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82
282화
* * *
서원의 양옆에서 줄지어 내려오고 있는 것은 다천관에서 상대했던 녹회색 갑병이었다. 기운이 새어나가 읽히는 것을 막는 두꺼운 갑주, 가파른 산길에서도 빠르고 수월하게 움직이는 네 개의 다리, 공과 같이 둥글고 단단한 몸체와 마력포를 쏘는 몸 중심의 눈. 호란이 아는 상대였지만 일반 거석보다는 훨씬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숫자도 열이나 되었다.
호란은 황급히 계단 아래쪽을 향해 소리쳤다.
“다천관에서 본 갑병이 있어! 먼저 만난 감람이 부리던 것들!”
“아, 젠장.”
단은 혀를 차고 계단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사예만 똑같은 속도로 터벅터벅 걸으며 태평한 소리를 했다.
“계단에서 뛰지 말라니까.”
호란은 지고 올라온 짐을 계단 가장자리쪽에 내려놓고 갑병들을 향해 자세를 잡았다. 계단과 서원 정문 사이에는 편평하고 꽤 넓은 공터가 있었다. 싸울 공간이 있는 것은 좋았지만 적의 수가 많은 것이 문제였다. 호란 혼자는 괜찮아도 단과 사예가 다 올라올 때까지 널찍한 계단 앞을 막아서고 있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서원 앞까지 내려온 갑병들은 정문 양편에 벌여선 채 덤벼들지 않았다. 마치 무엇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호란은 싸우려고 낮췄던 몸을 세우며 활짝 열린 대문을 바라보았다. 장방형으로 넓게 뻗은 서원 뜨락 안쪽에서 흑건을 쓰고 수염과 눈썹이 새하얀 노인 한 사람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가 바로 말만 자자했던 문림 선생 윤정준일 터였다.
노인은 키가 작았지만 등이 꼿꼿하게 펴져 있고 혈색이 좋았다. 듣기로는 여든이 넘었다는데 그것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두툼한 솜옷 위에는 북방식 깃 넓은 포 대신 시현이 입는 것 같은 중부식 도포를 걸치고 있었다.
어둡고 비장한 얼굴로 대문을 넘은 노인이 호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시문께서 보냈다는 이가 너냐.”
노인은 또렷하고 듣기 좋은 음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긴장한 것처럼 목소리 끝이 떨렸다. 그래도 적의는 드러나지 않았다.
“네. 어르신이 문림 나으리세요?”
“그렇다. 내가 문림 윤정준이다. 다만 지금 나는 너는 물론 아무도 만날 수 없다. 돌아가거라.”
“그럴 수 없어요. 저희는 돌 인간에 대해서 물으러 왔어요. 지금 이 서원에 운모가 있지요?”
운모의 이름이 나오자 정준은 흠칫했지만 완강하게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돌아가거라. 돌 인간과 그에 얽힌 사정에 관해서는 때가 되면 내가 시문을 직접 찾아뵙고 고할 것이다.”
호란은 정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르신은 정말로 돌 인간들 편에 서시려는 거예요? 그게 어떤 일인지 아세요?”
“믿기 어렵겠지만 우리 귀수관이 문을 적대하게 된 것은 내 뜻이 아니었다. 후일 사정을 들으시면 문께서도 이해하실 게야.”
“그 사정을 지금 저희에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시문나으리께서 저희에게 모든 일을 일임하셨으니까요.”
계단을 다 올라온 단이 숨을 가다듬으며 끼어들었다. 그는 갑병의 숫자가 적지 않은 걸 보고 얼굴을 흐렸지만 싸움이 시작되지 않았기에 일단 정준에게 허리를 굽혀 예를 차렸다.
“완씨 시문 나으리의 심부름으로 온 권단이라 합니다. 세간에 이름 높은 문림 어르신을 뵙습니다.”
사람이 늘자 정준의 얼굴이 더 불편해졌다. 법술사의 존재를 의식하는지 정준의 시선이 호란이 바닥에 놓아둔 커다란 짐과 계단 방향을 불안하게 오갔다. 그가 고집스럽게 말을 반복했다.
“아직은 내가 무엇을 말할 때가 아니다. 돌아가라. 돌아가서 시문께 내가 조만간 스스로 찾아뵙겠다 전해라.”
“안 돼요.”
호란이 풀었던 주먹을 다시 쥐며 말했다.
정준에게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듯한 기색이 있어서, 처음에 호란은 그가 갑병에게 포위당해 서원에 연금이라도 당한 걸까 생각했다. 하지만 몇 마디 나누는 사이 정준이 두려워하는 것은 주위의 갑병이 아님을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강경하게 물러나라 명하는 그의 태도에는 양편의 갑병을 제 위세로 여기는 기색마저 있었다.
정준도 호란의 태세가 바뀐 것을 알았다. 그가 호통치듯 말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나는 돌아가라 몇 번을 말했다! 이후에 일어나는 일은 모두 너희의 책임이다!”
넓고 두꺼운 소맷자락 아래서 나타난 것은 감람이 거석을 조종할 때 쓰던 흰 패였다. 양편에 얌전히 서 있던 갑병들이 일제히 철컹 소리를 냈다.
호란은 곧바로 정준을 향해 돌격했다. 그 앞을 갑병들이 가로막으며 호란을 향해 긴 다리를 찌르고 휘둘렀다.
단도 바로 움직였다. 그는 호란이 공터 한쪽에 부려놓은 커다란 짐으로 달려가며 계단 쪽을 향해 소리쳤다.
“염병! 사예 님, 빨리 좀 오세요!”
사예는 계단을 거의 다 올라왔지만 여전히 서두를 기색이 없었다. 그래도 손에는 줄줄이 연결해 놓은 마력석 한 꿰미를 꺼내 들고 있었다.
“네가 올라가 있으니 됐잖아. 쏴 줘?”
“아니 잠깐, 잠깐요!”
단은 서둘러 자루에서 목적한 물건을 끌어냈다.
호란이 서원까지 지고 올라온 것은 꽤 육중한 청동 화포와 그물 걸낭에 든 포탄들이었다. 화포의 구경과 길이는 한때 단이 쓰던 것보다 얼마 더 큰 정도였지만 포신이, 특히 포신 하단부가 무식하게 두꺼웠다. 형태는 더욱 단순 무식했다. 격발장치나 별개의 장전구는 물론 도화선 구멍마저도 없는 가장 원시적인 전장식 화포로, 그저 손잡이와 받침쇠가 달리고 한쪽이 뚫린 긴 원통이라고 하면 정확한 물건이었다.
단은 화포 뒤쪽을 땅바닥에 버텨 두고 포구를 일으켜 갑병들 쪽으로 돌렸다. 안에는 이미 포탄이 들어 있어 쇠가 떨겅거리는 소리가 났다.
갑병들은 단을 적이라 판단하지 않았는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절반은 정준 앞을 보호하듯 막아섰고 나머지 절반은 덤벼드는 호란을 포위하려 하고 있었다. 거석인데도 판단이 꼭 사람, 정확히는 땅인 법술사 같았다. 의아한 일이었지만 단에게는 다행이었다.
“됐어요! 하나!”
포신의 방향을 맞춘 단이 소리쳤다. 사예가 곧바로 반응했다.
“꽈―앙!”
사예는 입으로 폭발 소리를 흉내 냈다. 땅인 이전에 다 큰 어른이 할 짓이 아니었으나 이번만은 단이 대신 부끄러울 필요가 없었다. 화포에서 천지를 울리는 소리와 함께 포탄이 발사됐다.
폭음은 사예의 목소리를 묻어 지우고, 발사된 포탄은 정준을 지키고자 서원 대문 앞에 서 있던 갑병 하나에 정통으로 박혔다. 두꺼운 껍질이 완전히 꿰뚫리고 충격에 떠밀린 갑병의 몸체가 대문 바로 옆 담벼락에 처박혔다.
포탄은 갑병을 박살 낼 정도의 위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몸체에 탄환이 박힌 갑병은 무언가 잘못된 것처럼 다리를 휘저을 뿐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단이 작게 중얼거렸다.
“통한다!”
단은 적의 반응을 살피는 사이에도 포에 새 탄환을 밀어 넣고 포신의 각도를 바꾸고 있었다. 포구로 들어간 것은 유선형에 끝이 뾰족한 무쇠 탄환 하나뿐이었다. 장약도 도화선도 없이 포신 안을 미끄러져 들어간 탄환이 화포 안쪽에 빈 공간 약간만을 남겨두고 걸리며 덜그렁 소리를 냈다. 단이 외쳤다.
“둘!”
“쾅!”
이제야 계단 맨 위에 모습을 드러낸 사예가 다시 소리쳤다. 두 번째 탄환이 다른 거석의 껍질을 뚫었다. 이번에 맞은 놈은 한 발로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비틀거리며 움직임이 느려졌다. 적의 허점을 놓치지 않는 호란이 다른 갑병들의 포위를 뚫고 번개같이 돌진해 다리 두 개를 날려버렸다. 그사이에도 다음 발사가 이어졌다.
“셋!”
“쾅!”
“넷!”
“쾅!”
단이 하는 일은 장전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아니었기에 겨냥을 바꾸는 것 말고는 시간이 거의 걸리지 않았다. 사예의 주문도 마찬가지였다. 포성이 울릴 때마다 갑병 하나가 나동그라지거나 비틀거렸다. 하지만 포탄의 위력은 관성 법군들이 쓰는 긴 주문에 비해 결코 모자라지 있었다.
사예는 변고 전 마법의 화력이 모자라지 않던 시절부터 포와 총을 좋아했다. 폭발이 터진 다음 뭐가 직진하는 점이 좋다고 했다. 하지만 단은 사예가 총포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이 신속함과 단순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화염 마법에서 어려운 것은 위력보다 정교함을 담보하는 것이었다. 어디로 어떻게 날뛸지 모르는 불길과 폭열을 다루기 위해 마법사들은 굉장히 많은 조건을 통제해야 했다. 손짓 한 번 단어 한두 개로 주문을 완성하는 시현이 이례일 뿐 일반적인 마법사들에게는 매번 공들인 집중과 여러 구절의 주문이 필요했다.
그 면에서 총과 포는 겨냥만 잘 하면 항상 결과가 일정했다. 다만 처음 한 발은 신속해도 재장전에 시간이 걸렸다. 단도 후장식이나 격발식 총통을 연구하며 장전 시간 단축을 시도하고 있었지만 사예의 마음에는 차지 않았다. 사예는 관리와 점화에 신경 쓸 게 많은 장약 대신 마력을 써서 탄환을 발사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벽력상단에 노비로 묶여 화포 만들기를 강요당하던 시절, 단은 사예가 요구하는 무화약 총포 개발에 시간과 정력을 소진하는 것으로 양곤호에게 소소하게 반항하곤 했다. 한 번 장전으로 다섯 발을 쏠 수 있는 연발 단총은 단이 나름 자랑스럽게 여기는 역작이었다. 하지만 ‘다 필요 없으니 튼튼하고 안 깨지게만 만들라’는 주문에 따라 만든 원시적 전장 화포로, 그것도 단 세 발로 사예가 대장석까지 때려잡은 사건은 단에게도 상처가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마법사의 기결 읽는 능력과 광기에 가까운 사예의 명중률이 합쳐진 당연한 결과였지만, 당시 단은 화포 개선 연구에 거의 의욕을 잃을 뻔했다.
어쨌거나 지금 사예 때문에 좌절해야 할 사람은 단이 아니었다. 한발 늦게 상황을 깨달은 정준이 대문 안쪽에서 목청을 높였다.
“법술사를 공격해라!”
갑병 두 놈이 말귀를 알아들은 것처럼 계단 쪽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그들이 향하는 것은 화포를 겨냥하는 단이 아니라 약간 떨어진 곳에 마력석 대련을 메고 선 사예 쪽이었다. 사예는 서두르지 않고 계단을 몇 걸음 도로 내려가더니 납죽 몸을 낮췄다.
“쾅쾅!”
사예의 외침과 함께 갑병 두 놈의 몸체 바로 뒤편에서 압축된 폭발이 일어났다. 속도를 내서 달려오고 있던 두 놈은 그대로 폭발에 떠밀려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생긴 게 둥글어서 아주 잘 굴렀다.
“봤지? 계단 주위에서 서두르는 건 수명에 나쁘다.”
사예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단은 사예를 무시하고 다음 포탄을 포에 넣었다.
“법술사를! 법술사를 치라고!”
발포가 재개된 것을 안 정준이 다시 외쳤다. 하지만 처음 두 놈을 제외하고, 움직일 수 있는 갑병들은 계속 호란에게만 달려들고 있었다.
실제로 호란은 무시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호란의 주위에는 완전히 깨어져 움직임을 멈춘 갑병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호란은 다천관에서 이미 갑병의 움직임에 익숙해졌고 이제는 공격 자체가 훨씬 빠르고 강력해져 있었다.
호란의 팔다리가 스치듯 지나가는 것만으로 갑병의 굵직한 다리가 몸체에서 뚝뚝 떨어져 나갔다. 정통으로 공격이 들어가면 두꺼운 갑주도 여지없이 박살이 났다. 주먹에 실린 기운이 마치 마법의 작렬처럼 거석의 내부로 찌르고 들어가며 충격을 퍼뜨렸다. 갑병이 마력포를 쏠 시간 따위는 당연히 주지 않았다.
호란 스스로도 알았다. 여행을 떠난 이래 그는 꾸준히 강해지고 있었지만 이렇게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은 풍음마을에서 시현의 지원 없이 거석 무리와 싸웠을 때였다.
또 하나의 갑병이 호란의 발차기에 깨어지며 바닥에 굴렀다. 아직 몇 놈은 껍질이 깨지고 다리가 떨어져 비틀대면서도 움직이고 있었지만 온전히 성한 놈은 하나도 없었다.
“호위님! 물러나세요!”
단의 외침을 듣고 호란은 바로 크게 뛰었다. 계단 앞에 선 사예가 커다란 마력석을 가슴 앞에 들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주문은 꽤 길게 이어지고 있었고 사예의 표정도 전에 없이 엄숙했다. 하지만 끝마무리는 포를 쏠 때 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박살! 박살! 박살! 폭발!”
반파된 채 비칠대거나 굴러 있던 갑병들이 차례차례 폭음을 내며 완전히 힘을 잃었다. 마지막에 사예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끝!”
“아, 안 돼!”
노인의 비통한 음성이 공터에 울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