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213
213====================
징벌
– 어딜 도망가려고? –
허나 땅과 융화되려는 할드의 앞에, 어느새 나타난 남색 눈동자의 용인족 소년이 손을 내뻗었다. 공기를 찢으며 날아든 손아귀가 구울 로드의 턱주가리를 부여잡고 그대로 밀어붙여 바닥에 처박는다.
꽝!
육체와 대지가 부딪혔다고는 믿을 수 없는 굉음, 그 강건하기 짝이 없는 신체를 가진 구울 로드가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온몸으로 사기를 뿜어냈다. 가슴에 박힌 수정체에서 무시무시한 흑마력이 용솟음쳐 최상급 언데드 신체에 가해진 타격을 수복하고 방어력을 올린다.
[찢겨라, 갈가리!]바로 그때 언어가 의지를 담아 형상으로 쏘아진다. 직격당한 칙칙한 암녹색 육체가 보이지 않는 거인이 잡아뜯는 것처럼 끊어지기 시작했다. 팔다리가 떨어지고 몸통마저 삼분지일 이상이 뜯겨나가 그 안의 시커먼 내장이 아무렇게나 흩뿌려진다.
– 꺼억! –
제대로 된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는 할드,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듯 미약한 모습.
허나 그 역시 파란색 등급의 괴물이자 언데드 군단의 지휘관으로서 비장의 한 수 정도는 감추고 있는 존재였다. 극심한 손상이 가해진 육체의 가슴팍에서 수정체가 갑작스레 폭발했다.
사방에 널린 시체들의 살점과 뼛조각이 가히 무시무시한 기세로 회오리치며 그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레야가 양손을 사방으로 휘두르며 날개를 펼쳐 뒤로 물러서자, 그 경로와 뻗은 손을 따라 화염이 폭풍처럼 몰아치며 사방을 불태웠다. 허나 그럼에도 몰려드는 뼈와 살점의 폭풍은 그 기세를 죽이긴 커녕, 오히여 불이 붙어 한층 더 흉포한 모습으로 거칠게 모여들었다.
– 끄아아아아아! –
고통인지 분노인지 모를 고성과 함께 화염에 휩싸인 죽음의 잔해들이 한곳에서 거대한 덩어리로 화한다. 안 그래도 끔찍스러웠을 그것은, 불까지 붙은 상태라 더더욱 위협적인 모습으로 포효하며 막 생겨난 거대한 발을 한 걸음 내딛었다.
땅이 울리고 진동이 물결처럼 퍼지자, 구울 로드의 의지에 반응한 남아 있던 다른 시체의 살점과 뼛조각들이 일제히 폭발하며 사방으로 파편을 쏘아낸다.
–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 –
모든 소리를 먹어치우는 거대한 고함, 그와 함께 거인이 다시 한 번 걸음을 내딛는다.
그리고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날아든 레야의 강력한 마법을 시작으로 류한 토벌대의 원거리 공격이 폭풍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거대함은 그 자체로 힘이지만 동시에 약점이기도 하다.
불길에 휩싸인 시체로 된 거인의 몸 곳곳에서 폭발이 터지고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 어떤 거인이라도 금방 쓰러져야 마땅할 화력의 집중, 설령 보다 더 큰 거인이라 할지라도 일 분도 버티지 못할 만한 위력의 공세!
하지만 거인은 쓰러지지 않았다. 공격에 적중당해 너덜너덜해진 곳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비산했던 피와 살점들이 허공에 불현듯 멈춰 서 다시 거인에게 빨려들어간다. 주변의 언데드들이 블랙홀에 빨려드는 것처럼 날아들어 거인의 몸체와 합쳐진다.
그렇게 거인이 재생을 거듭할수록 점점 더 모습이 기괴해지기 시작했다.
– 뭐야? –
이번에는 아예 상반신 전체를 날려버릴 요량으로 마법을 집중하던 레야가 불현듯 인상을 찌푸렸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변화가 나타나는 모습이 보인다.
– 끄아…아! 아아아! 아아아아아-! –
이제는 거인이라고도 부를 수 없게 된 고깃덩어리의 집합체, 그것이 사방에서 돋아난 기괴한 모습의 다리와 촉수 같은 것들로 대지를 딛으며 움직인다. 원래의 경로를 틀어 시체들이 가득한 전장의 한복판으로.
“쏴! 계속 쏴!”
“완전히 박살내버려라!”
류한 토벌대는 그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도 사기를 잃지 않았으나, 무엇인가를 깨달은 레야가 급히 외쳤다.
– 멈춰! 공격을 멈춰라! –
하지만 이미 변형은 돌이키기 힘들 만큼 진행됐다. 제 형질을 모조리 잃어버린 거대한 군육체(群肉體), 한때 구울 로드 비장의 권능으로 일으켜졌던 그것에서 더 없이 처절한 비명이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공격을 멈춰라!”
“뒤로 후퇴! 후퇴!”
뒤늦게 레야의 전언을 받은 김인환이 재빨리 판단을 마치고 토벌대를 후퇴시켰다.
하지만 군대라는 것이 원한다고 바로바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닌 바, 제 아무리 효율적인 명령체계를 갖고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할지언정, 방금 전까지 전력으로 공격하던 대상에게서 무조건 후퇴하라는 명령이 즉각적으로 수행될 리 없다.
결국 토벌대가 완전히 화력을 거두고 물러서기 시작했을 때는 더 이상 돌이킬 수가 없었다.
– 노린 건가. –
하늘로 떠오른 레야가 완전히 이지를 잃고 주변의 언데드들을 닥치는대로 흡수하기 시작한 그 기괴한 군육체를 바라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왕자가 일으켰던 공허의 힘을 받아들인 언데드, 과감하게 그것들을 흡수해버린 권능체, 쏟아진 공격에 파괴와 회복을 반복하며 급속도로 감염되어버린 로드 할드.
놈은 왕자의 존재를 알았다. 공허 언데드의 존재 역시 알고 있었다. 하급 언데드도 할 수 있는 정신의 공유를 최상급 언데드인 그는 당연히 할 수 있다. 리치의 지혜로 해석이 완료된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주 쉬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 역시. 그야말로 최악의 도박이다.
– 까아아으으으…! 끄아아……! –
여전히 전장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는 비명성과 함께 거대한 군육체가 점점 더 덩치를 불려갔다. 그리고 그때쯤,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던 류한의 천공성이 전장에 도달했다.
“저 고깃덩이는 놔두고 다른 놈들부터 공격해!”
날개를 펼쳐 천공성 위쪽으로 날아오른 혜진이 크게 명령을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레야가 김인환에게 전했던 말을 혜진 역시 통신 귀걸이를 통해 들었다.
자연스레 천공성에서 폭발하듯 쏟아지기 시작한 화력이 노린 것은 아직까지 채 몸을 빼내지 못한 다른 언데드들이었다. 특히 아군을 엄호하려던 골룡과 그 기수들, 그리고 듀라한 기사단에게 대부분의 화력이 쏠렸다.
놈들 역시 점점 거대해지는 군육체를 피해 퇴각하고 있었기에 도주 경로는 한정적이었고, 그 때문에 천공성의 화력을 피할 수 없었다. 하늘에서 폭우처럼 쏟아지기 시작한 갖가지 공격들이 반격을 허용치 않고 일방적으로 언데드들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후퇴하는 적을 공격할 때가 가장 많은 피해를 강요할 수 있는 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전장 중앙에서 점점 덩치를 불려가는 군육체 때문에 지상의 토벌대는 물러서기 바쁜 상태였다. 피해를 누적시킬 수 있는 것은 천공성 뿐이다.
– 저거는 좀 위험한데……? –
전장 한켠에서 몸을 피하고 있던 서승태는 머릿속을 울리는 아크리치의 목소리를 듣고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저게 위험하다고 했습니까? 당신 기준으로도?”
– 내 본신의 힘을 사용할 수 없지 않느냐? 계약자여, 도망쳐라. 저건 도망치는 것이 답이다. –
아크리치가 도망치라고 종용한다.
서승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함께 몸을 피하기 위해 왕자를 찾았다. 헌데 어디를 봐도 그가 보이질 않는다.
이미 도망친 건가?
그러나 왕자는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어느새 작은 산만하게 커진 그 시체의 덩어리 위에서 나타난 그는, 들고 있던 스태프를 그것의 몸체에 강하게 꽂으며 곧장 주문을 외웠다.
[허무를 보는 자 보임 당할 것을 각오하리니, 나 이곳에서 제물을 바쳐 빼앗긴 것을 되찾으리라.] 쿠웅-불멸의 힘을 입고 끊임없이 자잘한 시체들을 먹어치우며 증식하던 거대한 군육체, 그것이 갑작기 움직임을 뚝 멈췄다.
그 직후 어마어마한 소음에 전장 전체를 울렸다.
계속해서 거리를 벌리던 토벌대도, 도망치던 언데드들도, 그들을 쫓으며 공격을 퍼붓던 천공성의 인원들도,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기괴하고 거대한 소음에 일제히 멍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소음의 중앙에서, 허공이 찢어지고 허무가 열린다.
보랏빛 갑각질처럼 느껴지는 피부로 둘러쌓인 거대한 손아귀,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한 것이 찢어진 균열에서 튀어나와 그보다 더 거대하던 군육체를 움켜잡는다.
– 바라는 건? –
이 세상 것이 아닌 음성, 매혹적으로 들리기도, 소름끼치게 들리기도, 천진난만하게도, 어쩌면 아름답게도, 그리고 더 없이 공포스럽고 음산하게도 들리는 목소리가 묻는다. 대상은 당연하게도 왕자였다.
– ……빼앗긴 내 젊음. –
– 젊음? –
– 용모. –
– 그래. –
그리고 손아귀가 그대로 발버둥치는 군육체를 이끌고 허무 너머로 사라졌다.
세상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시간이 얼어버린 듯했던 끔찍한 감각이 사라지고, 몇 심약하거나 민감한 이들이 뒤늦은 안도감 속에서 한차례 비틀거렸다.
– 맙소사. –
아크리치가 방금 자신이 본 것을 믿지 못하는 듯한 탄성을 흘림과 동시에, 어느새 공간을 뛰어넘은 레야가 왕자의 코앞에서 나타나 두 손을 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생겨난 수십의 휘황찬란한 마법진들, 그것들이 왕자를 포위한 채 웅혼한 마력의 공명음을 흘리며 부르르 진동한다.
– 도대체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그리고 네가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는 거냐? –
살기를 담아 으르렁거리는 레야, 그에 허공을 밟고 선 왕자가 느릿하게 손을 들어 후드를 벗었다.
순금을 녹여낸 듯 고결한 느낌이 드는 황금빛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매끄러운 턱선에 이어 선홍빛 깨끗한 입술이 나타나고, 조각 같은 매끄러운 콧대와 사파이어를 박아넣은 듯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 그렇다면 묻겠다, 작은 용족이여. 달리 그것을 처리할 방법이 있었는가? –
왕자의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용모를 본 적지 않은 류한 전투원들이 일순간 넋을 잃었다.
– 허무로 존재의 역설을 먹어치운 고깃덩이를 치울 방법이, 그것의 근원 되는 공허로 던져버리는 것 외에 무엇이 있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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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현은 자신의 눈앞에 자리한 정체불명의 자들, 하나같이 거지꼴을 하고 거적떼기 같은 로브를 걸친 자들을 살피며 물었다.
“너희는 누구지? 설마 나를 기다린 건가?”
“그렇습니다. 신이시여.”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돌아든다. 그들은 세현이 갑작스레 나타나 질문을 던졌음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있었다.
세현은 장한위의 무조건 항복선언을 받아내고 천공성으로 돌아가던 와중이었다. 딱히 서두르진 않았다지만 그의 이동속도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하다. 게다가 경로 역시 딱히 정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즉 이렇게 누군가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다는 뜻이다. 설령 누군가를 마주친다 해도 원래라면 그냥 지나쳐버렸겠지만, 세현은 그들이 들고 선 현수막을 보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 신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커다란 천에 삐뚤삐뚤한 한국어로 적힌 문자가 선명했다. 이런 산중에서 저런 현수막을 나무 사이에 걸어두고 기다리고 있었으니 멈춰 서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리 올 것을 어떻게 알고?”
“저는 천쿤이라고 합니다. 학살자 페하브 대공님을 섬기는 미천한 종입니다.”
“학살자 페하브?”
“마계 북풍의 땅의 지배자이시며 중앙의 위대한 의지를 섬기는 다섯 악마대공 중 한 분이십니다.”
“……”
악마숭배자, 이들의 정체를 알겠다.
몸안에 품은 흑마력 정도야 일찌감치 알아차렸지만, 단순한 흑마법사들이 아닌 악마와 계약한 자들이었다니.
예전부터 반고가 이들 악마숭배자들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허나 이렇게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페하브 대공께서 세현 님을 초대하셨습니다. 이것은 초대장입니다.”
그가 두 무릎을 꿇고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며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아주 매끈하게 다듬어진 길쭉한 타원형 모양의 붉은 돌, 은은하게 빛을 흘려내는 것이 딱 봐도 보통 물건이 아니다. 게다가 은빛 글자로 정보가 떴다. 아이템이다.
[마계 초대석(희귀함): 마계로 향하는 문을 열 수 있는 돌. 부수는 것으로 사용할 수 있다.]============================ 작품 후기 ============================
내일도 올리겠습니다. (__)
부디 재밌게 읽으셨길 바라며 추천 꾹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