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324
324화
* * *
시현 대신 채원이 답했다.
“당연히 죽지 않았겠느냐. 제가 스스로 일으킨 폭발에 휘말렸으니.”
“하지만 홍은산에서 감람의 다른 부분과 싸웠을 때요. 그때 한 번 감람이 자기 몸을 터뜨려버리고 본체는 도망친 적이 있었어요. 이번에도 그랬을지도요….”
호란은 말끝을 흐렸다. 기분이 복잡했다. 마음 어딘가에서 감람이 살아 있기를 기대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감람은 별의 멸망을 막기 위해 사람 죽이는 것 말고 다른 일을 하려고 했었다.
시현도 후련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가 말했다.
“모르겠다. 나는 내가 붙잡은 힘을 억누르는 데 집중하느라 그의 남은 부분이 어찌 되었는지는 의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기결에 손상을 입은 상태였으니 살아서 도망쳤을 가능성은 작을 것이다.”
“죽었을 겁니다. 틀림없이.”
채원이 힘주어 말했다. 시현이 그를 바라보았다.
시현의 눈빛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채원이 머리를 숙였다.
“제가 독단으로 감람을 공격한 것을 책망하시면 달게 받겠습니다. 허나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문께서는 그 장유라는 아이를 살리고 싶어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 그대가 치지 않았더라도 아마 내가 먼저 감람을 쳤을 것이다.”
“미력하나마 힘이 되어 다행입니다.”
“하지만 그대가 감람을 기습한 것은 유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시현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하지만 채원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것이야말로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은실이는 제가 누구보다 신뢰하는 아이입니다만, 자칫 돌 인간의 헛말을 길게 듣고 농단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보장은 또 없으니까요.”
그가 시현에게 다가서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노파심에 말씀드립니다. 문께서도 거느리신 두 아이의 입을 잘 단속하셔야 합니다. 이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시현은 결국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말하기 전에 단이 먼저 말했다.
“아무 걱정 마십시오 나으리. 보기보다 입 무겁습니다. 저도, 호란 호위도요.”
채원은 허리를 펴며 단을 바라보았다. 단은 공손하게 공수한 자세로 가볍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채원은 단에게 싱긋 마주 웃어준 다음 시현에게 말했다.
“이 이상의 이야기는 사람 없는 데서 나누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하에 남은 거석과 이 장소부터 처분하시지요.”
“알겠다. 그리하자.”
시현이 고개를 돌렸다.
곧 통로에서 은실이 사라졌던 세 사람을 이끌고 나타났다. 다들 흙투성이였고 반하는 서기도 힘들 정도로 녹초가 되어 있었지만 셋 다 별 상처는 없어 보였다.
제일 팔팔해 보이는 유가 우는 소리를 내면서 단에게 달라붙었다.
지은학당 무리와 하유관군 쪽에서도 상황을 탐색하고 있었는지 곧 몫꾼 무리와 성지가 달려왔다.
마력석을 보충받은 시현은 감람의 은신처가 있던 곳을 완전히 뒤집어엎고 지하를 돌아다니던 남은 갑병을 하나하나 파괴했다. 조사를 안 하고 전부 부수면 안 된다고 애걸하는 유는 단이 우격다짐으로 끌고 갔다.
마지막에 채원이 주문을 펼쳐 숨은 적이 없나를 한 번 더 확인한 뒤, 상황은 완전히 종료되었다.
일행은 아침에 지나온 샘에 막사를 쳤다. 하유관과 다천관의 합동 조사단에 보내놓은 파발을 기다려야 했고, 새벽부터 이동하고 난리를 겪느라 다들 지쳐 있기도 했다. 가장 지쳐 있는 사람은 시현이었다.
하지만 시현은 마음 편하게 쉴 기분이 아니었다. 채원도 마찬가지인지 시현이 식사를 마치자마자 시현이 머무는 막사로 찾아왔다.
채원은 은실을 데려와 막사 주위에서 사람을 물리게 했지만 호란에게 자리를 비켜 달란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를 들여오란 핑계로 단까지 막사에 오게 했다. 무슨 말을 하러 왔는지 짐작이 갔다.
채원은 시현의 앞에 단정히 무릎 꿇고 앉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반하와 속필에게 물어보았는데 세 사람은 지하에서 감람과 갑병을 피해 내내 도망쳤을 뿐, 무엇 대화를 나눈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돌 인간이 퍼뜨리는 낭설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시현은 불편한 얼굴을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채원은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 장유라는 아이는 언동이 경솔한 구석이 있어 입을 막으려 해도 수단이 궁했을 텐데요.”
시현이 찌푸렸던 얼굴을 폈다. 그의 감정이 무표정 속에 잠겼다. 그가 차분하게 말했다.
“채인. 그대가 여러모로 애써온 것을 생각하여 한 번만 경고하겠다. 도를 넘지 말라. 나는 세간에서 말하는 것만큼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고, 내 마음을 바꾸고 싶다면 강요도 협박도 좋은 수단이 아니다.”
“협박이라니요, 무슨 말씀을! 언감생심 문께 그런 마음을 먹겠습니까!”
채원이 펄쩍 뛰었다.
“제가 오해를 살 언동을 했다면 전적으로 저의 죄입니다. 허나 제가 걱정이 많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돌 인간의 본거지가 코앞인데, 대사를 앞두고 헛된 말이 퍼져 분란이라도 생기면 어찌하겠습니까!”
“그런 말씀이 협박이잖아요!”
분해진 호란이 못 참고 끼어들었다.
“전 돌려 말하는 거 잘 못 알아듣는데도 채인 님 말씀하시는 건 알겠어요. 시문 님은 감람 말을 믿는다고 하셨잖아요. 근데도 채인 님은 감람이 말한 건 무조건 거짓말이고, 소문나면 큰일 날 줄 알라고 계속 말씀하시는 거잖아요.”
채원이 호란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와 눈이 마주치고 호란은 마음이 철렁 가라앉았다.
이제까지 채원은 호란이 예를 지키지 않아도 거리끼는 얼굴을 한 적이 없었다. 채원 자신에게 격의 없이 말을 걸어도 항상 기껍게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한순간 채원의 눈은 호란이나 단이 말하는 걸 싫어하는 다른 땅인들의 눈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냉랭한 반응은 한순간뿐이었다. 채원이 짐짓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호란아. 말했듯이 나는 걱정해서 말씀드리는 것이다. 돌 인간은 우리의 적이다. 적이 하는 말을 왜 믿겠느냐? 더구나 사실이건 아니건 그런 말이 퍼져나가서 좋을 일이 무엇이 있느냐? 아랫것들이 입을 헛놀렸다간 큰 벌을 받을 것인데 그네들만 불쌍해지지 않느냐.”
호란은 대답할 말이 하나도 생각이 안 났다. 당연히 땅님들은 이런 이야기를 싫어할 것이다. 말만 해도 벌을 주려고 하는 땅님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숨기는 게 좋은 일 같지도 않았다. 호란은 한참을 생각하고서야 말했다.
“하지만 만약에 사실이면요? 그러면 사람들한테 알려줘야 하잖아요. 유처럼 똑똑한 반민은 엄청난 마법사가 됐을지도 모르고.”
“그야말로 말이 안 되는 소리를.”
채원의 얼굴이 또다시 무서워졌다.
“법술사가 되려고 한다고 다 되는 것인 줄 아느냐? 격의 경지에 다다르는 이는 땅인 중에서도 소수다. 어지간한 집안에서도 가산만 탕진하고 세월만 버리다 마는 이들이 수도 없다. 땅인도 그럴진대 그 많은 반민이 어떻게 다 법술사가 되느냐?”
“아니, 그건 그런데요. 꼭, 꼭 전부 마법을 배워야 한다는 게 아니고요….”
호란은 횡설수설하다가 도움을 구하듯 막사 안의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단이 구석에 무릎 꿇고 앉은 채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단은 채원과 똑같은 의견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것 같았다. 단은 유의 마력회로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도 펄쩍 뛰며 무조건 묻자고 했었다.
특히 유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다고 할 것 같았다. 반민들이 땅인의 마음에 거스르는 소리를 했다가 위험에 처하는 일에 대해 가장 뼈저리게 하는 것도 단이었다.
무엇이든 간에 이 일로 누구보다 생각이 많고 감정이 흔들릴 사람이 단이었다. 이미 할 말이 속에 산 같이 쌓여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표정에도 무슨 표가 나지 않았다.
호란은 알았다. 단은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돌아보면 단 말고 다른 사람들도 다들 그랬다.
호란은 자기가 가장 마음을 쓰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는 한 번 더 용기를 내서 채원에게 말했다.
“다들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으면 좋잖아요.”
“뭐라 하였느냐.”
“반민들도, 반민이라고 무조건 무시당하고, 땅님이나 하늘인 앞에선 무릎 꿇고 머리부터 숙이고, 할 말 있어도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러지 않으면 좋잖아요….”
“호란아. 너는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채원이 한탄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가 시현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들으셨지요. 호란이는 누구보다도 문에 대한 충성심이 깊은 아이가 아닙니까. 이런 아이의 입에서까지 결국 위아래의 도리를 엎겠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것이 장차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채원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가 읍소할 듯 열정적으로 말했다.
“문께서 부인해 주셔야 합니다. 헛말이라 말씀해주십시오. 돌 인간의 이간질하는 책동이었다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야 문이 치르실 대사가 온전하고, 이 아이들이 온전하고, 세상이 온전할 것입니다.”
“내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
시현이 조용히 말했다.
“감람이 처음 입을 열어 말을 냈을 때, 온 세상이 뒤집어질 일임을 나 역시 깨달았다. 세상의 땅인이란 땅인은 모두 고개를 젓고 부인할 일이라 나 역시 생각했다. 하지만 어째서 그대가….”
시현은 잠시 생각을 고르고 말을 바꾸었다.
“그대와 지은학당은 멸망을 막기 위해 모든 법술사가 법술을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십 년을 싸워 왔다.”
“그렇습니다.”
“그대는 이미 세상 땅인이 모두 싫어할 주장을 하면서 온 세상을 적으로 삼았던 사람이다. 명문가 출신의 상격에게 보장된 출셋길을 스스로 버리고, 스승과도 가족과도 의를 상하고, 부와 지위와 명예까지 그대가 가진 모든 것을 희생했다.”
“그것이 옳은 일이고 세상의 창생을 위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그대는 그런 이지. 그래서 내가 지금 의아하게 여기는 것이다….”
시현이 채원의 눈을 마주 보았다. 얼굴에는 무표정이 걷히고 안타까움이 드러나 있었다.
“뜻을 펴기 위해 세상에 맞서며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대가, 지금은 무엇을 그리도 두려워하는가? 땅인이 법술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말과, 반민도 배우면 법술을 쓸 수 있다는 말이 그렇게까지 다른가?”
“전혀 다르지요, 종말은 진실입니다!”
채원이 곧바로 언성을 높였다. 시현이 되물었다.
“후자도 진실일 수 있지 않은가. 땅인과 반민이 타고난 차이가 없다는 것이 진실이면 왜 안 되는가?”
“그럴 수가 없지 않습니까! 땅인이 다르지 않으면…”
채원은 다시 소리쳤다가 제 목 아래를 막듯이 눌렀다. 이 이상 목소리를 키우면 막사 밖에 선 은실에게 들리리라 생각한 것 같았다.
그의 음성이 속삭이듯 작아졌다.
“땅인이… 위가 위로서 나는 것이 아니라면, 위가 다르지 않고, 명문 하씨가 다르지 않고, 조사조차 뭇 사람과 다르지 않다면….”
말하면서 채원의 목이 점점 메어갔다. 이미 애써 짓던 침착도 정연하던 논리도 떨어져나간 지 오래였다.
채원은 자꾸 올라가려는 음성을 다시 억지로 낮추었다. 그가 갈라지고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왜 제가 남과 다른 의무를 져야 합니까? 제가 오로지 위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한 그 모든 일은 다 무엇이었습니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