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326
326화
* * *
시현은 단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놀라지도 않았다. 채원에게 마음먹으면 그를 죽일 능력이 있다고 말한 것은 시현 자신이었다.
시현이 마땅한 반응을 돌려주지 않고 미적대자 단이 한 번 더 속삭여 쐐기를 박았다.
“채인이 장유 가지고 협박한 건 귀신같이 알아듣고 빡친 티 냈잖아. 나랑 호란이 들먹인 이유도 모르지 않을 거고. 거기서 너만 예외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설마?”
“……예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지껏 겪은 것이 있는데.”
시현이 작게 말했다.
사실을 말하면 시현은 자신이 아니라 채원이 예외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것이 제 희망사항일 뿐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원하는 대답을 들은 단은 몸을 빼어 앉았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도로 소리를 내어 말했다.
“제가 제일 중요한 거 두 가지만 짚어드리죠. 첫째, 유네 조사단에 간 파발이 돌아올 때까지가 기한입니다. 그 전에 채인 나으리랑 마음 푸셔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장담하는데 나리님은 그 기한 안에 채인 나으리 생각을 못 바꾸십니다.”
“그렇겠지…. 그럴 것이다.”
“참고로 시간이 더 있어도 못 하십니다. 감람처럼 6천 년쯤 쓸 수 있으면 모를까.”
단이 굳이 덧붙이고는 다음 말을 이었다.
“둘째. 우선순위를 생각하세요. 나리님이 진실 좋아하시긴 하지만 그게 나리님의 최우선은 아니잖아요. 현실이랑 타협 못 하시는 분도 아닌데.”
“나의 최우선.”
줄곧 씁쓸한 얼굴이던 시현이 표정을 바꾸며 단을 마주 보았다. 호란도 눈빛이 바뀌었다.
“네. 나리님의 최우선이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나리님의 우선순위는 변한 적이 없었어요. 이번에도 마찬가지겠죠. 그렇죠?”
“그래.”
단의 말뜻을 이해한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서 미망이 걷혀 있었다.
“알겠다. 내가 채인을 찾아가 다시 이야기하마. 곧 유를 안전한 곳으로 보내야 하는데, 그때 채인이 오해하지 않게 해야지.”
“음. 당장은 채인 나으리도 시간이 필요하실 테니 한숨 주무시고 이따 가시죠. 호란 호위도요. 때 되면 제가 깨워드리겠습니다.”
“알겠다.”
“말씀 잘 좀 부탁드립니다. 유 그 인간은 제집 제 방에서도 베개에 걸려 넘어져서 머리 깨질 인간인데 왜 이딴 델 돌아다니는지….”
“유가 보고할 것이 많다고 했지. 내가 유와 독대하는 것을 채인이 좋아하지 않을 테니 필요한 이야기는 네가 들어 놓거라.”
“그래야죠. 근데 유랑 얘기하실 때 딱히 독대하실 필요 없어요. 걔 이미 아무나 붙들고 이 말 저 말 다 떠들고 있어서.”
단은 유 이야기를 할 때 항상 나오는 지긋지긋해 하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이 나간 뒤 시현은 충고대로 눈을 붙이기로 했다. 안 자도 된다는 호란도 달래서 자게 했다.
해넘이가 가까울 무렵 단이 와서 둘을 깨워주고 다시 갔다. 막사의 호위는 은실에서 반하로 바뀌어 있었다.
석찬을 함께할 겸 채원의 막사로 향하면서 시현은 살짝 궁금증을 느꼈다.
결국 은실은 일행의 대화를 엿들은 것일까, 아닐까? 채원에게 무엇을 얼마나 자세하게 이야기했을까?
어떻든 큰 상관은 없었다. 시현은 오갔던 말 대부분을 채원 앞에서 그대로 되풀이할 생각이었으니까.
우선순위를 생각해서 마음을 정했다는 시현의 이야기를 채원은 납득할 것이다. 채원 자신이 자신의 최우선순위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이었으니까.
나눌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꼽아보면서 시현은 일부러 발걸음을 느리게 했다.
* * *
생각 외의 사실을 접하고 동요했을 뿐, 이제 생각이 정리되었다는 시현의 말에 채원은 무척 기꺼워했다. 우선순위에 따르기로 했다는 말에도 생각대로 거듭 찬동을 표했다.
그렇다고 시현을 완전히 믿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증거로 채원은 밤이 깊었는데도 이것저것 화제를 늘리며 시현을 붙잡아놓고 있었다. 최소한 오늘은 시현이 유를 만날 시간을 안 주고 싶은 것 같았다.
시현도 굳이 이야기를 자르거나 자리를 뜨려 하지 않았다. 공통의 목표를 갖고 각자 고투해온 두 사람이었다. 꼭 꿍꿍이 때문이 아니라도 화제가 떨어지지는 않았다.
“오후께 야영지 주변에 거석이 여럿 나타났었다고 단이 말하던데. 나를 깨우지 그랬는가.”
“수만 많았지 별것 아니었습니다. 마력석도 넉넉한데 굳이 오침을 방해하겠습니까.”
“넉넉하다 해도 이후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 아낄 수 있는 것은 아끼는 쪽이 더 좋지 않은가.”
“제가 오늘만 사는 사람이라 그렇습니다.”
채원이 농담을 던지며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시현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대도 대하기 곤란한 사람이다. 밀청을 하였으면 하였지 그것을 굳이 표를 내야겠는가. 설마 단이 말을 가리지 않았다고 사과하라는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허나 제가 밀청했을 것은 이미 짐작하신 일이 아닙니까. 그 종자 아이의 통찰이 대단하더군요. 예. 은실이도 반하처럼 방랑족 출신이 맞습니다. 귀 밝은 것도 맞고.”
“허나 덮은 것을 무엇 하러 굳이 들추는가. 내게 어찌 반응하라고.”
“하하하.”
채원이 웃다 말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가 울적하게 말했다.
“이런 것이라도 까놓으면 좀 솔직해 보일까 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문께 신뢰를 잃어버린 것이 생각할수록 서글픈지라.”
“그대도 나를 안 믿지 않는가. 그러니 해 진 지 오래인데도 이리 잡아놓는 것이지. 나는 아직 키가 더 클 나이라 밤에는 자고 싶네마는.”
“다 알면서 어울려주시는 것조차, 제게 마음을 못 놓으시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합니다….”
“채인. 나는 그대를 아예 못 믿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구하려는 그대의 진정을 믿고, 그대가 나를 돕는 데 사심이 없는 것을 믿어.”
시현이 부드럽게 말했다. 채원이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단지 나는 서로를 위해 조심하는 것뿐이다. 혹여라도 최악의 일이 벌어질 여지를 차단하려고.”
“최악의 일이라니요, 문이시여….”
채원의 음성이 떨렸다.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설마, 제가 문을 해치리라 생각하십니까?”
“아니다. 나는 그대를 믿는다.”
시현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채원은 시현의 진의를 읽으려는 듯 그를 길게 바라보았다. 눈빛이 열렬했다.
한참 채원을 마주 바라보던 시현이 살짝 눈을 피했다.
“허나 그대는 나를 믿지 말도록 하라.”
“무슨 뜻입니까?”
채원이 되물었을 때는 이미 반하의 기척이 막사 앞에 다다라 있었다. 반하가 말했다.
“천것이 감히 방해하겠습니다. 위께 올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들거라.”
채원이 말하자 반하가 입구를 들추고 들어왔다. 그가 둘에게 절한 다음 말했다.
“반 시진 전에 주위 순찰을 나간 호란 호위와 은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파발이 돌아오나 확인할 겸 멀리까지 다녀올 것이라 말은 했습니다만, 밤이기도 하고 보고를 올려두어야겠다 생각이 들어.”
채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호란이 멀리 나가겠다고 했단 말이냐? 문께서 여기 계신데?”
시현이 말했다.
“주위에 거석이 많다기에 내가 그리하라 하였다. 내 곁에는 그대들이 있고, 호란이라면 순찰 중에 거석 여럿과 마주쳐도 처리할 수 있으니.”
“문께서 명하셨다면야…. 허나 꼭 그리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해진 후에는 거석이 무리 짓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반드시는 아니다. 해진 후에 습격받는 마을을 구한 일이 여러 번 있다.”
“그러면 멀리까지 가지 말았어야 하는 게….”
반 시진이면 딱히 복귀가 늦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늘인 몫꾼들이 조를 짜 순찰을 나가면 한 시진 두 시진쯤 돌고 오는 것도 흔한 일이다.
하지만 시간은 밤이고 호란도 은실도 두드러지게 발이 빠르다. 그 둘이라면 웬만큼 멀리 갔더라도 남들 절반 시간이면 돌아올 수 있었다.
두드러지게 발이 빠른 두 사람. 채원은 그 생각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반하에게 물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숙영지에 잘 있느냐?”
“순찰조 하나가 방금 복귀하고 다른 조가 교대로 나갔고, 불침번조 외에는 자고 있습니다.”
“아래 아이들은?”
“일찍 자러 갔습니다. 단은 위의 처소로 갔고, 장유라는 여자는 속필이 제 막사에서 재우겠다 데려갔습니다.”
“그래. 알겠다.”
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예정대로였다. 채원은 유가 단이나 호란과 단둘이 되는 일이 없도록 율비와 은실에게 계속 곁을 지키라 명했다.
율비와 은실이라면 걱정할 것 없었다. 그 둘은 각각 여섯 살 열 살 때부터 하씨 집안에서 채원을 섬겨 왔다. 채원과 가족만큼 긴 시간을 함께 보냈고 그만큼의 신뢰를 보여주었다.
가족.
그렇게 말하면 율비와 은실도 서로 가족 같은 사이였다.
울렁거림이 솟구쳐 채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물러가라는 말을 기다리던 반하가 약간 놀라 그를 보았다.
채원은 침착하려 노력하며 말했다.
“당장 가서 속필의 막사를 확인하거라. 단도…. 아니, 그쪽은 내가 둘러보겠다. 문이시여,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공연히 조바심 말고 그냥 앉아 있게. 반 시진 지났으면 이제 못 따라잡을 텐데.”
막사를 나가려는 채원에게 시현이 말했다. 채원이 휙 그를 돌아보았다.
“문이시여? 뭐라 하셨습니까?”
“못 따라잡을 것이라 하였다. 호란이는 유달리 발이 빠르고, 단은 밤중에도 지름길을 잘 찾으니.”
시현의 말뜻은 명확했다. 하지만 채원은 상황을 바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사이 율비의 막사에 갔던 반하가 뛰어오며 소리쳤다.
“없습니다! 장유라는 반민도, 속필도 자리에 없습니다!”
“아니, 속필까지 같이 갔는가? 그건 정말로 예상을 못 했는데.”
시현이 자못 미안한 듯이 말했다.
일이 여기까지 오자 채원은 도리어 머릿속이 가라앉고 침착해졌다. 그가 물었다.
“도망치게 하신 겁니까? 그 아이들을 전부?”
“장유만 바래다주고 단과 호란은 돌아올 것이다. 장유 그 아이는 음…. 뭐라 해야 하나. 굳이 그대까지 위협하지 않아도 항상 수명이 걱정되는 아이라. 그대가 이해해주면 좋겠다.”
시현은 채원의 눈치라도 보는 것처럼 빠르게 덧붙였다.
“그리고 속필과 은실의 일은 정말로 내가 뜻한 바가 아니다. 어쩌다 그 둘까지 같이 없어졌는지 정말 모르겠는데…. 단과 호란이 돌아오면 앞뒤를 알려줄 것이다.”
채원은 떨리는 손을 꽉 주먹 쥐었다 폈다. 그가 반하에게 명령했다.
“숙영지를 뒤져 남은 사람 수를 확인하고 무엇 흔적이 있는지 찾으라. 호란이 간 길을 뒤쫓을 수 있을지 확인하게 해라.”
“예!”
반하는 대답하고 바로 달려갔다. 하지만 채원은 자신이 명령하고서도 무슨 소득이 있을 거란 기대를 하지 않았다.
“앉지 않겠는가. 들어준다면 내가 변명이라도 할까 하는데.”
시현이 태연하게 말했다. 채원은 뒤집히는 속을 누르며 낮게 물었다.
“저를 믿는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우선순위에 따르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찌 그리 태연하게 거짓을 말씀하셨습니까?”
“거짓이 아니다. 그대를 믿으니까 나 혼자 여기 남지 않았는가. 단은 끝까지 걱정하더라마는.”
시현이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우선순위를 말하면, 처음 책임을 갖게 된 후로 내가 최우선으로 두는 것은 언제나 하나였다. 사람의 목숨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