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325
325화
* * *
막사 안은 잠시 조용했다. 채원은 자기가 말을 하고서 자기가 놀란 것 같았다.
채원은 제 상기된 뺨을 쓸어내려 보더니 고소를 흘렸다.
“죄송합니다. 감정이 앞서서 지리멸렬하게 굴었군요. 논점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까지.”
“아니다. 그대도 이제까지 맺힌 일이 많지 않았는가.”
“그래도 제 낯이 부끄럽습니다. 일단 물러갔다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오겠습니다.”
“잠깐. 채인.”
서둘러 일어서려는 채원을 시현이 불렀다.
“지금 그대는 여러 가지로 당황하고 마음이 어지럽겠지. 하지만 진실이 무엇이든 그대가 흔들릴 필요가 없다. 그대가 이제까지 한 일. 종말을 연기하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했던 부단한 노력은 옳은 일이었다. 세상 사람들을 위한 일이었다. 그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달라지지 않는다.”
“아, 예…. 그야, 저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여기까지 왔습니다만….”
채원은 고소하더니 빠르게 뒷말을 덧붙였다.
“제 형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시현에게 깊게 허리를 숙인 뒤 빠른 걸음으로 막사를 나갔다.
단이 한발 먼저 입구를 걷고 밖으로 나가 채원을 배웅했다. 밖에는 은실과 지은학당 몫꾼 한 사람이 막사와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은실은 단을 보고 눈인사를 했지만 표정이 어째 껄끄러워 보였다. 채원이 제 처소로 돌아가는데도 따라가지 않고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막사로 돌아온 단은 깔린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투덜거렸다.
“시발. 제대로 조졌네. 막판에 겨우 우군 비슷한 거 좀 생기나 했더니.”
호란이 말했다.
“채인 님이 다시 오겠다고 했잖아. 지금은 좀 감정적이 된 거라고. 차근하게 이야기를 더 하면 마음도 풀리고 이해도 해 주실 거야.”
“그다지요. 어지간히 빡이 돌았던데.”
단이 회의적으로 말했다.
“머리 좋은 나으리잖습니까. 순간 감정이 북받쳤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자기가 사실이랑 아무 상관 없는 일을 끌어와서 떼쓴 거 다 알아요. 그래도 한 번 더 가족 얘기 꺼내서 선 긋고 간 거잖아요. 이건 감정 문제고 자기는 논리로 설득되지 않을 거라고.”
채원이 떠났는데도 단이 존대를 하는 것을 보고 시현이 물었다.
“누가 엿들을 것을 걱정하느냐? 주위 막사와는 거리가 있고, 파수 보는 이도 떨어져 있으니 목소리만 높이지 않으면 괜찮을 것이다.”
“모르죠. 나리님이 기척을 못 찾으신 걸 보면 그 반하란 호위 양반은 아마 방랑족 출신일 거예요. 저 밖에 선 나리도 같을지 모르고. 방랑족 중엔 가끔 귀가 유독 좋은 사람들이 있거든요.”
“하지만 채인은 우리의 대화를 제 사람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지 않은 것 같았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을 놔두고 간 거 아닙니까. 상대가 작정했으니 조금은 조심해야죠.”
정말로 엿들을 것을 조심하고 싶다면 시발 조졌다거나 채원이 빡이 돌았다거나 하는 말도 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하고 시현은 생각했다.
단이 말했다.
“그래서. 하씨 가솔인 줄 알았던 호위 양반은 방랑족이고, 땅인인 줄 알았던 비서 양반은 반민이고, 의법사인 줄 알았던 수장 나으리는 암살 전문가고? 저 양반들 다음에는 또 뭐가 나올지 몰라 무서워지네요. 전 정말로 알고 싶지 않은데.”
“단, 정말로 밀청을 걱정하는 것이 맞느냐?”
“이 화제는 어차피 지은 쪽 사람들한테는 비밀이 아니고, 그쪽도 우리가 안다는 걸 아니까 괜찮습니다. 제가 싸가지 글러 먹은 놈인 것도 비밀이 아니고.”
시현은 그제야 단이 무얼 조심하는지 깨달았다. 단이 채원에게서 숨기려 하는 것은 단이 원래부터도 위아래 위계를 무시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깨닫고 시현의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채인 나으리가….”
“잠깐만, 단.”
시현은 단의 말을 끊었다. 그가 방석에서 내려와 단에게 몸을 가까이하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채인과 지은학당의 입장은 물론 중요하다. 혹시라도 이 일로 대립하게 되는 것도 걱정스럽다. 하지만 지금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채인에 대한 것이 아니다. 단 네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호란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단이….”
“아뇨. 전 별로 할 얘기 없습니다. 제가 뭘 생각하든 중요하지도 않고.”
단이 재깍 대답했다. 호란도 시현도 일순 멍한 얼굴이 되었다.
“왜, 왜 안 중요해?”
“안 중요해요. 어차피 묻어버릴 거잖아요. 없는 일이 될 거니 더 생각할 필요도 없죠.”
“단.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결론 짓지 않았다. 너도 일을 알고 처음에 놀라지 않았느냐. 마음에 맺히는 것도 있을 것이고….”
“안 중요합니다.”
단이 세 번째로 말했다. 호란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단은 자주 보는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정말로 일을 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엿듣는 사람을 걱정해서 속에 없는 말을 하는 것인지 구분이 잘 안 갔다.
하지만 지하 공동에서 감람의 말을 들었을 때 단이 크게 충격받았다는 것을 호란은 알았다. 표정도 드러내지 않았고 말도 몇 마디 안 했지만 그때 단은 분명히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단, 정말로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잖아. 억울하지도 않아…?”
호란은 무심코 속을 다 말했다가 단과 눈이 마주치고 침을 꿀꺽 삼켰다.
단은 지금도 화가 나 있었다.
단은 눈빛과는 달리 여상한 목소리로 화제를 바꿨다.
“계속 말하지만 전 괜찮습니다. 어제오늘 억울하게 산 것도 아닌데. 그보다 지금 걱정할 건 제 기분이 아니죠. 지금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분은 따로 계시던데요.”
단이 채원이 나간 막사 입구를 슬쩍 턱짓했다.
“그래. 결국 채인 말이구나.”
시현은 한숨을 쉬고 방석 위로 몸을 물렸다. 밀청 때문이든 아니든, 단이 이렇게까지 거부하는데 계속 이야기를 해달라 우길 수는 없었다.
“채인은 입장이 확고해 보였지. 나도 그와 척을 져 가면서까지 당장 사실을 밝히자는 것은 아니다. 일단은 돌 인간의 본거지를 찾아 변고를 해결하고, 상황이 안정된 뒤에 천천히….”
“아뇨, 그게 안 된다는 건데요. 채인 나으리가 바보입니까, 당연히 변고 후에도 확실하게 모든 걸 묻겠다는 약속을 받으려고 하시겠죠.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되도록 하유관과 다천관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에.”
“그건….”
시현은 말을 망설였다. 단의 말은 지당했지만 그것은 시현이 채원에게 줄 수 없는 대답이었다.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으냐. 채인이 강조한 대로 우리는 돌 인간의 근거지를 앞두고 있고. 모든 걸 정리한 뒤에 논의해도 늦지 않다.”
“채인 나으리에겐 늦습니다. 돌 인간을 토벌하고 문제가 전부 해결되고 나면 나리님은 채인 나으리가 필요 없어지니까요.”
“그렇지는 않다. 설마 내가 일이 끝났다고 그이의 공적을 외면하겠느냐.”
“외면은 안 하시겠지만, 공적 때문에 채인 나리 말을 따라주시지도 않겠죠. 나리님은 옳다고 믿는 일은 남들 입장이 어찌 되든 그냥 질러 버리시잖아요. 나리님만 그러는 것도 아니고 꼭대기 공기 마시는 분들은 원래 다 그래요. 그걸 채인 나으리가 모르시겠습니까? 자기도 그 동네 있던 사람인데.”
시현은 할 말이 없었다. 단이 계속 말했다.
“채인 나으리한테는 나중에 이야기하자는 말 같은 거 절대 안 통할 겁니다. 애초에 그 나으리는 오늘만 사는 분이잖아요. 율지인지 속필인지 하던 그 양반이 사실 반민이라고 했죠? 반민한테 격 사칭을 시켰다는 건데, 그건 무슨 공을 세워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자기 사람이 여럿 죽을 건 당연하고 채인 나리 본인도 절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요.”
“그, 그 정도야?”
호란이 당황해서 물었다. 단은 뭘 물어보느냐는 눈길을 보냈다. 시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처음에 나는 변고를 해결하고 나면 지은학당의 공적도 인정을 받고, 채인의 지위도 어느 정도 복권이 되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채인의 주위 상황은 생각보다 더 나쁘구나. 일이 그렇게 될 것 같지 않다.”
“시문 님이 사면령을 내리셔도 안 되나요?”
“나도 본디는 그리할 생각이었다만….”
시현이 말끝을 흐렸다. 단이 말했다.
“아무 소용없죠. 사실 격 사칭 일은 오히려 작아요. 애초에 그 나으리가 이제까지 저지른 일 같은 건 진짜 문제도 아니잖아요.”
“그럼 뭐가 문젠데?”
호란이 물었다. 단이 어깨를 으쓱했다.
“채인 나으리 자체가 문젭니다. 이제 보니까 그 나으리하고 척을 진 귀수관 세도가들은 채인 나으리가 총치총령이 될까 봐 무서워하는 게 아니에요. 채인 나으리 본인을 무서워하는 거예요. 귀수관에 딱 둘 남은 극상격, 그것도 변고를 막으려 노력했다는 명분을 가진 사람인데 화해를 시도조차 안 하고 독살부터 하려 든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는 거죠.”
단은 제 목에다 손가락으로 긋는 시늉을 해보였다. 호란은 조금 시간을 두고서야 의미를 이해했다.
“채인 님이 공격 법술사라서? 하지만 마법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건 다른 땅님들도 다 마찬가지잖아.”
“채인의 주문은 남다르다.”
시현이 말했다.
“그가 감람에게 마력석 한 자루 분량의 벼락을 꽂는데도 나는 직전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아마 그가 나를 공격해도 제때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네? 하지만 시문 님이 더 강하잖아요?”
“모든 영역에서 더 강하다. 하지만 채인이 나보다 더 빠르다. 딱 한 가지, 사람의 급소를 치는 일에서만은.”
호란의 얼굴이 순식간에 긴장에 찼다. 시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채인을 보는 눈이 달라졌느냐? 만약 내가 이 일로 채인과 계속 대립한다면, 앞으로 너는 채인이 나와 함께 있을 때 안심을 못 할지도 모르겠구나. 내가 그러한데 다른 땅인들은 어떻겠느냐.”
시현이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나 역시 마음먹으면 누구라도 죽일 힘이 있지만 그리하지 않는다. 내게는 명하면 따르게 할 권력이 있어 그럴 필요가 없다.
다른 법술사들도 그리하지 않는다. 저보다 약한 자는 권력으로 누를 수 있고, 강자나 대등한 자와 힘으로 싸우면 모두에게 배척받고 자기가 지닌 지위를 잃게 되니까.
하지만 채인은 이미 제가 가진 것을 수없이 버렸고, 자기보다 강한 자를 죽일 수 있다. 어쩌면 들키지조차 않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는 이미 격 가진 법술사들이 그어 둔 선 밖으로 나갔다. 앞으로도 체제 안에 받아들여질 수 없을 것이다.”
“그건… 하지만.”
시현이 한숨을 쉬었다.
“채인은 모두 각오하고 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십 년은 길다. 후회한 일도 많았겠지. 그는 스스로 땅인의 규범을 깨어버린 만큼 남은 정체성을 놓기가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더 땅인들과 갈등할 일을 만들기도 싫을 것이고. 마음은 모를 것이 아니다. 아니다만….”
“아니요, 나리님이 채인 나으리의 마음을 이해하느냐 마느냐도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요. 왜 자꾸 엉뚱한 데로 가시지.”
단은 길게 한숨을 쉬더니 시현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갔다. 그가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속삭였다.
“여기까지 얘기했는데도 진짜로 몰라? 너 계속 그렇게 진실이 어쩌니 하고 헛소리 빡빡 하고 있으면, 돌 인간하고 싸우고 돌아오는 길에 뒤통수 맞고 골로 간다. 어쩌면 가는 길에 맞을지도 모르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