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the World Tree RAW novel - Chapter 125
과거 (3)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를 꼽는다면.
그것은 아마 평생을 바쳐 사랑하고, 상대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을 때임이 분명하다.
흘러가듯 들은 이야기를 이세영은 우습다고 생각했었다.
‘살기도 바쁜데 사랑은 무슨, 세상에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 뒤통수나 얻어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요즘 사람들은 만남을 가지지만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저 한순간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상대와 사귄다. 그것이 당연시되는 사회였고, 오래전부터 그러했다.
이 세상의 결혼은 때론 수단이 되고, 어떤 때는 범죄의 용도가 될 때도 있다.
자신의 삶을 바치겠다던 맹세조차 잔인한 거짓이 되는 수도 있었다.
그런 냄새나는 하수구 같은 사랑 이야기를, 귀족인 이세영은 어릴 적부터 굉장히 많이 접해왔다.
그녀 역시 가문 간의 연을 이어주는 도구로서 사용될 뻔했던 적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생각은 확고했다.
동화 속의 로맨스는 동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이상적인 관념이기 때문에 책으로 기록된 것이다.
그만큼 오래 지속될 사랑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냐고. 만약 있으면 그건 멍청한 호구 병신이지.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내가 그 호구 병신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뭐. 사랑을 몰라서 그랬다 몰라서.
호구가 된 기분이 어떠느냐고 묻는다면 답할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기분 째지더라.’
과거로 돌아간다면 나에게 한소리 하고 싶을 정도로 그 사람을 안고 있으면 행복했다.
사랑하는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태어나서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 알 턱이 있나.
그 명언을 남긴 사람은 정말 끝내주는 인생을 살아간 것일 터다. 굉장히 부럽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어느 순간부터 깨닫게 되었다.
사랑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면. 인생에서 가장 슬픈 순간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때라고.
“비밀은 지켜줘. 개한테 들키면 난리 나니까.”
이세영은 흐릿한 눈으로 찻잔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조금 식어 딱 좋은 온기의 차는, 눈앞에 있는 진달래의 꽃과 비슷한 향기가 났다.
달콤한 꽃향기에 알싸한 맛.
떡갈나무의 꽃잎은 차로 쓰이기에는 적당치 않다. 향이 옅을뿐더러, 찜통에 찌면 물러지고 말리는 과정에 향이 날아가는 것이 부지기수였다.
그러한 사실이 왜인지 이세영은 씁쓸하게만 느껴졌다.
“별 건 아니야. 나 죽으면, 여전히 시헌이 곁에 있어 줄 사람이 필요해서 그랬어.”
이시헌은 강해졌지만, 여전히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일상을 지내고 있다.
그것을 오래 전부터 이세영은 알고 있었다.
이의 대책으로서, 천도는 시헌을 단련시키자는 쪽이었다. 그녀의 의견은 옳았고 이시헌은 몰라 보게 성장했다.
하지만 세영의 방식은 달랐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를 노리는 세력의 뿌리를 자신이 직접 근절해야 한다고.
진심을 전달받았으니 자신 역시 같은 태도로 말해야 한다.
진달래는 냉정하게 이세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달래 역시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이야기를 듣는 달래의 숨이 턱 막혔다가 겨우 풀어진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니요?”
“너희들한테는 전근을 갔다곤 했는데, 사실 그렇진 않거든.”
이세영이 이시헌을 두고 먼 곳으로 떠난 이유.
그녀는 다가오는 시련에 있어 절대 수동적으로 굴지 않았다.
“아는 애랑 같이 지금 이시헌을 노리는 세력을 전부 추려냈어.”
이세영은 헌터 연합의 별과 손을 잡고, 내부적으로 플라워를 조사하여 그 간부층의 위치를 알아내 대대적인 토벌에 나설 생각이었다.
“플라워에 숨어들고. 거기서 따낸 정보를 추려낸 뒤에 그걸 이용해서 천천히 계획을 짜는 거였는데……. 쉬울 리가 없지.”
처음부터 죽음을 상정하고 짠 계획이었다.
그럼에도 가능성이 희박해서, 당시 자리에 있던 별이 이세영을 보며 직설적으로 미쳤냐며 말을 해왔을 정도였다.
-이거 죽지 않는 게 용한데? 에휴. 미친년 아니랄까 봐. 아카데미에서부터 무리는 오지게 해요.
-응 사랑하면 닮는거랬어.
-……야 나도 시헌이 사랑하거등? 그러니까 니 일 도와주는 거거등?
-사랑은 개뿔
-힝.
이시헌과 별의 소개팅이 있었던 날.
그날 이후 이세영이 별을 불러 이야기를 꺼냈던 적이 있었다.
-세영쟝…. 아무리 생각해도 넌 정신 나간 것 같아. 너 같은 사람을 뭐라 부르는지 알아?
-연상의 든든함?
-호구 인마 호구!!! 뻔뻔하네 진짜.
-너도 똑같잖아.
-…그러넹. 힝.
그때부터 이미 이세영의 계획은 천천히 시행되고 있었다.
목숨을 위협받는 한 사람을 위해서.
세영의 말을 들은 진달래는 한참 입을 닫고 상념에 잠기더니, 이내 찻잔을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달래의 얼굴은 여전히 냉정하게 굳어있었다.
“……그래서요.”
“그게 다야.”
자신이 죽어도 곁에서 위로할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시헌이 여자를 늘리라는 건, 그 생각이 깊어지면서 다다른 결론이었다.
물론 이세영의 그러한 생각에는 현대 사회의 성관념이 이시헌이 살던 세계와 달랐던 탓도 있었다.
“자기가 죽어도 옆에 다른 여자가 있으면 뭐, 더 낫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진달래의 말에 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기적이지만, 그렇지 뭐.”
자기 멋대로 판단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했다.
이세영은 생각했다. 만약 이게 이시헌의 귀에 들어간다면 최악의 경우에는 그가 자신에게서 정을 떼려고 할지도 모른다고.
이시헌도 자신과 비슷한 과라는 걸 이세영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죽는 건 상관없지만 상대가 죽는 건 바라지 않는다.
그 생각을 양쪽이 해버리면…… 자연스럽게 관계는 멀어지게 될 것이다,
“……나도 개새끼야.”
회한에 잠긴 목소리로 이세영은 낮게 읊조렸다.
차라리 그때, 고백을 매몰차게 거절했다면 이런 일은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른다.
뺨이라도 한 대 치면서 제정신이냐고. 전에 말하지 않았느냐고 윽박을 질렀다면 관계는 딱 알맞게 끝났을 것이다.
그럼 이세영은 온전하게 자신의 계획을 이행할 수 있을 터.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한순간의 감정에 휘말려서. 어른답지 못하게.
그 이유는 진달래 역시 짐작하고 있었다.
사람은 완벽할 수 없으니까.
“공감은 안되네요.”
속 이야기를 이세영에게서 전해 들었음에도, 진달래는 이세영을 공감할 수 없었다.
그녀의 속내나 사정은 잘 알겠지만, 그것은 이세영의 기준에서 생각한 것이었다.
이시헌이 바라지 않는 일을 강제로 해버리는 것임은 변치 않는다.
“그래도… 생각은 잘 알겠어요.”
진달래의 손은 더이상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은 한층 풀어진 기분이었다.
생각의 정리가 전부 되었을까. 진달래는 멋쩍게 웃고 있는 이세영에게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을 전했다.
“교수님이나 저나…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건 매한가지였네요.”
만약 자신이었다면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시헌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범주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기에, 진달래는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지금은 정리할 것도 많고. 고민도 깊고 어지럽지만.”
진달래와 이세영은 여자임과 동시에 한 사람의 기업인이었다.
각자 자신의 줏대가 누구보다 명확한 사람들이다.
설령 사랑에 관한 것일지라도. 그녀들은 주장이 확고했다.
……물론 둘 다 아직 사랑은 미숙한, 첫사랑이었지만.
기업으로 비한다면 아직 미개발된 산업인 셈이다.
진달래가 막 개발을 시작한 열정적인 신입 기업이라면, 이세영은 서서히 발을 넓혀가는 대기업 정도.
웃긴 비유다.
-탁.
진달래는 남은 차를 양껏 들이켰다. 자신의 꽃내음을 풍기는 찻잎의 향은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끓이는 사람이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끓인 것이 티가 났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요. 저희 진목 그룹에서도 최대한 도울게요. 금전적인 것이든 뭐든 전부 부담할 테니까.”
진달래는 주제를 끝맺기 시작했다.
우선 이세영의 말을 들으며 가장 먼저 생각했던 사항을 말했다.
“회사 몇개를 통으로 가진 사람이 말하니 든든하네.”
“그리고 본론인데….”
이세영에 대한 진달래의 감정은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지금은 많이 수그러든 상태였다.
영문을 모를 지경에서 이해는 되는 수준으로, 아니 오히려 약간은 존경할 정도로 변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진달래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저는 이런 방식 납득 못해요.”
“이해해.”
안타깝게 미소지은 이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방식대로 할게요. 죄송합니다. 비밀은 지킬게요.”
어쩌면 자신이 생각했던 것 보다 더. 그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이세영은 생각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자신이 죽어도 저런 사람이 그의 곁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고생하세요.”
꾸벅, 고개를 숙인 진달래가 자신의 짐을 챙기고 일어났다.
현관 쪽으로 나서려는 진달래.
“아, 그럼 사담이나 좀 나눌까?”
그런 그녀를 이세영이 멈춰 세웠다.
“그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네요. 이런 이야기가 끝난 직후라 더요.”
“시헌이에 대해서도 좀 말해주고, 사업적인 이야기도 하고. 너도 모르는 이야기쯤은 알고 싶지 않아?”
“…….”
“경험없으면 시헌이랑 같이 있기 힘들텐데.”
능구렁이 같은 사람.
이런 거북한 이야기가 끝나고 난 뒤에 친분을 쌓는다니, 그것도 연적을 상대로 어떻게 그런 짓을 하겠는가.
“경험이 없다뇨?”
“잠자리.”
“뭣….”
잠. 이라는 어간에 힘을 준 이세영이 능글맞게 웃어왔다.
가슴을 푹 찌르는 감각. 기분이 살짝 불쾌해지는 듯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분위기에 휩쓸려 버린다.
진달래는 이 감정을 이시헌과 처음 만났을 때 한 번 느껴본 적이 있었다.
“지, 지금은 못 할 것 같아요. 이만.”
그 이야기에 더이상 말리지 않기 위해.
진달래는 한 줌의 질투심을 가진 채 빠르게 방에서 배웅도 받지 않고 떠나 버렸다.
진달래의 뒷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이세영은 그녀가 떠나자마자 고개를 푹 숙였다.
“…….”
그녀가 떠난 곳에는 식은 꽃차만이 쓸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뭐랄까…. 생각이 깊어졌다.
도중에 할 말 안 할 말 가리지 않고 다해버렸더니. 맥이 탁 풀린다고 해야 할까.
격렬한 몰두 이후 찾아온 소진 상태에 이세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좋아하긴 해요?
그때 들었던 말은 아무리 냉정한 세영이라도 듣기 힘든 말이었다.
“…시헌이한테 어떻게 설명하지? 큭큭.”
괜히 시원하게 웃기라도 한 번 해보고.
“그래도 달래 걔가 진짜 좋아하기는 한가 보네… 대체 어떻게 꼬셨대?”
진달래가 듣지 못하는 장소에서 칭찬을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을 이어갈수록 이세영은 어딘가 비참해지는 기분이었다.
사랑의 방식일 뿐이라지만, 진달래가 짚은 곳은 자신에게 있어 애써 회피하던 역린과도 같은 부분이었다.
자신이 만들어온 길이 잘못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한들, 세영의 행동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좋아하면 그냥 고백 받아주고 평생 붙어 있지.
“…….”
세영은 아무 말도 없이 검지에 낀 반지를 어루만졌다.
이시헌이 세영에게 주었던, 그리고 단 한 번도 세영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자신이 가진 것 중 무엇보다도 소중한 반지.
그것을 남몰래 왼손의 약지에 낀 세영이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댔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