멀다고 해서 밤중에 습격한다거나, 만만한지 떠보고서 뭘 슬쩍한다거나, 그런 짓 절대 안 할 거니까!”
“…그런 걱정 안 했어….”
호란이 어색하게 말했다. 소영도 자기가 말해놓고 망연자실해졌다. 서로 민망해진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호란이 물 길을 차례가 오자마자 소영이 나서서 밧줄을 턱 잡고는 두레박을 휙 끌어올렸다. 호란이 사양할 틈도 없이 통에 물을 부어주면서 소영이 중얼거렸다.
“궁금해서 그랬어. 너네 나리 보통 분 아니잖아. 누가 이런 때 우리 같은 놈들 좋으라고 마력석까지 써서 수맥을 살려 줘? 그냥, 누구길래 그러는지 알고 싶어서.”
해 기우는 산속 마을은 빠르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래도 소영의 얼굴이 뻘개진 건 훤하게 보였다.
호란이 말했다.
“응. 오해 안 해. 고마워서 물어봤다는 뜻이지?”
“그게 그렇게 되나? …응.”
“우리도 너네 의심해서 숨기는 거 아니야. 소문이 많이 나면 안 좋을 수도 있어서 조심하는 거야. 나으리한테 한번 말해볼게. 네가 궁금해하더라고.”
“아니야! 진짜 괜찮아. 그냥 엄청 고마워한다고만 말씀드려줘!”
소영이 사양하면서 다시 물을 부었다. 물통이 꽉 차자 둘은 마을 중심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집에 비해 남은 사람이 적어서 주민들은 대개 마을 중심부에 모여서 지내고 있었다.
“너네 나리 거처는 광장서 좀 떨어진 데로 정했어. 시끄럽지 말라고. 그래도 번 서는 사람 눈 다 닿는 데니까 밤에 안심하고 자도 돼.”
“응. 고마워.”
“다시 말하지만 너네 나리 덕택에 진짜로 살았어. 식량은 꽤 모았지만 물 때문에 여길 떠나야 하나 했거든. 지하수위가 올라왔으니까 농사도 지을 수 있을지 몰라. 반민 노인네 하나가 그러는데 아직 가을보리 파종하기 안 늦었대….”
짧은 동안에도 소영은 들뜬 음성으로 이것저것 떠들었다. 호란도 기꺼운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다.
주위는 이미 컴컴했다. 그래도 마을 공터와 그를 둘러싼 인가에는 여기저기 불이 밝혀져 있었다.
가장 불이 밝은 곳은 마을 가운데의 공터였다. 주거뿐 아니라 식량도 함께 관리하는지 사람들이 잔뜩 모여 큰 솥 여럿에 밥을 짓고 있었다. 다들 표정이 밝았다.
훈김이 도는 공터를 뿌듯한 얼굴로 바라보는 소영을 남겨두고 호란은 마을 안쪽에 마련된 시현의 거처로 들어갔다.
밥 지을 물을 늦게 가져왔다고 단에게 핀잔을 듣지 않을까 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이미 마을 사람들이 나으리랑 드시라고 이것저것 음식을 가져온 뒤였다.
거친 나물에 군고구마, 밀개떡이 한데 올라온 근본 없는 차림이었지만 사람들의 성의가 느껴졌다.
일을 멈추는 때도 잘 없지만 제 일손을 덜 기회를 놓치는 법도 없는 단은 덥석 받아다가 그대로 저녁상을 갈음했다.
“어째 받기가 미안하구나. 식량 사정은 우리가 훨씬 넉넉할 터인데.”
상 앞에서 시현이 망설이자 단이 냉큼 말했다.
“이 정도는 그냥 받으십쇼. 주기만 하고 받지 않으면 그것도 원망 삽니다.”
“그것은 그렇다마는.”
“단 말이 맞아요. 물이 생겼다고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거절하면 오히려 섭섭해할 거예요.”
호란은 뒤이어서 소영이 기뻐하고 고마워한다든가, 농사지을 생각을 하고 있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재잘거렸다.
시현은 기꺼운 기색으로 듣고 있었지만 농사 이야기가 나오자 설핏 얼굴을 흐렸다.
“백성의 농사짓기는 당연히 격려할 일이나 염려도 되는구나. 적어도 반년은 지역에 안정이 보장되어야 수확을 기대할 텐데. 수맥은 보했으나 마을에 사람이 너무 적어 보인다. 수원에 이끌려 거석이 찾아왔을 때 잘 막아낼 수 있을지.”
“그건 그래요.”
“일단 인구부터 늘릴 필요가 있겠구나. 이 주위에 떠도는 유민이 많으니 수원이 살아났다 알리면 자연히 사람이 모여들 것이다.”
“방랑족은 안 돼요!”
호란이 단호하게 주장했다.
“피난민을 모으는 건 좋아요. 하지만 물 있고 사람 적다고 소문 나면 방랑족부터 꼬일 거예요. 아무나 잘못 받아주면 큰일 나요!”
“그걸 그렇게 딱 잘라서 구분할 수가 있나? 방랑족이나 피난민이나, 어차피 갈 데 없이 떠돌아다니기는 똑같은데.”
단이 말했다. 하지만 호란은 강경했다.
“완전 다르지. 변고 때문에 마을 잃은 피난민하고, 원래부터 제 삶터 없이 강도질이나 하고 떠돌아다니던 놈들하고 어떻게 같아? 약탈하고 뺏는 데 한번 맛 들인 녀석들은 버릇 못 고쳐.”
“흠. 하긴 뭐. 그것도 대체로는 맞는 말이지.”
단은 굳이 반박하지 않고 화제를 바꿨다.
식사가 끝난 후 호란은 상을 내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바깥에서 후다닥 누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쾅 소리와 함께 널문이 열렸다.
“저기, 나리, 나리님, 큰몫꾼님….”
문 앞에 선 것은 아까 물을 뜰 때 호란 앞에 서 있었던 하늘인 남자아이였다. 아이가 당황한 얼굴로 횡설수설했다.
“놈들이 왔어요. 너무 잔뜩 와서…. 우리더러 마을을 나가라고, 혹시 도와, 도와주실 수 있으면….”
호란은 더 말을 듣지 않고 집을 뛰쳐나갔다.
아까만 해도 화기애애하고 떠들썩했던 마을 광장이 텅 비어 있었다. 대신 멀찍이 마을 입구에 사람이 모인 것이 보였다. 어둠속에서 사람들이 든 횃불이 타올랐다.
한달음에 입구로 달려가니 마을 앞에 기세 흉흉한 하늘인 무리가 몰려와 있는 것이 보였다. 숫자가 거진 백에 달했다.
하지만 마을 입구 앞에 팔짱을 끼고 선 소영은 조금도 겁먹는 기색이 없었다. 그가 삐딱하게 말했다.
“제대로 한 판 뜰 용기도 없는 새끼들이. 한 발짝만 더 와 봐. 어떻게 되는지 보게.”
“쓸데없이 피를 봐야겠나? 숫자 차이를 봐라. 그냥 물러나는 게 너희 무리한테도 살 길이야.”
몰려온 하늘인 무리 중의 한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호란은 무리 맨 앞에 선 수염 거한과 몇몇의 얼굴이 눈에 익다는 걸 깨달았다. 숫자는 훨씬 늘어났지만, 분명 오전에 소영네 수레를 습격했던 무리였다.
호란은 기가 막혀서 입을 딱 벌렸다. 저 자식들, 여기까지 쫓아왔어? 그것도 떼거리를 더 늘려서?
소영이 침을 탁 뱉었다.
“숫자 앞세우는 거밖에 못하는 쫄보 새끼들이. 꺼져. 마을은 절대 못 비워줘.”
수염 거한의 눈빛이 어둡게 불탔다. 그가 한 걸음 내딛으며 말했다.
“건방진 애송이. 내가 네 시체를 마을 밖으로 못 내던질 거 같으냐?”
“야, 염치없는 놈들아!”
호란이 소영 앞으로 뛰쳐나오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호란의 기세를 알아봤는지 수염 거한이 멈칫했다. 하지만 그의 등줄기에 어린 살기는 흩어지지 않았다.
호란은 이런 분위기를 알았다. 놓아두면 바로 목숨이 오고갈 상황이었다. 잘한 놈이든 잘못한 놈이든 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유혈 사태를 벌이게 놓아둘 수는 없었다.
호란은 놈들의 야코를 죽일 생각으로 쩌렁쩌렁하게 고함쳤다.
“방랑족 놈들이 어디서 숫자만 믿고 남의 마을을 뺏으려고 들어?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그런데 일순 주위가 침묵에 빠졌다. 조용하다 못해 싸한 분위기였다.
생각과 다른 반응에 호란이 당혹하는데 앞의 무리가 고함과 욕설을 터뜨렸다.
“누구더러 방랑족이래!”
“방랑족은 너네잖아, 이것들아!”
“소릿골은 원래 우리 마을이야!”
“진짜 죽을래!”
호란은 무심코 소영을 돌아보았다.
팔짱 낀 자세 그대로 서 있던 소영이 툭 쏘아붙였다.
“그래. 우리가 방랑족이다. 보태준 거 있어?”
“어? 하지만… 어?”
소영의 말투도 눈초리도 쌀쌀맞았다.
호란은 상황을 다 파악 못 하고 더듬거렸다.
소영은 더 이상 호란을 보지 않고 몰려온 하늘인 무리를 향했다. 그가 빽 소리쳤다.
“원래고 뭐고, 너네는 마을이고 우물이고 여기 살던 반민 놈들이고 다 버리고 산으로 도망쳤잖아! 한번 도망쳤으면 끝이지 무슨 염치로 돌아와!”
도망쳤다는 말에 상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수염 거한이 마주 고함쳤다.
“닥쳐! 남이 수십 년을 일군 마을에 빈집털이 들어온 주제에!”
“빈집털이 아니야! 너네 도망친 사이에, 우물 묻으러 온 거석을 우리가 두 번이나 몰아냈어. 우리가 지킨 수원이니까 우리 거야!”
“어거지부리지 마!”
수염 거한과 함께 온 사람들이 한꺼번에 아우성쳤다. 수염 거한과 같이 온 중년 여자 한 사람이 억울한 듯 외쳤다.
“우리가 거석이 무서워서 도망쳤냐? 관군 놈들 피해서 잠시 떠난 것뿐이잖아! 뻔뻔한 방랑족 새끼들이, 다 알면서 마을을 통째로 가로채러 들어?”
“맞다!”
“이래서 방랑족이란 것들은!”
“죽일 놈들, 더 안 참는다!”
분위기는 아까보다 더 험악해졌고 호란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다행히 마을 쪽을 돌아보니 무리 사이에서 호란이 기다리던 사람이 나오고 있었다.
“멈추어라.”
시현이 대치한 사람들 한가운데로 걸어나오면서 또렷한 소리로 말했다. 서로 대거리하던 하늘인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시현이 양쪽을 보며 다시 말했다.
“양쪽 모두 소요를 그만두고 혈기를 가라앉혀라. 사방에서 거석과 돌 인간이 사람을 해치는데, 산 사람끼리 무익한 싸움을 벌여서 되겠느냐.”
시현이 나타나자 새로 온 하늘인 무리는 그야말로 경악했다. 수염 거한이 부들부들 떨면서 소영을 손가락질했다.
“이 자식들, 하다하다 마을에 관인을 끌어들였냐! 설마 우릴 끌고 가게 하려고….”
“아니다.”
시현이 바로 말을 끊었다. 그가 몰려온 사람들 쪽을 향해 섰다.
“양쪽의 이야기를 들어야겠다마는, 먼저 너희에게 묻겠다. 뒤에서 들으니 너희는 원래 이 마을 주민들로 관군을 피해서 마을을 떠났다고 하던데 사실이냐?”
“…….”
사람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건장한 데다 숫자까지 많은 하늘인 무리가 답지 않게 겁에 질린 표정으로 바삐 눈치를 주고받았다.
시현이 다시 물었다.
“나는 타지 사람이다만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이 지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느냐? 어째서 백성이 관을 꺼리고 관군을 피하느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