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the World Tree RAW novel - Chapter 315
새벽의 실수 (1)
“즐거운 시간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간다더니. 그게 사실인가 보네요.”
“예?”
나갈 채비를 하는 셋에게 현자가 입을 떼었다.
“오랜만에 사람이 산다는 느낌을 받아서 좋았어요. 저는 매일을 에덴에서 지내니까. 세피로트님을 제외하면 사람들을 볼 기회가 거의 없으니까요.”
“현자님은 바깥에 자주 나오시지 않나요?”
“저는 의외로 외로움을 많이 탄답니다.”
마로니에는 입을 헤 벌렸다.
현자, 상식적인 감정에선 초연해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헤어짐을 아쉬워하고 있다.
외부인들에게 현자는 절대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이성의 화신으로 인식되곤 한다.
어느 정도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현자라고 이별의 정한을 완전히 잃어버릴 수는 없는 법이다.
“왜 다들 그런 표정이죠?”
셋의 시선에 현자는 눈을 깜빡거렸다.
“눈물이라도 흘려야 믿어주시려나요.”
“아, 아니에요.”
“후후, 그만큼 여러분들을 아낀다고 생각해주세요.”
“그렇게 아끼는 사람을 사지로 내보내는데. 이거 맞나요.”
마로니에의 부정 뒤 이시헌이 볼멘소리를 뱉었다. 그는 묵묵히 자신의 짐을 싸는 도중이었다.
“믿으니까요.”
현자는 웃어넘기며 씁쓸하게 입가를 굳혔다.
나갈 준비가 끝났다.
짐이 빠진 외부인을 위한 침실은 금방 휑해져 버렸다.
옷가지, 물건, 이시헌의 경우에는 겨우살이를 포함한 가면과 복장.
이 셋이 에덴에서 할 일은 이제 없다.
며칠에 걸쳐 현자의 계획을 들은 그들은 이제 다시금 요람으로 향해야만 했다.
현관에 갈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손 위로 마력을 일으키는 현자.
쭉 아무 말 없이 현자의 옆에서 옷자락을 붙잡고 있던 세피로트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브랑쉬! 나무왕!”
세피로트가 마로니에와 이시헌에게 차례로 삿대질했다.
손끝은 곧 산수유를 향했다.
“가슴개물!”
“…?”
“세피로트님! 떽!”
현자의 다그침에 시무룩하게 고개를 내리는 세피로트. 산수유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을 하고, 이시헌은 웃음을 틀어막았다.
마로니에는 패배감이 서린 눈빛으로 산수유의 흉부를 흘겼다.
이번 에덴에서 교육을 받은 셋.
서로의 감정의 골은 깊어졌으나 깊어진 만큼 불완전하다.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서로를 대하지만 언제 또 흠집이 생길지 모른다.
술을 주고받았던 그 날 이후, 그때의 감정을 흐지부지 넘겨버린 마로니에로서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늘 그렇듯. 동갑내기의 갈등이 항상 그랬듯이. 나중에는 언제 그랬냐며 웃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셋다 좋은 사람이다. 그렇지 않으면 에덴에 발을 들이는 건 불가능 했을 테니까.
세피로트의 눈동자가 세 명을 살폈다.
세상의 모든 지혜와 지식을 가진 그녀의 모호한 눈동자가, 그들의 본질을 꿰뚫듯이 노려보았다.
“잘 될 거야!”
어린아이 특유의 뭉개지는 발음으로 소리치는 세피로트.
그녀를 지켜보던 네 명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나중에 또 연락하죠. 오늘은 푹 쉬세요. 내일부터 다시 일을 해야 하니까.”
-번쩍!
현자의 손에서 마법이 발동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에덴을 떠나는 건 맞지만, 요람의 습격을 저지하기 위해 이 넷은 앞으로도 만날 일이 많다.
몇 마디 인사 후, 셋이 사라지고. 텅 빈 방에서 현자는 굳은 미소를 간직한 채 세피로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피로트님. 식사 하셨어요?”
“아니.”
“오늘은 무엇을 드시고 싶으세요?”
“쌔우!”
“알았어요. 아침밥 맛있게 해놓을 테니, 먼저 준비하고 계세요.”
“푸카푸카?”
“네 푸카푸카.”
세안과 양치. 세피로트가 어미 닭을 쫓는 병아리처럼 아장아장 욕실로 달려나갔다.
현자는 방을 떠나기 전, 고개를 돌려 잘 정돈된 침대 셋을 눈으로 흘겼다.
의외로 외로움을 많이 타요.
굳이 할 필요도 없는 그 말을 왜 했을까. 그녀의 머릿속에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에덴은 두 사람의 둥지다.
백년이 넘게 이어져왔다.
에덴에 사람을 들이는 건 매우 특별한 일이다. 이시헌과 마로니에, 산수유처럼 아예 몇 주간 체류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이번 대의 현자로서는 처음 있는 일.
현자는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했을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 이유를 똑똑한 그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실제 그러하니까.
외로움을 많이 타고, 사람을 좋아한다.
현자 그녀는 자신에게 솔직했다.
그러나 현자로서 체면치레는 해야 하는 법.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감정을 잘 내비치지 않는다.
그런 그녀가 이번에 아쉬움을 내뱉은 이유는.
아마, 역시.
-…저도 사실, 이러고 싶진 않아요.
그 날 밤에 있던 일 때문일 것이다.
현자는 얼굴을 손으로 모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요.”
실수를 저질렀다는 수치심 때문인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 * * * * * *
불콰한 두 얼굴이 술을 연신 홀짝인다.
본인의 주량을 넘어섰는지 이시헌의 얼굴은 맹하게 풀려 있었다.
그녀 자신도 알딸딸하고 기분 좋게 취한 상태.
이 둘에겐 지금까지 설명할 수 없는 벽이 있었다.
경외할만한 명예를 지닌 현자. 그런 그녀를 이시헌은 지나치게 경계했다.
의도를 알 수 없다.
현자의 행각을 눈에 담은 모든 이들이 그리 말한다.
그러나 결과만 놓고 보면 결국 현자의 목적은 성취된 지 오래.
판을 가지고 논다. 그런 말을 들으며 모두의 경외와 두려움을 샀다.
목령왕인 이시헌이 현자를 믿지 못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티를 내지는 않아도 자연히, 둘의 사이에는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이 들어서게 된다.
절대 사적으로 엮일 수 없는 두 명.
각자에게 주어진 운명은 이를 불허한다.
현자와 이시헌 둘 다 인식하고 있던 사실이다.
-짠!
그러나 한 잔의 와인은 그것을 허락했다.
알코올은 정신을 흐리게 했고.
이시헌은 접근을 허락했다.
‘잘하면.’
현자는 흐릿한 정신 속에서도 하나의 판단을 내렸다.
그녀 역시, 이시헌의 성품을 재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속내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현자는 망각하고 있었다.
-비틀.
눈앞이 흐려지면서 고개가 흔들린다.
자신 역시 취해버렸다.
그리고 지금 한 생각은 전부 다음 날 아침에 이르러 새까맣게 지워지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현자는 기어코 물었다.
“시헌씨.”
“넹.”
다소 멍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이시헌.
취한 그의 얼굴은 진중했지만, 말투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저 정도로 취해있다면 그냥 물어도 될 것이다.
“힘든 일은 없어요?”
“힘든 일이요? 힘든 일이라. 힘든 일. 아. 이렇게 갑자기?”
“많으실 것 같아서.”
“아니…당신 때문에 고민이 하나 더 생겼지. 그것도 힘든 일이라면 힘든 일 아닌가.”
존대에서 반말로 왔다 갔다.
그러나 축 처진 맥아리 없는 음성과 몽롱한 얼굴은 귀엽다는 감상을 불러오기 충분했다.
모성애. 그 비슷한 걸 느껴버릴 정도로.
“저 때문에요?”
“……난 당신이 뭘 생각하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세계수 편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또 플라워 편은 아닌데.”
“사실이죠.”
“대체 뭐 때문에 우릴 부른 거야?”
“아실 텐데.”
세피로트의 지식 충족을 목적으로 한다.
이시헌은 와락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잖아.”
“…….”
“당신 노리는 거 많잖아. 세계수 몰래.”
취한 그는 선을 금세 넘나들었다.
각자 숨기고 있던 걸 원 없이 파헤칠 정도로.
현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어요?”
“내 감이야.”
직감.
정말 그렇다면 무서운 능력이다.
경험, 힘, 지식. 심지어는 화술조차 밀리는 이시헌이 현자를 꿰뚫어 본 것이니까.
그 비범함은 인정해줄만 하다.
그는 언젠가 세상에 설 정도로 성공할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시헌은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취해버려서, 횡설수설. 바로 다음 주제로 넘어가버린 것이다.
“그리고. 힘든 일. 존나 많지.”
“…어떤?”
현자는 가슴을 콩닥거리머 시헌에게 물었다.
잠시나마 속내를 꿰뚫었다는 것에, 긴장한 탓이다.
현자라는 사람이.
현자가 되어서 처음으로.
의도치 않게 현자의 마음을 두드린 이시헌은 알게 뭐냐는 듯 혀를 찼다.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 힘든 일은 다 당신 때문인데.”
“아니 그게.”
현자는 입가를 떨었다.
원색적으로 그녀를 탓하는 이시헌의 태도는,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처음 만날 때부터 이어진 감정이다.
그러나 취해있고 심장이 뛰는 지금. 그녀는 왜인지 오랜만에 섭섭함을 느낄 수 있었다.
“시헌씨는, 저를 못 믿는 건가요?”
술김에 말했다.
“…시발 말이라고 하냐 당연히 못 믿지.”
술김에 답해왔다.
현자는 술을 머금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시무룩해진 모습을 바라보던 시헌은 다시 술을 홀짝이며 중얼 거렸다.
“그래도.”
술은 본심을 알려준다고들 한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참고 있던 속내가 튀어나오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술이 정신을 흐트러뜨리면서 생각도 하지 않았던 말이 튀어나오곤 한다.
“…끄응. 좋은 사람이었으면 해. 그렇게 믿고 싶고.”
그래서 그녀는 그것이 이시헌의 진심인지 알지 못했다.
“…….”
“현자 정도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을까.”
시헌은 독백하듯 중얼 거렸다.
“항상 생각하거든. 명예와 힘. 지식. 돈. 얼마나 많은 빈민을 구제하고, 수해에서 구해낼 수 있을까.”
모두의 적이 되어버린 이시헌에게 그것은 너무도 부러운 일이었다.
한때나마 정치인을 꿈꾼 그였기에.
품을 수 있는 감정이자 자신은 자각하지 못한 진심.
그는 술 한 모금에 감정을 털어놓았다.
“난 당신이 개인적으로 정말 부러워.”
“정말이요?”
“아 머리야….”
시헌은 눈을 감았다.
꾸벅꾸벅 졸다가, 다시 일어나선 현자를 바라본다.
슬며시 지어오는 미소가 눈에 박힌다.
현자는 그런 시헌의 말을 몇 번이고 되새겼다.
부럽다.
치기어린 질투가 아니라, 누군가를 많이 도울 수 있는 게 부럽다고.
유사한 말을 들은 적이 자신에게 있던가.
그런 유형의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성녀처럼 오직 사람들을 위해, 사람을 사랑하고, 스스로 태양이 되어주는 존재는 지금껏 많았다.
그러나 목령왕. 편견 속에 태어나 이유 모를 증오를 받아온 존재다.
이시헌의 존재는 각별했다.
각별한 존재가 자신에게 해오는 말이 그러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러니 인간적인 호감을 품게 된다.
백 년이 넘은 세월을 살아오며 식어버린 그녀의 감정에.
치사하지만 술의 힘을 빌려 맞닿았다.
현자도 이시헌도 의도하지 않았다. 기적에도 가까운 일이다.
흥미.
이 사람에 대해 궁금하다.
목령왕, 이세계인. 세계수의 남편 후보. 현세대 천마의 제자이자, 동 세대의 인물 중 가장 뛰어난 잠재력을 가진 남자.
그 남자를 수식하는 단어들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오직 이시헌에 대한 궁금증.
“…탁자가 좀 멀어서 불편하지 않나요? 옆에 가서 앉아도 괜찮아요?”
현자 이전에 그녀도 사람이었다.
몇 가지 정도 더 물어볼 게 있다.
별다른 의도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물음.
술에 기댄 터라 평소에 하지 않을 말도 현자는 내뱉었고. 이시헌도 스스럼없이 답해주었다.
벽이 허물어졌으니 사이가 가까워지는 것도 금방이었다.
조용한 방. 단 둘이.
그러나 한계점을 넘게 마신 둘은 금세 말을 잃었다.
서로에 대한 취미나 취향. 좋아하는 술은 무엇인지.
또 음식은 뭐고 일상생활은 어떻게 보내는지.
취해 말을 더듬으면서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평소였다면 가만히 앉아서 잡담의 소재쯤은 몇 개라도 만들 수 있는 둘이었으나, 술에 취한 지금은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그리고 침묵은 미묘한 분위기로 둘을 이끌었다.
“…….”
이시헌은 금방 정신이 나가버릴 듯 겨우 정신줄을 붙잡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은 모습.
현자 본인도 이제 자신이 내뱉는 말의 문장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슬슬 잘 때다.
그 판단이 이어지기도 잠시.
얼마 가지 않아, 그녀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