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the World Tree RAW novel - Chapter 76
연옥 (4)
기다란 창대가 발치에 날아와 꽂힌다.
게이트의 바깥 그 앞에는 우뚝 솟은 거대한 성채가 보였다.
‘……이건.’
부가의 설명 없이 떨어진 성문 앞.
주위에는 혐오스럽기까지 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절대 좋다고 할 수 없는 썩어빠진 경관.
석재 성벽의 아래로 삐져나온 쇠 파이프에서는 퀴퀴한 녹물이 새어 나오고, 군데군데 흐르는 괴이한 토사물에는 토악질이 절로 나왔다.
목재 하나 사용되지 않은 고철의 성에는 분명 무언가 도사리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눈으로 봐서는 도저히 사람이 살 수가 없는 척박한 환경이었다.
시련이라고는 하나 무엇을 하면 되는가.
돌연히 떠오른 의문은 곧 전조 없이 시작된 위협에 사라지고야 말았다.
-번쩍!
긴 창살이 허벅지를 꿰뚫는다.
“……!”
녹이 슬어있는 날이 근육 사이를 비집고 관통해 상처 부위를 넓힌다.
극심한 격통이 몰려왔다.
“윽, 아아아악!”
깨닫고 보니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충분히 많은 고통을 경험해왔고 버텨냈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고통은 처음…… 아니 그보다 더 아프게 느껴졌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땀. 세차게 흔들리는 손.
끊어진 힘줄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벌벌 떨다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한참을 호흡했다.
“하, 흐… 후욱. 흐으”
눈앞에 새빨개진다.
눈두덩이 아래로 미지근한 액체가 흐른다. 조금이라도 신경을 풀면 정신이 끊어질 것 같았다.
버텨라. 버텨내자.
이보다 더한 것도 몇 번을 견뎌내지 않았던가.
속으로 그 생각 만을 수십 번 되새긴 끝에야 겨우 허벅지를 향해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핏, 피익.
마구 피를 뿜어내는 상처 부위. 후들대는 손으로 창대를 잡고 천천히 뽑아낸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뽑아버리고 싶었으나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중간에 몇 번이나 멈추고, 이윽고 창날이 허벅다리의 아랫부분에 걸쳤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살을 저며내는 고통을 느끼며 천천히 날 부분을 뽑아냈다.
-픽.
짤막한 공기 빠지는 소리. 동시에 벨트에서 포션을 꺼내 든다.
-틱. 힘이 잘 들어가지 않은 탓에 꺼내든 첫 번째 포션은 손에서 빠져나가 힘없이 피 웅덩이를 굴렀다. 다시 뽑아낸 두 번째 포션을 이로 뚜껑을 뜯어내 상처 부위에 부었다.
고통이 점차 사그라든다.
“하, 하, 흐.”
머릿속으로 천도의 얼굴을 떠올린다.
“…….”
치유의 권능으로 재차 상처를 치유하며 나는 핏물 위에서 일어났다.
떨어뜨린 포션을 다시 벨트에 매고, 절반 쯤 남은 포션은 그대로 마셔 없애버렸다.
-꿀꺽, 꿀꺽.
빈 포션을 바닥에 내던지고 손등으로 턱을 닦아냈다.
“……이거.”
쉽지 않은데.
몸에 묻은 핏물을 털어내며 얼굴을 닦아냈다.
피투성이가 된 방호복은 이미 보잘 것이 못됐다.
한 번 돌아갈까.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으나 곧 마음을 고쳐먹고 흐트러진 자세를 고쳤다.
“스으읍”
호흡을 정돈하며 다시금 성채를 눈에 담았다.
나 혼자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하필 걸려도 그 여자들의 목이 걸린 일이다.
포기란 있을 수 없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빼서는 안 된다.
나는 앞으로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번쩍!
섬광이 일었다. 전투형 신체조차 감지하지 못한 쾌속의 투창.
오직 스스로의 직감만으로 몸을 옆으로 내던졌다.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창대가 뒤편의 바닥에 내다 꽂혔다.
-스스스스.
전조도 뭣도 없는 무자비한 공격. 규칙 없이 쏟아지는 그것이 만약 급소에 박힌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온몸이 오싹해졌다.
흙투성이의 몸을 일으켜 다시 앞으로 움직였다.
기이한 소리가 난 것은 그때였다.
-긱, 기기기긱.
귀에 쨍하게 울린다. 불협화음, 마치 기계의 톱니가 잘못 맞물려 내는 소리같다.
알 수 없는 곳에서 쏟아진 투창. 그 뒤에 이어진 괴이한 음성.
성안에 무언가가 있다는 확신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기이이, 이이익, 이이이이이- 이이.
-킥.
-기이이익.
섞여 들어간 웃음소리. 떠올리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그것이 내 머릿속에는 자연히 해석되어 들려왔다.
[ 어리석은 세계수의 종자여. ] [ 왕의 혜의를 받고도 썩은 고목의 뿌리를 자처하는가. ]번쩍!
다시금 내려진 투창. 고개를 돌려 그것을 피해낸다.
이번에는 충분히 내 속도로 반응해낼 수 있었다.
[ 나무의 밑동 아래서 텃세를 부리려느냐? ]“누구냐.”
[ 돌아가라. ]내 말에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놈은 기계적인 목소리로 응답했다.
“제약은?”
제약을 풀어주기만 한다면야 몇 번이고 순순히 돌아갈 생각이 있었다.
천도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나는 실력의 완숙함이 아닌, 그 여자들의 목숨을 살리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 ……. ]그러나 놈은 태도를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것으로 대답은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저벅.
결의를 지닌 채 한 발자국 발을 내딛는다.
살을 에는 듯한 돌풍이 돌연히 솟구쳐 내 몸을 휩쓸었다.
-휘이이이이이잉!
바람에 밀려나면서도 발을 한 번 더 뻗는다. 꽉 깨문 잇새 사이로 핏물이 흘렀다.
손을 뻗어 대각선으로 한 차례 휘두른다.
마력을 끌어내 바람의 흐름을 뒤바꾸어, 위에서 쏟아지는 창의 궤도를 틀어버렸다.
-후둑, 투두둑!
몇 개의 창이 바닥에 내다 꽂히고. 나는 두통에 머리를 쥐어 쌌다.
약간의 간섭만을 했을 뿐인데도 벌써 마력이 바닥을 보였다.
제약의 무게에 따라 난관이 달라진다면, 천도의 목을 바쳤으니 내 앞에 당도한 난관은 필히 불가능의 영역에 가까우리라.
나는 마력이 응축된 알약을 하나 꺼내어 씹었다.
여의치 않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준비는 해둔 지 오래였다.
-프스스스.
그런 내 앞에 수 마리의 엔트가 바닥에서 솟아올랐다.
“긱, 기기긱 긱.”
쭉 길게 찢어진 다리를 이루는 뿌리나 가지들, 썩은 나무 같은 몸통의 모습은 일전에 보았던 엔트와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전의 엔트가 자신의 생명을 불태우는 감각이었다면, 지금은 그저 빈 쭉정이를 보는 느낌일까.
‘겨우살이.’
목에 돋아난 기생 식물을 보니, 주도권을 빼앗긴 것이 분명했다.
‘저것에 당하면 저렇게 되는 건가.’
부아가 치민다.
조금 더 파악하고 싶은 게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러지는 못했다.
‘염병할 것들.’
-파악!
사라지는 놈들의 형체. 나는 생각을 끊어내고 양손에 마력을 끌어모았다.
명치를 향해온 엔트의 주먹을 몸을 돌려 피해냈다.
“기긱!”
급한 공격에 자세가 흐트러진다. 나는 놈의 팔꿈치를 잡고 그대로 돌려버리려 하였으나, 상상 이상의 경도에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줄기가 상당히 억세다.
-파앙! 파앙!
공기 사이를 찢어대며 채찍처럼 끈질기게 나를 노려오는 수목의 뿌리.
겨우 회피한 나는 거리를 벌려 천천히 그 실력을 가늠했다.
‘못 이기겠는데.’
눈앞의 엔트들은 이전에 상대했던 놈과 확연히 다른 센스와 힘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내 힘은 당시로부터 크게 발전하지 못한 상태.
턱없이 부족한 근력과 마력. 그것을 실감하며 혀를 찼다.
나는 캡슐형 상비약을 꺼내 입에 물었다.
엔트는 그런 자그마한 행위조차 봐줄 수 없다는 듯, 순식간에 다가와 주먹을 휘둘렀다.
-콰앙!
두 팔을 가로 지어 공격을 막아내자 전신에 충격이 가해진다.
놈의 가지에 돋아난 잔가시들이 피부를 뚫고 들어가 마력의 흐름을 어지럽혔다.
-촤학!
낭자 하는 피.
조금씩 공격이 읽히지만, 그럼에도 승산이 보이지 않았다.
마물은 손속을 봐주지 않는다.
금방이라도 내 목을 으스러뜨릴 것만 같은 살기에 나는 바닥을 박차고 다리를 돌려 놈의 목을 찼다.
“긱.”
목표는 겨우살이.
마력을 잔뜩 머금은 발차기가 놈의 뒷목에 적중한다.
-파앙!
나무껍질이 비산하고, 괴기스런 비명이 하늘 위로 울려 퍼졌다.
“기이이이이익!!”
몸을 마구잡이로 비틀어대는 엔트.
놈은 곧 녹아내리듯 그 자리에 비료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약점을 찾았다.
하지만-
“기이이익!”
짧았던 환희는 곧 합류한 엔트에게 상체를 잡히며 끝이 나고 말았다.
내 몸을 꽉 쥔 두터운 수목의 손은 명치로부터 등 뒤의 척추까지 이어져 있었고. 놈은 죽은 겨우살이의 복수라도 하듯, 있는 힘껏 나를 땅에 내리꽂았다.
-콰앙!
고통에 아찔해지는 정신.
거대한 크레이터가 일었고, 그대로 흙 안에 파묻혔다.
기다란 손톱이 배를 뚫고 들어가자 그 사이로 핏물이 죽 흘러나왔다.
“커헉!”
폐가 한순간 꽉 조였다가 풀어진다.
귓가에는 알 수 없는 이명이 맴돌았다.
사경이 눈에 스치는 순간, 가까스로 바닥에 손을 얹고 마법을 발동시켰다.
-쿠구구구구!
바닥에서 솟아오른 불기둥.
엔트의 시야를 가림과 동시에 바람을 일으켜 그 자리에서 벗어난다.
부유한 자신의 신체를 최대한 먼 곳에 내동댕이친다.
-데구르르.
빈사 상태로 한참 들판 위를 구른 나는 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콜록, 커흐…….”
내장을 다쳤는지, 입안에서 새빨간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혹시나 넣어두었던 캡슐형의 약조차도 제대로 씹을 수 없는 상황.
벨트를 뒤져 포션 몇 개를 신체 위에 덧뿌리고, 권능으로 상처를 메꾸었다.
“하… 흐.”
점차 아물어가는 피부들.
그제야 숨이 좀 진정이 되었다.
자리서 몸을 부르르 떤 나는, 피투성이가 된 몸을 내려다보며 비소를 머금었다.
스승의 얼굴을 떠올린다.
“…한 번 더.”
아직 죽을 생각은 없었다.
*****
넝마가 된 방호복, 끊어진 벨트, 피에 젖은 전신은 힘없이 축 처지고. 눈은 초점이 엇나갔다.
목적 없는 시련은 그저 보기 흉한 흉터만을 남겼다.
힘들 거다. 천도의 씁쓸한 한 마디가 이제야 공감이 간다.
역시 겪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후.”
엔트들의 시체, 그 위에 홀연히 앉아 시린 밤공기를 마시고 있으니 코끝에 혈향이 묻어나왔다.
[ 돌아가라. 이곳에 시련은 없으니. ]머릿속에 들려오는 직역된 문장들.
나는 사투가 벌여진 현장을 보며 반쯤 잘린 팔뚝을 권능으로 치료하고 있었다. 뚝뚝 떨어지는 핏물을 볼 때마가 어지럼증이 도졌다.
포션은 없었다. 천도가 챙겨준 포션은 벌써 진즉에 다 써버렸으니.
아티펙트 역시 처절한 전투 중에 고장이 나거나 박살이 나버렸다.
“하.”
씁쓸한 한숨 한 번.
오늘 내가 이곳에서 얻어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무력감뿐이었다.
대체 뭐가 문제였지. 노력이 부족했을까?
아니면 머리 굴리기를 게을리 한 걸까.
거듭 생각해도 이유는 알 수 없었고, 아마도 그것은 평생 답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일단…돌아가자.’
쉼터로 들어가자.
천도가 기다리고 있으니,
시체를 밟고 땅으로 내려온다. 몇 번이나 다리를 절뚝대며 게이트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결국, 나는 저 고철성의 문턱조차 밟아보지 못했다.
그곳에 닿을 수 있을까.
약해빠진 생각을 억지로 씹어 삼켰다.
몇 번이고 넘어지며 게이트에 도달했다. 뒤를 한 번 돌아 봐 성채를 눈에 담은 나는, 게이트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1일차.
성과는… 없음.
-웅웅!
시야가 역전되었다.
나는 쉼터에 도착하자마자 스러지는 나무처럼 그곳에 무릎을 꿇었다.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있던 정신 줄이 맥없이 탁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스승…님. 어디 계십니까?”
“여기 있다. 네가 떠났던 그때부터,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럽니까… 죄송합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눈이 잘 안 보입니다.”
“그런 것 같구나. 눈동자가 새하얗군. 독이라도 당했나?”
엔트 중에 그런 걸 사용하는 놈들이 있기는 했었지.
피식 웃으니 곧 볼에 따스한 손바닥의 온기가 느껴졌다.
흐린 눈에 담긴 여성의 실루엣이 점차 선명해졌다.
“칠칠맞구나. 이런 독에나 당하다니.”
천도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어서 와라.”
“스승님 저 성과는…”
“말할 필요 없다. 돌아온 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구나.”
가슴을 녹이는 그 말에, 나는 그만 긴장이 풀려 몸에 준 힘을 풀고 말았다.
그런 내 몸을 천도가 폭 받아주었다.
커다란 가슴에 얼굴이 묻힌다.
“피를 많이 흘렸구나.”
“……예.”
“고생했다. 성장은 그렇게 하는 거다.”
지난 싸움에 피를 너무 흘려 창백해진 탓일까.
내 머리를 쓸어 내리는 천도의 손은 따뜻해서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