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92
292화
* * *
모조 원천은 여러모로 시현의 예상을 빗나갔다.
지하에서 천천히 회전하면서 흘러드는 기운을 끝도 없이 흡수하고 있는 기운의 구체는 생각보다 훨씬 안정적이었다. 그리고 품은 기운은 생각보다 훨씬 더 컸다. 마치 시현의 최고의 기술로 압축한 것처럼, 지름 반 장 밖에 안 되는 크기의 구체 안에 세상을 다 날려 버릴 것 같은 기운이 뭉쳐져 있었다.
위치 또한 예상을 벗어났다. 하나는 성의 남서쪽, 옛 도성 거리 지하에 있었다. 도성 거리는 시현이 머무는 사예의 본가를 포함해 역사가 오래된 땅인의 고택들과 반민 주거지, 시장 거리 뒤얽혀 자리한 귀수관 최대의 인구 밀집 지역이었다.
다른 하나는 관성 밖이었다. 지금 귀수관군이 모들, 금강과 한창 교전을 벌이고 있는 북문 각루 앞 전장 깊은 곳에서 웬만한 땅인의 기감을 모두 압도하는 기운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물론 위치는 관성 밖이라 해도 통제를 잃는다면 충분히 귀수관 전체를 삼키고 남을 터였다.
시현은 틀어쥐고 있던 귀수관 전체의 기운을 놓아버렸다. 원래는 모조 원천이 발견되는 즉시 힘으로 눌러버릴 생각이었으나 지금 이 두 개의 기운 덩어리는 그렇게 다룰 수 없었다. 그러기엔 너무 막대하고 위험했다.
“아 저런, 알아버렸어? 내가 직접 놀라게 해주려고 했는데.”
낭랑한 목소리는 총령전 안쪽에서 들려왔다. 얼마 전까지 시현이 있던 전각 안쪽에서 흰옷을 입은 운모가 당연한 것처럼 걸어 나왔다. 목에 그려진 나선 기결에 빛이 돌고, 평범한 사람의 기색 대신 돌 인간의 강렬한 기운이 몸 안팎에 찾아들었다.
“운모!”
기운에 날을 세운 호란이 시현 곁에서 자세를 잡았다. 시현도 긴장을 숨기지 못했다. 그가 운모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이냐. 언제부터 이곳에 와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느냐?”
“글쎄. 언제부터일까? 그냥 서로 모르는 채로 두지 않을래? 왜냐하면 내가 네 바로 근처에 있으면서 그럴싸한 죽일 기회를 몇 번이고 그냥 지나쳐 보냈다는 게 밝혀지면 모들이 엄청 화낼 테니까.”
운모가 능청스럽게 웃었다. 그가 시현과 호란,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단에게 차례차례 눈길을 주며 말했다.
“난 너희랑 마지막 선택에 대해 이야기하러 왔어. 내가 사랑하는 귀수관 사람들과, 그리고 여기까지 우리랑 징글징글하게 싸워 온 그쪽 세 사람도 나름의 자격이 있지. 도저히 사랑스럽다고는 못 하겠지만.”
“어느 입으로 사랑을 말하는가!”
시현이 노성을 쳤다. 시현의 뒤쪽에 있던 대길사가 일그러진 얼굴로 운모에게 물었다.
“운모, 자네는 정말로… 정말로 문림 스승님과 우리 모두를 속인 건가? 처음부터 귀수관을 파괴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접근한 건가?”
대길사는 운모와 교분이 있었던 문림 산하의 한 사람이었다. 운모가 그를 알아보고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아, 택응아. 그렇게 됐어…. 문림에겐 비교적 많은 걸 사실대로 이야기해줬지만 네겐 아무 할 말이 없네. 사과도 할 수 없고. 하지만 애초에 인류 멸절 자체가 보통 뻔뻔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
“하지만 자네는 귀수관이 파괴되는 걸 원치 않는다 하지 않았는가! 다른 것은 몰라도 그 말만은 진심이라 믿었는데!”
“원하지 않아, 정말로. 하지만 세상엔 어쩔 수 없는 일들이란 게 있어. 멸절이 정해진 이상, 난 남이 귀수관을 부수는 걸 두고 보느니 내가 직접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운모가 씁쓸하게 말했다. 시현이 그를 노려보았다.
“멸절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니, 멸절을 결정하고 실행한 것은 전부 너희 돌 인간들이 아니냐.”
“어차피 이대로는 인간도 별도 파멸을 면치 못해.”
“그것도 너희의 생각일 뿐이다! 너는 처음에 문림을 속일 때 인간의 법술로 원천을 고치겠다고 말했다지? 어째서 그것을 정말로 시도해 보려고는 하지 않았는가? 인간을 모두 죽여 없애는 것 말고 별의 파멸을 막을 방법을 왜 찾으려고 하지 않는가?”
“해 봤어, 전부.”
운모가 말했다.
“지나간 여섯 번의 멸망의 과정에서, 우린 시도할 만한 걸 다 해 봤어. 인간에게 사실을 알리고 경고한 적도 있고 우리가 선택한 소수와 협력을 모색한 적도 있었어. 하지만 인간은 매번 나아지지 않고 같은 잘못을 반복했어. 그들이 무슨 시도를 하건 끝은 항상 안 좋았지. 우리가 막지 않았다면….”
“끝이 안 좋은지 어떤지 어떻게 아는가. 끝에 다다르기도 전에 항상 그대들이 인류를 멸절시켜버렸다면서.”
시현이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
“만약 인간이 더 나아지지 못하고 같은 잘못을 반복한다면 그것은 전부 너희 돌 인간들 때문이다. 위기가 올 때마다 그것을 인간이 끝까지 감당하게 하지 않고 너희가 나서서 모든 것을 무로 되돌려버렸기 때문이다. 너희가 이제까지 몇 번의 멸망을 겪었든 너희는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다. 시도했다 말할 자격이 없다.”
운모는 시현의 말에 눈을 크게 뜨고 굳게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 반응에선 반발도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후에 그가 천천히 말했다.
“전부 인정해. 너희는 진짜로 기회를 가져본 적이 없지…. 최소한 별의 역사의 어느 시점부터는.”
총령전 앞뜰에 잠시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이미 주위에는 상황을 안 귀수관의 관인들과 병사들이 떼지어 모이고 있었으나 아무도 섣불리 시현과 운모 가까이로 접근하지 못했다.
시현도 함부로 움직이기 어려웠다. 주위에 가득한 기운을 사용해 운모를 치는 것은 간단했지만 운모가 그 사실을 모르고 여기에 나타났을 리가 없었다. 두 개의 모조 원천을 운모가 어떤 방식으로 통제하고 있는지 모르는 이상, 운모의 의중을 알 때까지는 함부로 싸움을 시작할 수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운모의 눈에 장난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그가 가볍게 물었다.
“줄까?”
대답이 바로 돌아오지 않자 그가 한 번 더 물었다.
“기회를 줄까? 너희가 끝까지 갈 기회.”
“무슨 의미인가.”
“응. 시문의 말이 전부 맞아. 우리들이 인류 대멸절을 반복하는 한 별의 상황은 결코 나아지지 않아. 아니 악화되고 있지. 여섯 번의 문명이 지나가는 동안 대멸절의 주기는 점점 짧아졌고, 인간이 살 수 있는 땅은 점점 더 줄어들고… 바다도…. 아, 난 이제 이 반복이 좀 지겨워졌어.”
“인간의 공격에 참여하는 걸 그만두고 싶다는 말인가?”
시현이 딱딱하게 물었다. 그는 운모와 대화하면서도 운모가 설득될 것이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가 이렇게 나오니 꿍꿍이가 의심스러웠다.
운모가 말했다.
“그러기엔 난 너무 멀리 왔지. 나는 귀수관과 이곳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내가 사랑하면서 스스로 멸망시킨 도시와 사람들은 이전에도 많이 있었거든. 이번 시대 사람들은 상상을 못 하겠지만 예전에는 인류가 별 전체에 퍼져서 살았어. 도시도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많이 있었지. 하늘의 별만큼 많은 사람들과 같은 수의 가능성들이. 그걸 전부 하나하나 우리들의 손으로 묻었지. 단지 별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그 명분 하나로.”
운모의 음성에 감정이 실렸다. 그는 마치 사람이 울컥한 속을 다스리듯 목을 꿀꺽 움직였다. 그가 비틀어진 웃음을 흘렸다.
“그래 놓고 모든 걸 잊고 본원으로 돌아가 버리는 녀석이 있질 않나, 이제 슬슬 별이 끝나도 된다는 소릴 하는 녀석이 있질 않나… 내 동료들이지만 돌 인간들은 하나같이 뻔뻔한 녀석들이란 말이야. 나 역시 마찬가지지. 이제 와서 한 줌 남은 너희에게 기회를 주겠다며 내가 모든 걸 그만둬 버려서야 지난 문명 사람들에게 너무 면목이 없지 않겠어? 나는 그만둬서는 안 돼. 아무리 내가 그걸 원한다고 하더라도.”
운모가 천천히 옷섶을 벌렸다. 흔한 북방인과 전혀 차이를 느낄 수 없는 연황빛 피부 위에 나선무늬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운모의 기결이 전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시현은 순간적으로 놀라서 숨을 삼켰다.
운모의 기결은 다천관에서 보았을 때와 형태가 달랐다. 목에서 시작한 나선무늬가 가슴께에서 갈라지며 두 개의 중심을 만들고 있었다. 기결이 띤 빛은 가장자리는 주황색이었지만 중심으로 갈수록 은색을 띠었다. 두 개의 기결 중심에서 은은하게 명멸하는 은빛 기운은 지금 귀수관 지하에서 진동하는 거대한 두 개의 기운과 똑같은 파장을 띠고 있었다.
운모가 두 기결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원래 나는 두 개의 선택지를 생각하고 이 자리에 왔어. 하나는 이 자리에서 귀수관과 시문과 함께 죽는 거야. 그러면 아무 방해가 없게 된 모들과 금강이 절멸을 완성하겠지. 특히 나까지 죽으면 모들은 아주 악에 받칠걸. 별은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계속될 거야.”
운모의 손가락이 이번에는 다른 하나, 더 아래쪽에 있는 기결 중심을 향했다. 그가 미소를 띠고 말을 계속했다.
“다른 하나는 귀수관과 시문과… 모들과 금강과 함께 죽는 거야. 두 녀석은 우리 중에 마지막 남은 행동파야. 감람이나 남은 녀석들은 그쯤 하면 다 포기하고 근원으로 돌아가버리지 않을까? 그러면 절멸을 완성할 녀석도 없어지지만, 지금 엉망이 된 세상의 기운의 흐름을 되돌려놓을 존재도, 절멸 후에 남은 인류를 지키고 보듬을 존재도 없어지지. 인간들은 버티지 못할 거야. 돌 인간도 인간도 모두 없고 별은 껍데기만 남겠지만 그것도 별이 지속되는 거지. 오히려 절멸을 반복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안정적인 상태일 거야.”
시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타난 직후 운모는 선택에 대해 이야기하러 왔다고 했지만, 그건 시현이나 귀수관 사람들의 선택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운모 자신의 선택이었다.
시현이 물었다.
“네 기결, 그건 두 개의 모조 원천과 연결되어 있는 건가? 함께 파괴되도록? 넌 처음부터 자살을 계획한 것인가?”
“뭐 어때? 인간은 누구나 죽는데 우리만 그럴 수 없다는 건 불공평하잖아. 너희 인간은 그러잖아. 고작 팔구십 년이면 죽을 자식들을 몇 명 낳아놓고서 자손을 만 대에 이어가는 의무를 다했다고 만족하며 눈을 감잖아. 미래에 반복될 잘못들을 보지 못하니까 인간은 계속 나아지고 있다고 믿잖아. 난 그걸 보면서 깨달은 거야. 별이 끝나기 전에 내가 먼저 끝나면, 별은 관념적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거라고.”
운모가 천천히 말했다. 그의 표정은 지친 것 같기도 안심한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내가 언젠가 지쳐서 이 모든 일을 그만두는 게 두려웠어. 혹은 내가 그만두지 않았는데도 결국 별이 멸망하는 게 두려웠어. 그것을 보면서 그동안의 모든 희생에 아무 의미도 없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게 두려웠어. 나도 인간들과 같은 끝, 허무가 아닌 끝을 원했어…. 다만 그게 너희에게 공정하지 못한 건 사실이지. 그러니까 원한다면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다는 거야. 내가 별의 지속을 꿈꾸듯 너희가 인류의 지속을 꿈꿀 기회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