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93
193화
* * *
“다르지 않대도.”
“달라. 항상 일을 벌이고 싶어 하는 건 나리님이잖아. 난 잘못되면 함께 신세 조지는 게 무서워서 하는 수 없이 뒤치다꺼리하는 거고.”
단의 음성이 가라앉았다. 그가 시선을 아래로 둔 채 말했다.
“애초에… 나는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죽을 놈은 이미 다 골로 갔고, 운 좋은 놈들 몇몇 살려놔서 그건 또 뭐 하게. 요즘 같은 세상에 그 목숨줄이 얼마나 가겠냐? 반쯤은 나리님 자기만족이지.”
호란은 그냥 말없이 있었다. 호란은 이제 단이 말만 못되게 하는 데에 익숙했다.
단이 정말로 아무 의미를 못 느낀다면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시현이 하는 일을 도울 리가 없었다.
이미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말이나 태도 가지고 간섭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호란은 단이 아예 속에 없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니란 것도 알았다.
어떨 때 단은 직전까지 자신이 쏟아붓던 모든 노력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진심으로 믿는 것 같았다.
기분이 좋을 때 단은 쾌활하고 배려가 깊고 행동력이 넘쳤다. 그러다가도 지쳤거나 손이 멈춘 잠깐 사이에 예고도 없이 우울에 덮쳐지곤 했다.
처음에는 잠깐 멍하니 있나 보다 싶었던 그런 순간을 호란은 점점 더 잘 구분하게 되었다.
뭔가 말해서 기운을 북돋우려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호란은 단이 그럴 때 옆에서 그냥 기다렸다.
아마 단에게는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단이 호란에게 아직 허락하지 않는, 어쩌면 영원히 허락하지 않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언제나처럼 단의 침체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가 대청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시현의 방문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그리고, 알아? 나는 내 일만 만들지, 나리님은 나 포함 수백 수천 명한테 일거리를 만들어 던진다고. 그것도 강제로. 이게 어떻게 같냐? 내가 아주 명줄이 쪼여서 진짜. 저 인간을 어디 먼 데다 버리고 올 수도 없고!”
단은 성질을 내면서 성큼성큼 중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호란은 방금 말이 시현에게 들렸을까 걱정하며 뒤를 따랐다.
25. 흐름의 끝
대운관 본대는 내내 꾸물거리다 다음 날 정오 가까워서야 단구읍성 앞에 다다랐다.
새로 단구읍성의 치읍감 대리를 맡은 관리는 대운관군의 입성을 거부했다. 산을 면하지 않은 성 서쪽의 평야는 이미 벽명의 방랑족 무리가 차지하고 있었다.
윗전들의 기 싸움을 대신하느라 양쪽의 말단 관리가 바쁘게 성문을 드나들었다.
결국 대운관군은 성에서 거리를 두고 진을 쳤다.
시현과 대운관 어사의 만남을 위해 대운관군 진영과 읍성 사이에 거창한 막사가 올라갔다.
그사이 이 만남을 회담이라고 부를지 회의라고 부를지, 이 자리에 벽명의 방랑족 대표단이 참가하는 것을 대운관 측이 받아들일지 말지, 참가한다면 어떤 자격으로 참가할지를 놓고 또 사람들 사이에 옥신각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어렵게 성사된 회담은 시작하자마자 엎어질 뻔했다.
인사치레가 끝나고 자리에 앉은 직후, 시현이 대운관군의 민폐가 심하니 이쯤 해서 대운관으로 돌아가는 게 좋아 보인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어사 남의가 대운관을 무시하시느냐며 노발대발하는 소리가 휘장 친 너머까지 들렸다.
대기 중인 실무진을 경호하러 온 방랑족 호위가 구석 자리에 있는 단에게 가서 들릴락 말락 하게 소곤거렸다.
“문 나으리, 생각보다 막 지르는 성격이시네.”
“막 지르는 분인 것도 맞는데, 저건 긁으려고 일부러 저러시는 겁니다.”
수첩에 흑필로 무엇을 끄적거리며 단이 작게 말했다.
시현이 정말로 성격대로 했으면 당장 협약을 해지하고 철수하라고 직접적으로 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시현이 하려고 마음먹은 역할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문이시라도, 자치하는 타 관성의 관군에게 거기까지 말씀하실 수는 없습니다! 이리하여 어찌 대등한 회담이 되겠습니까!”
남의는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듯 몸까지 들썩이며 항의했다. 상대의 격에 눌리고 시작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드러나게 보였다.
시현은 짐짓 모른 척하며 물러났다.
“당장 그대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한 것이 아니다. 그쪽이 남 보기 좋아 보일 거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 정도 말이야 아무라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아무라도 말해도 되지만 당신은 안 되지! 남의가 차마 말은 못 하고 분기를 삼켰다.
그 표정을 빤하게 보며 시현이 턱을 괴었다.
“그리고 그대는, 글쎄. 좀….”
“예?”
“그대의 태도 말이다. 회의 시작부터 태도가 그래서 되겠는가?”
지금 누가 누구 태도를 이야기해? 남의는 벌써 속이 부글거렸다. 심지어 약을 올리려 작정했는지 창희가 중재역인 척 나섰다.
“회의가 아니고 회담입니다. 문이시여.”
“아, 그랬던가.”
“예. 회의라고 말하면 아무래도… 구체적인 결론이 나와야 할 것 같은 부담이 있으니까요.”
“그럼 결론을 내야지, 이렇게 자리까지 만들어서 사람들을 불러 놓고 결론을 안 낼 셈인가?”
“문이시여, 그런 것이 아니오라.”
창희가 난처하게 웃었다. 시현은 남의를 보고 물었다.
“그래서 그대의 태도가 그 모양인가? 결론이 안 나와도 된다고 생각해서?”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남의가 당혹했다.
대운관 측에서는 담판을 얼버무려 현상 유지를 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물으면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시현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알겠지만 나는 중요한 일을 앞둔 몸이다. 그대들 때문에 며칠씩 시간을 내고 있는 걸 잊지 말라. 매사를 좀 전향적으로 보라는 말이다.”
남의가 또다시 불끈 솟는 화를 참고 있는데 창희가 시현에게 어린 제자를 가르치듯 부드럽게 말했다.
“문이시여. 조금 사정을 두시지요. 길씨 남의는 타관의 대표 자격으로 나온 이입니다. 격이 아래라 해도 그렇게 아랫사람 대하듯 하시면 아니 됩니다.”
“그건 뭐…. 흠. 그럼 그건 내가 잘못했다 치겠다. 아니, 그렇게 치세.”
시현은 뚱한 얼굴이 되어 남의를 외면한 채로 말했다. 남의는 끊임없이 복장이 터져나가는 와중에도 뭔가가 잘못 돌아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불쾌한 기분을 티 나게 드러내며 시현이 말했다.
“어쨌든 그대들 얘기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다 경우에 안 맞다는 것이 아닌가. 알겠네. 일단은 자네들끼리 이야기를 해 보게. 관성의 대표자들끼리, 대등하게.”
시현은 이렇게 말하고 몸을 빼어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버렸다.
당연히 남의는 애가 탔다. 애초에 남의는 시현 때문에 이 자리에 나온 것이었다.
안 그래도 골칫거리인 정삼수는 상대하고 싶지 않았고 원래라면 상대할 필요도 없었다.
남의의 곤란을 아랑곳하지 않고 창희가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엄하고 까탈스러워 보이는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가 떠 있었다.
“분위기가 좀 어색해졌군요. 문께서 기분이 풀리실 때까지 덜 중요한 이야기라도 하고 있을까요? 예를 들어, 기존 협약문의 법리적 검토라든지.”
“아니, 그것은 이미 확정된 협약이오. 왜 새삼….”
“지금부터 논의할 문제가 협약의 실행 과정에서 일어난 난항에 대한 것이 아닙니까. 문께서는 정확한 내용을 모르시니 알려드릴 겸.”
창희가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언제 가져다 놓았는지 창희의 앞에는 주석이 새카맣게 붙은 협약문이 몇 벌이나 놓여 있었다.
창희가 정중하지만 물리칠 수 없는 태도로 남의에게 협약문을 건넸다.
문서를 받아들며 남의는 의심했다. 설마 이자들이 지금까지 짜고서 나를 엿 먹인 건가?
그것은 지금 상황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설명이었으나 남의는 좀처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시현은 여전히 토라진 얼굴로 의자에 척 기대어 남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남의는 속을 다스리기 위해 숨을 몇 번 내쉬었다.
지금 저게 연기든 아니든 한 가지는 분명했다. 완씨 시문을 일세에 무이한 도덕군자처럼 이야기하던 세간의 소문은 깡그리 거짓말이었다.
남운관의 말 좋아하는 작자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유언비어가 4년 넘게 온 세상에 범람하도록 놔두었단 말인가?
세상에 도리와 양심이 모두 죽은 땅이 있다면 거기가 남운관이었다!
어쨌든 상대의 의도대로 끌려다녀서는 안 되었다. 창희를 직접 상대하면 손해만 보겠다고 생각한 남의는 서로읍성에서 데려온 벽명관 고관 몇을 회담장에 불러냈다.
모두 회유가 끝난 이들로, 벽명관 총치총령 정씨 해인과 협약을 맺을 때부터 대운관에 협력적으로 나왔던 관인들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잘 풀리지 않았다. 남의를 상대로 예를 차리며 조곤조곤 말하던 창희는 동향 관인들을 보자 원수라도 만난 듯 난타를 시작했다.
벽명관의 법률 조문을 줄줄 늘어놓으며 법과 협약이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말하는데 논리로든 명분으로든 한 마디 반론할 사람이 없었다.
잔뜩 기세를 올린 창희는 벽명관 관인들을 몰아붙이다 못해 극단적인 말까지 쏟아놓았다.
“당신네들이 벽명관에만 해를 끼친 줄 아시는가? 당신들을 믿고 사기 협약에 조인한 대운관 어사께는 대체 어떻게 사죄를 드릴 생각이오?”
여기에는 남의도 다시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듣자 듣자 하니까, 그게 무슨 소린가? 사기 협약이라니!”
창희는 매섭던 표정을 갑자기 바꾸며 남의를 향해 웃어 보였다.
“아, 송구합니다. 어사께서는 잘 모르셨겠지요. 실은 이 협약에서 중요한 부분이 벽명관 속령의 광산들을 대운관과 벽명관이 공동으로 운영할 수 있다, 이 조항 아니겠습니까?”
말이 공동 운영이지 실제는 강탈을 위한 조항이었다. 남의는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렇소. 말해두지만 그 조항은 흔들 수 없소!”
“그것이… 말씀드리기 민망합니다만, 벽명관은 그런 협약을 맺을 권한이 없습니다. 속령 광산들의 운영권을 갖고 있지 않으니까요.”
“무슨 소리요? 광산은, 특히 마력석 광산과 그 산출물은 당연히 관의 소유가 아닌가? 그것은 16왕 때부터 국법으로 정해진 일이오!”
남의가 언성을 높였다.
이미 세상에는 왕도 나라도 없고 당연히 국법 같은 것도 없었지만, 왕의 땅이었다는 데 자긍심을 갖고 있는 대운관 사람들은 여전히 국법 운운하길 좋아했다.
창희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소유야 관의 소유이지요. 하지만 운영권은 민간에 있습니다. 벽명관에서는 선세를 받고 5년 간격으로 채굴권을 민간에 대여합니다. 현재 대부분의 광산들이 앞으로 두 해 이상 약정 기간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관에서 이중으로 운영권을 양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말이나 되는가! 대운관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오. 동네 돌아가는 꼬라지하고는! 그러니까 벽명관이 이 꼴….”
남의가 버럭 성질을 피우다가 뒷말을 삼켰다.
내내 자리만 차지하고 딴청을 하던 시현이 어느새 남의를 쳐다보고 있었다.
또 태도가 나쁘다 소리를 듣는 건 정말 참을 수 없었기에 남의는 헛기침을 하며 공연히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가 언성을 낮추고 창희를 질타했다.
“애초에 자네들이 뭐라고 이 협약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가? 자네들은 벽명관 대표가 아니야, 벽명관 대표는 여기 이 사람들, 관성의 관인들이지!”
하지만 창희 대신 시현이 툭 말을 던졌다.
“어쨌든 자리를 만들지 않았나. 이왕이니 이야기를 들어주게. 듣고 있으니 다 맞는 말 같더마는.”
“시문께서 그렇게 남의 일처럼 말씀하실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왜 제가….”
남의는 결국 솟구치는 화를 분출했다가 급히 가라앉혔다. 성질을 낼 때마다 저쪽에게 말려들고 있었다.
남의는 큼큼 소리를 내어 목청을 가다듬고 엄중한 태도를 갖추었다.
“애초에 저는 이 자리에 시문을 뵙고 여쭐 것이 있어서 온 것이지, 학자연하는 이들의 불평불만이나 들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감히 시문께 여쭙겠습니다. 듣기로 문께서 단구에 주둔한 대운관군에 영을 내려 대운관군의 군량을….”
남의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시현이 말했다.
“아…. 그거. 사실 대운관 측에 돌려주는 게 맞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남의는 하던 말을 잘리고도 반발을 못 했다. 시현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 양곡이 광산 운영을 명분으로 벽명관에서 부당 징발한 것이라 듣고 수거했네만, 나중에 알고 보니 대운관에서 보내온 양곡도 좀 섞여 있다더군?”
“섞여 있는 정도가 아니라 칠팔 할이 대운관의 재산입니다!”
“숫자는 내가 모르겠고, 여하간에, 그 부분은 오해로 일어난 일이라 나도 반환하려고 생각했는데….”
시현이 말을 질질 끄는 것을 보고 남의는 각오를 굳혔다. 의외로 잘못을 인정하나 했더니 결국 또 속 뒤집는 소리를 할 모양이었다.
하지만 뒤에 나온 말은 남의가 상상한 범위를 훌쩍 넘어갔다.
“곤란하게 됐어. 지난밤에 그 양곡이 채권자에게 압류를 당했네.”
“예?”
남의는 귀를 의심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