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ergency Exit to Freedom RAW novel - Chapter 7
7]
정현은 그가 모는 자동차 시트에 앉아 점점 가까이 보이는 아름다운 섬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육지와 이어진 다리는 휘황찬란한 빛으로 감싸여 아름다운 색채를 뿜어대고 있었다. 점점 해양공원에 연결된 다리 음지교 가까이 다가가자 섬 전체가 마치 물위에 떠있는 커다란 궁전을 연상시켰다.
정현이 그 아름다운 불빛에 매혹되어 있는 사이 그가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그녀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조명이 화려해서 그런가…….더 예뻐 보이는군.”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녀는 그의 강렬한 눈빛에 사로잡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자. 이러다간 행사 참석도 할 수 없겠군.”
그가 서둘러 그녀에게서 손을 떼고 차에서 내리자 그녀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 풍성한 치마단을 여미며 높은 차체에서 내리려 천장에 달린 손잡이를 붙들었다. 그때 어느 틈에 조수석으로 돌아온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부축해주었고 바닥으로 조심히 내려선 그녀의 허리를 감싸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긴 그가 입술을 내려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너에게 손대지 않는 게 왜 이리 힘든 거지?”
정현은 빨개진 얼굴을 급히 숙이며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저기 사람들이 보잖아요.”
“그래서?”
그가 짓궂게 웃으며 그녀를 놀리자 그녀도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기 보이는 남자가 당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당신 부하 아니에요?”
그녀의 말에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때 자신을 쳐다보는 눈길을 느꼈는지 마찬가지로 해군정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필승.”
“음. 상사. 지금 온 건가?”
“네. 소령님.”
상사라고 불린 남자가 자신을 탐색하듯 바라보자 정현은 슬그머니 자신의 허리를 두르고 있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몸을 틀었다. 그러자 그가 더욱 그녀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며 그녀를 자신의 옆으로 끌어당겼다.
“인사하지. 여기는 유정현. 오늘의 내 파트너고 이쪽은 내가 이끄는 팀의 강석환 상사야.”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강석환 상삽니다.”
강석환 상사는 그녀를 향해 밝게 인사를 건네며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행사에 참석하지 않기로 유명한 정지혁 소령이 나타난 것만도 놀랄 일인데 거기다 여자까지…….꽤 아름다운 여자였다. 부드러운 소재로 만들어진 짙은 보라빛 원피스가 그녀의 날씬한 몸매를 강조하듯 알맞게 어우러졌고 상체와 달리 풍성한 치마 단은 가끔씩 부는 부드러운 미풍에 그녀의 매끈한 다리를 살짝 살짝 휘감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가 자신의 소유임을 분명히 하려는 듯 그녀의 허리에서 손을 떼지 않고 바짝 끌어당겨 안은 대장이 그녀를 바라보는 표정은 누가 보더라도 상대여자에게 깊이 빠져있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강상사는 이 놀라운 빅뉴스를 팀원들에게 알리고 싶은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이미 도착해 있다는 다른 팀원들과 방금 전 형수님과 함께 해양공원으로 통하는 음지교를 건너간 박상원 중위에게 이 사실을 빨리 알리고 싶었다.
“아. 그럼 두 분이서 천천히 오십시오. 전 팀원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먼저 가 있겠습니다.”
급히 말을 내뱉고 뒤돌아서 뛰어가는 상사를 바라보며 정현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뭐 제가 잘못한 것 있어요?”
“훗. 아니. 널 보고 저러는 게 아니야. 날 보고 놀란 거지.”
“………..?”
“가지. 오늘 저녁은 바람도 불지 않는군.”
그가 딴청을 부리며 그녀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정현은 저쪽 멀리서 중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그를 확인하며 잠깐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흥겨운 음악회가 끝나고 뷔페가 차려져있는 이 전시함정으로 오기 전에 보았던 한적한 오솔길이 생각났다. 그 오솔길 끝에 바닷가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 곳이라면 잠시라도 쉴 공간이 있을 듯싶었다. 정현은 다시한번 그가 있는 쪽을 쳐다보며 그에게 알리고 가야할지 고민했다.
중장이면 해군에서 가장 높다는 대장 바로 밑인데 그런 분과 대화중에 자신이 끼어드는 것도 살짝 부담이 되었다. 정현은 갈등하다 그래도 그에게 말을 하고 가야할 것 같아 그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저쪽 멀리서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아버지의 모습을 확인한 정현은 몸을 홱 돌려 서둘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편안하고 즐거운 이 밤을 아버지 때문에 망치고 싶지 않았다. 처음 공원에 들어서 이미 인사를 한 뒤였고 음악회 내내 아버지의 탐색하는 눈길을 받은 정현은 더 이상은 아버지로 인해 긴장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더욱더 걸음을 빨리하며 함정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소령은 내가 사정해서 오라 해야 오나?”
“그럴 리가요. 중장님.”
“그라믄 우째 한번 놀러도 안 오노?”
“바쁘시잖습니까?”
“누가 바쁘다카대? 내 취미생활이 맘에 드는 놈들 모아가 밥 묵고 노는 긴데 소령은 중장인 내말을 콧등으로도 안 듣노 말이다! 내가 그래 물렁해 비나? 어이 대령. 내 말이 틀맀나?”
”아닙니다. 중장님. 이참에 소령 기합 좀 줄까요?“
“됐다 마. 내 싫다는 놈 어거지로 내 좋아해라 안한다.”
지혁은 억지를 부리는 중장을 웃음 띤 얼굴로 마주보았다.
“그라고 아까 같이 온 처녀는 누고? 사귀는 아가씨가 있었나?”
“네.”
지혁은 중장의 질문에 대답하며 조금 전 그녀가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어데 갔노? 데고 와봐라. 다시 천천히 함 살피 볼란다.”
“네. 중장님.”
지혁은 중장에게 대답을 하며 그녀가 함장 끝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지혁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중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녀가 사라진 방향으로 빠른 걸음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런 정지혁 소령을 바라보던 중장이 옆에 서있는 대령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뭐꼬? 대령은 정지혁 소령 연애하는 거 알았나?”
“아니. 몰랐습니다. 그런데………”
“와?”
“함께 온 아가씨가 유철웅 준장의 딸입니다.”
“뭐라고?!”
인상을 팍 찡그리는 중장과 걱정스러운 표정의 대령이 그가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았다.
정현은 함정을 내려와 아까 봐두었던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모두들 함정의 뷔페파티에 참석하고 이곳은 사람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작은 오솔길 양옆으로 커다란 나무들이 우거져있었고 함정이나 섬 전체에 밝혀진 불빛으로 어둡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정현은 길 끝에서 밀려오는 바다 내음에 한껏 숨을 들이마시며 맑은 공기를 하나 가득 가슴으로 들이켰다. 그리고 바닷물이 밀려오는 파도소리가 나는 곳을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곧이어 나타난 모래바닥에 자신의 굽 높은 구두가 푹푹 빠지자 그녀는 신발을 벗어들고 맨발로 모래의 감촉을 즐겼다.
“파트너를 버리두고 혼자 여기서 뭐하는 거지?”
정현은 나지막이 들리는 굵은 저음에 깜짝 놀라며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맙소사. 놀랐잖아요!”
“훗. 혼자 이런 곳에 올 용기 있는 아가씨가 이 정도로 놀라다니.”
“누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고요.”
정현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그를 살짝 흘겨보았다. 그가 담배 하나를 꺼내어 입에 물자 정현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피우려고요?”
“음. 왜?”
“별루. 바다향이 진한데 담배 향으로 망치고 싶지 않아요.”
그가 자신의 입에 걸려있는 담배를 빼어 들더니 잠시 쳐다보고 다시 담배갑 속으로 집어넣었다.
“이러다간 담배도 끊으라고 하겠군.”
“끊으라면 끊을 건가요?”
그녀가 입가에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장난스럽게 묻자 그가 그녀의 웃는 표정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네가 끊으라고 한다면.”
정현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다가오는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밤의 그는 눈부시게 하얀 해군정복을 갖춰 입고 있었다. 그의 단단한 몸에 딱 맞게 재단된 해군복은 그의 어깨를 더욱 넓게 보여주고 있었고 평소보다 더욱 위압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의 어깨에 달린 견장의 황금색 줄 3개가 그의 계급을 말해주고 있었고 어깨 바로 밑에는 형형색색의 장식들이 달려있었다.
정현은 가만히 손을 들어 올려 그의 오른쪽 가슴 이름표 위에 있는 황금색 봉황 표식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이건 뭐죠? 이런 건 처음 보는데……”
아버지 덕분에 해군 정복에 달려있는 여러 가지 장식과 표식을 알고 있는 정현이었지만 그의 가슴에 달려있는 봉황 표식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훗. 대통령 표창 받은 상징.”
“와……….대통령 표창요?”
“음.”
정현은 그의 얼굴에 드러나는 자부심에 살짝 웃음을 머금었다.
“뭘 했는데요?”
“별로 재미없을 걸?”
“말해 봐요. 재미있고 없고는 내가 결정해요.”
“몇 년전 동해 잠수함 침투사건 때 공을 좀 세웠지.”
“잠수함? 그때 북한 잠수함이 우리 해역으로 침범했던 그 큰 사건요?”
“음.”
“잠수함을 폭파 시키기라도 했어요? 아니. 그때 뉴스에서 우리 해군이 그 잠수함을 장악하고 인양했다는 보도를 들었는데……….그러고 보니 그때 아버지가 그 사건으로 굉장히 흥분 하셨어요. 아버지가 소속된 해군특수전여단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쿡. 폭파? 이봐. 이 순진한 아가씨야. 잠수함이 얼만데 함부로 폭파를 시켜?”
그가 장난스럽게 그녀의 볼을 툭 건드리며 웃자 그녀도 따라 웃음을 터트렸다.
“훗. 그런가요? 하지만 적이잖아요?”
“안 돼. 적의 잠수함이라도 그 잠수함 하나를 분석하면 북한의 해군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엄청난 정보를 얻게 되는 거지.”
“흐음…….그렇군요. 어쨌든 당신이 그 잠수함을 장악하는데 큰 역할을 해서 대통령 표창까지 받은 거로군요?”
“그래.”
그가 대답을 하며 그녀의 허리를 잡고 자신의 품속으로 끌어당기자 정현은 그의 단단한 어깨에 손을 얹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해군이라는 걸 자랑스러워하는군요?”
“아니. 그냥 해군이라서가 아니라 난 대한민국 해군이기 때문에 자랑스럽지.”
자신의 입술에 거의 맞닿은 채 중얼거리는 그의 입술을 느끼며 정현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가 달콤한 맛을 보기라도 하는 듯 그녀의 입술을 살짝 빨아들이듯 키스하자 자신의 몸속에 짜릿한 전류가 흘렀다.
그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내일부터 보름 동안 전지훈련이다. 만약 내게 급히 연락할 일이 생기면 여기 이 번호로 해.”
정현은 그가 주는 작은 명함을 받아들었다.
‘한국 시큐리티’
“그쪽으로 전화해서 내게 연락하고 싶다고 하면 돼.”
“………보름?”
“음.”
정현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보름씩이나 그가 떠나있다는데 왜 자신이 이런 마음이 드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유정현………..”
“………?”
“훈련에서 돌아오면…………………..널 가질 거다.”
“!!………..”
정현은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했던 ‘그녀가 원할 때’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원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마. 너도 원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자신의 입술을 내려 다시 그녀에게 키스하기 시작했다. 그때 밤하늘에 울리는 폭죽소리와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는 화려한 불꽃이 그들의 머리위로 아름답게 펼쳐졌다.
타타타타타
400m 상공의 UH-60헬기에서 차례로 뛰어내린 다섯 개의 낙하산이 하늘에 펼쳐졌다. 아래로는 푸른 바다가 펼쳐져있었고 바다 위에 떠있는 LST(상륙함)에서는 붉은 유도탄의 연기가 가득 피어올랐다. 강한 바람으로 인해 목표 지점으로의 착지가 쉽지 않음에도 그들은 정확히 자신들이 탈 IBS(고무보트) 옆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곧이어 모든 대원이 IBS에 승선하자 지혁은 수신호를 보내 노를 젓도록 명령했다.
200~300m의 높은 파도가 이는 가장 위험한 구간을 통과해야하는 이 훈련은 팀원 간의 호흡이 맞지 않으면 순식간에 보트가 뒤집히기 때문에 팀워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여러 팀이 경쟁하듯 훈련하는 방식으로 팀 간의 IBS가 서로 충돌해 뒤집히기도 했지만 정지혁 소령이 이끄는 제 3팀은 단 한번의 뒤집힘도 없이 무사히 해안으로 상륙했다.
상륙에 성공한 제 3팀의 대원들은 젖은 몸 그대로 보트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 해안 깊숙이 빠른 동작으로 이동했다. 수풀 사이로 보트를 숨긴 그들은 잠수복을 벗고 전투복 차림으로 MP5 기간 단총을 손에 들고 두 번째 훈련에 돌입했다. 해안가에 부설된 가상의 적의 무기고를 탐색해 폭파하는 훈련은 적의 시설물을 파괴하고 적을 교란시켜 후에 해군의 공격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기습 공격 훈련이었다.
정현은 시청에 들러 정후의 비자를 신청해놓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미 자신과 어머니의 여권과 비자는 만들어 놓은 채였고 먼저 떠날 정후의 비자가 급한 문제였다. 다행히 5일후면 비자가 나온다고 하니 별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아직 정후가 제대하려면 20일은 넘게 남았으니 시간은 충분했다.
정현은 골목길을 오르며 그를 생각했다. 자신이 떠난다는 사실을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했다.
핏. 유정현. 그가 널 붙잡기라도 할까봐……? 착각 하지 마. 그가 내게 느끼는 감정은……………….그가 내게 느끼는 감정이 뭐지?……..모르겠다. 그가 자신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그럼 나는?…….내가 그에게 느끼는 감정은 뭐지?………….
정현은 생각에 잠겨 걷느라 자신의 집 담벼락에 서있는 남자를 스쳐지나갔다.
“누나!”
!!
정현은 고개를 홱 돌려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정후!………네가 왜? 아직 20일이나 남았잖아?”
그녀의 물음에 동생이 팔을 살짝 들어보였다. 깁스라도 했는지 붕대에 칭칭 감겨져 있는 팔이 보였다. 정현은 급히 동생을 끌고 다른 집 담벼락으로 숨어들었다.
“어떻게 된 거야? 다쳤어?”
“어. 조금. 아주 약하게. 족구 하다가 넘어져서 뼈에 살짝 금이 갔어. 그래서 좀 일찍 제대했어.”
“휴……난 또 네가 탈영이라도 했나 했어. 많이 다친 거 아니지?”
“아냐. 누난 2년 만에 동생을 보는데 한번 안아주지도 않아?”
그제야 정현은 정후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근 2년 만에 보는 동생이었다. 아버지가 두려워 거의 모든 휴가도 반납하며 집으로는 발걸음도 하지 않았던 동생이었다. 군대에 제대로 적응시키기 위한 아버지의 명령이기도 했지만 정현도 그가 집에 오는 걸 반대했다. 군대에 가있는 동안만이라도 아버지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 그게 차라리 나았다.
“지난번 누나 편지 때문에 집에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이었어.”
“잘했어. 들어가면 안 돼. 우선 여관에서 생활해. 비자가 나오면…..여권 신청했지?”
“어. 지난번 외출에서…….”
“잘했어. 비자만 나오면 바로 떠나.”
“나 혼자서?”
“우린 걱정 마. 네가 급해. 네가 제대한 걸 알면 아버지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아버지라는 단어가 나오자 정후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벌써 23살이나 먹었지만 아직도 아버지를 저렇게 두려워하는 동생을 정현은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우리 걱정 말고 어서 가. 여기 이러고 있다가 아버지라도 맞닥뜨리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는 거야. 여관에 짐 풀고 휴대폰으로 연락해. 엄마한테는 아직 연락하지 마. 네가 떠나고 나면 내가 말씀드릴 거야. 알았지?”
“알았어. 누나.”
머뭇머뭇 거리며 움직이지 않는 동생을 밀며 정현은 더욱 빨리 재촉했다.
“어서 가. 어서.”
정현은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는 정후를 바라보며 일이 갑자기 급히 진행되자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현은 정후가 사라진 골목 끝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제 정후를 보내고 나면 자신도 떠날 것이다. 이제 마음껏 세상을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살 것이다. 아무 미련도 없이 떠날 수 있었다………..그만 아니라면……..
!!……..
정현은 갑자기 그를 영원히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심장이 멈추는 것 같은 슬픔이 몰려들었다. 어째서……….어째서 그를 떠난다는 생각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거지? 왜? 그가 도대체 자신에게 어떤 존재이기에………..
정현은 두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그로 인해 계획을 수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단 하나의 소원이었다. 아버지를 벗어나는 것. 권력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라면 가족조차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였다. 어릴 땐 그저 무섭기만 한 아버지를 거역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젠 아니었다. 아버지가 아무리 한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하더라도 떠나면 그만이었다. 떠나야해! 그는 날 붙잡을 수 없어! 절대로!!
하지만 정현은 이성의 굳은 결심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동자는 한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지혁이 이끄는 제 3팀은 아군의 해역에 부설된 적의 기뢰를 탐색해 제거하는 마지막 훈련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후아~ 이제 끝났네.”
“그래도 한겨울 동해 훈련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강석환 상사의 탄식 섞인 말에 이강석 중사가 맞장구를 쳤다.
“힘드나?”
“예? 하하하 훈련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시간이 더디 가는 것 같습니다.”
갑작스러운 대장의 질문에 이중사가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훗. 나도 그렇다. 시간이 너무 늦게 가는군.”
!!
말을 마치고 샤워실로 들어가는 대장의 뒷모습을 대원들이 충격어린 눈동자로 쳐다보았다.
“방금 들으셨습니까? 대장님 말씀하시는 거?”
“어……….”
얼떨떨한 목소리로 이강석 중사가 묻자 강석환 상사도 마찬가지로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놀라기는 박상원 중위도 마찬가지였다. 정지혁 소령은 훈련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 하겠지만 UDT/SEAL 제 3팀의 정지혁 소령에게는 되는 소리였다. 힘든 훈련일수록 그의 흥미를 더 끌었고 위험한 작전일수록 그의 전투력이 더 크게 발휘되었다. 그런 사람이 훈련 시간이 더디 간다고 느낀다니……..오랜 시간 같은 팀으로 활동해온 박상원 중위마저 저런 대장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지혁은 샤워를 마치고 전화가 있는 중앙 작전실로 갔다.
“필승.”
“음. 수고가 많다. 전화 한통 쓰고 싶은데?”
“예. 쓰십시오. 소령님. 전 잠깐 나가있겠습니다.”
보초를 서고 있던 하사를 내보내고 지혁은 탁자 위의 수화기를 들었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나야.”[!……………..돌아온 건가요?] “아니. 아직. 내일 출발할 거야.”
[……….어디예요?] “훈련 중이야. 장소는 묻지 마. 극비니까.”
[풋. 훈련 장소도 극비예요?] “음. 해군의 전투력이 적에게 노출되면 안 되니까.”
[그렇군요…….] “뭐하고 있었어?”
[그냥 누워있었어요. 이제 자려고요.] “보고 싶다. 유정현.”
[!!……………..] “유정현.”
[………네……..] “내일 당장 보고 싶지만 너무 늦게 도착할 것 같군. 이틀 후 집 앞으로 갈테니 기다려.”
[네……..] “……..마지막 만났을 때 내 말 기억하나?”
[………..] “널 원해. 이틀 후에 만나면 널 완전한 내 여자로 만들 생각이다……..싫으면 지금 말해.”
[……….] “아무 말 없다는 건 허락인가?”
[……………..기다릴게요.] “………….그래………..젠장. 이틀을 내가 어떻게 참아낼지 의문이군. 끊는다.”
지혁은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슬쩍 미소를 띠웠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를 향한 끌림을 막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젠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누구의 딸이든 상관없었다. 자신에게 그녀는 누구의 딸이 아니라 단지 자신이 꼭 가지고 싶고 지켜야하는 유일한 여자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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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좀 짧았죠? 오늘은 만족하실까요………?
맞지 않는 내용 조언해 주신 레이님 감사합니다. 제가 외국을 딱 한번 다녀왔는데 그것도 수년전 얘기라 여권과 비자가 헷갈렸네요….하하하……죄송합니다. 수정했습니다.
좀더 철저히 자료조사를 해야하는데 아는 내용이다 생각되어 그냥 글을 쓰다보니 이런 실수가…너그러이 용서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