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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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정탐
우르릉……
멀리서 아스라히 들리는 천둥소리, 아무래도 비가 올 모양이다. 산중 적당한 토굴에 은신처를 만들고 숨어있던 정탐원 에르체그는 슬그머니 기분이 좋아졌다.
이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원래 이런 야전임무 중 비가 오면 그것만으로도 체력을 빼앗기고 힘들어진다. 단순히 몸이 힘들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장비가 젖지 않도록 조치해야 한다거나 젖은 옷이 질척거리는 불쾌감 등 정신적으로도 극심하게 피로해진다.
그러나 세상이 변했다. 이제는 날씨로 인한 온갖가지 불편한 점들을 상점에서 판매하는 아이템으로 커버할 수 있게 되었다.
착용자를 물에 젖지 않게 해주는 반지, 민감한 장비들을 안전하게 수납 가능한 아공간 주머니, 씻지 않아도 어느 정도 청결을 유지할 수 있어 불쾌감을 덜어주는 벨트 등, 전투에 직접적인 연관은 없으나 전반적인 임무활동에 있어 필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물건들.
그것들 덕에 이제는 흔적을 지워주는 날씨가 좋아졌다.
“돌아가면……”
속삭이듯 흘러나온 중얼거림과 함께 머릿속에 두고 온 연인이 떠오른다. 처음엔 단순한 육체관계로 시작했는데, 서로 제법 말이 통한다는 것을 알고 진지하게 연애를 시작했다. 별 문제가 없다면 결혼까지 하게 될지 모른다.
돌아가면 일단 뜨거운 밤부터 보낼 것이다. 보름이 넘게 여자를 품기는 커녕 손으로도 제대로 못했더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욕구가 폭발한다.
“돌아가면?”
그렇게 잠깐 딴생각을 하던 때, 난데없이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에르체그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번개처럼 검을 뽑아들어 뒤를 베어간다. 동시에 발동한 스킬은 환영술사의 암흑탄막, 짧게는 몇 초에서 길게는 십여 초 이상 상대의 시야를 가려줄 것이다.
쾅!
“커흑!”
그러나 기대하던 상황 대신 찾아온 것은 강렬한 충격.
발동했던 스킬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잠시 후 제대로 상황을 인지하자, 그는 자신이 쓰러진 채 누군가의 발에 머리통을 짓밟힌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전율이 인다. 어떻게 당했는지 보지도 못했다.
툭-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그의 눈앞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약병 하나가 떨어졌다.
“마셔라. 안 마시면 죽는다.”
“……”
“별로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
유감스럽게도 상대는 그를 꼭 살려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자, 잠깐! 마시겠다! 마시겠다고.”
보지 않아도 뒷목을 향해 다가오는 서늘한 예기가 느껴진다. 다급하게 외치며 약병을 잡아들자, 그제야 머리를 짓밟고 있던 발이 치워졌다.
에르체그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면서도 고개를 들어 상대를 살피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또한 조금이라도 망설였다간 당장 목숨이 끊어질 분위기였기에 지체하지 않고 약병의 뚜껑을 따 입으로 가져갔다.
짧은 사이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으나 뭔가를 결정하기엔 너무 촉박한 시간이었다.
결국 그는 정체도 모르는 약물을 마셔버렸다. 조금은 삼키더라도 일부는 입에 머금은 채 뱉을 기회를 노려보려 했는데, 그러기도 전에 정신이 아득해지며 보이는 것들 전부가 흐릿해진다.
“어……”
꿀꺽-
남은 약물들마저 본의 아니게 삼켜버린 그는 잠시 후, 끝없이 하늘로 치솟는 듯한 기분과 함께 헤벌쭉 입가를 끌어올렸다.
“완벽하군요.”
또 다른 목소리와 함께 또 한명의 사람이 허공을 벗어내는 듯한 동작을 취하며 장내에 나타났다.
밴시여왕의 우플랑드를 뒤집어 쓰고 있던 권태수다. 상대를 제압한 이바노프는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곧바로 심문을 시작했다.
“이름.”
“……내 이름? 에르체그, 에르체그 하이노……”
“어디 소속이지?”
“미토스 특수정보부 요원이지. 내가 말이야, 나름 정예라고. 여기서 버티기가 꽤 어렵단 말이지. 그러니까, 아주 뛰어난 실력자들만이…… 있다고.”
만취해서 인사불성 직전이 된 사람을 상대하는 듯하다. 류한표 자백제의 효능이 제대로 돌고 있다.
“미토스에 대해 설명해 봐.”
“미토스를? 우리가 유럽에서 유일한 왕국인데, 몰라서 묻는 거야?”
역시 유럽에서도 왕국이 만들어졌고 그들이 러시아 쪽으로 슬금슬금 이목을 돌리는 모양이다. 임무에 나서기 전부터 짐작했던 대로였다.
에르체그는 이바노프가 묻지도 않은 말들을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국왕의 이름이 크리스토프 발츠라든가, 원래 독일 지역의 영주였다든가, 대회전이라고 불리는 전쟁에서 결정적으로 승기를 잡아 왕국으로 승격했다든가.
“……했다고. 그래, 그래. 결국은 영웅님 덕분이지. 자네도 알겠지만.”
“영웅님?”
“켈데브렘님 말이야. 그분은…… 그분이……”
“그분이?”
“어…… 영웅님이…… 그게……”
문득, 멍하게 허공을 보며 중얼거리던 그의 눈동자에 점점 초점이 돌아왔다. 적어도 한 시간은 효과가 지속되어야 할 자백제가 벌써 풀리고 있다.
“너희가… 아, 안 돼…… 나는… 내가 지금 무슨……?”
그가 흐트러진 행동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는 듯한 모습. 게다가 한쪽 손은 반사적으로 검이 떨어졌던 바닥을 더듬거렸다.
이바노프가 품에서 평범한 상점제 단검을 꺼내들던 그때, 눈치를 챈 에르체그가 필사적으로 말했다.
“잠깐, 하지 마. 방법이 있어. 방법이 있다고.”
“무슨 방법?”
“나도, 당신들도 살 수 있는, 그런 방법. 서로가 아무 피해 없이, 그러니까 죽이지 마. 그러면 늦어. 돌이킬 수 없다고. 내 죽음이 알려지면, 그러니까…… 나는 정해진, 그러니까, 약속된 대로 움직이고 있어. 실종되면 반드시 나를 찾을 거고, 그게 루틴이니까, 그러면, 내 죽음이 알려지면 당신들은 들켜. 반드시!”
약물에서 채 완전히 깨지 않았는데도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짜낸 덕인지, 말이 매끄럽진 않아도 제법 논리정연하다.
“좀 더 설명해.”
“그래, 그래야지. 내가 무시하는 건, 내가 당신들을 무시하는 게 아니야. 나는, 아니, 나를 찾아내서, 제압까지 한 것만 봐도…… 잠깐, 잠깐만 쉬면 안 되나?”
툭-
대답 대신 다른 약병이 떨어졌다. 직감적으로 그것이 해독제라는 것을 알아챈 에르체그가 곧장 손을 뻗었다.
마시고 나자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몇 초도 되지 않아 정신이 급속도로 말짱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속에서 올라오는 화끈한 기운에 거센 기침을 내뱉었다.
기침이 완전히 멎자 이바노프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설명해라.”
“그래, 고마워. 역시 말이 잘 통하는군…… 당신들은 나를 죽이면 안 돼. 당신들 실력이 얼마나 뛰어나든, 무슨 기가 막힌 물건을 갖고 있든, 우리는 반드시 추적해낼 수 있으니까.”
“자신감이 과한 것 아닌가.”
“그게 아니야. 허세나 위협이 아니라고. 내가 아예 처음부터 엉뚱한 곳으로 이동해서 실종됐다면 모를까, 여기는 내 작전경로야. 당신들이 이곳에 온 이상 들킬 수밖에 없어. 목표한 사물 주변의 과거를 읽어내는 마법이 있으니까.”
믿기 어려운 말이다.
그러나 마냥 거짓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 이바노프가 보기에 그런 쪽의 낌새가 느껴지지도 않았으니, 만약 이것이 연기라면 에르체그는 굉장한 능력을 가진 셈이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당신들이 나를 직접 제압하려 든 그 순간부터 이미 정체는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지. 여기서 나를 죽이든 납치하든 결국 들키게 돼있어.”
“그렇군.”
“그래, 이해했지? 당신들 아마 이다니자카스 소속이겠지? 어차피 들킨 마당에 굳이 나를 죽여 양국 사이에 불화의 씨앗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지금까지 내게 했던 일은 작은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어.”
“네가 죽어도 양국 사이엔 아무 문제도 없을지 모르는데?”
“그건 우리 국왕님을 몰라서 하는 말이야. 게다가 굳이 그걸 시험해볼 필요는 없잖아? 중요한 건 나를 죽여서 얻을 이득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아닌가?”
“켈데브렘이라는 자에 대해 말해라.”
“좋아. 딱히 숨겨야 된다거나 그럴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니까. 길이 트이고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다 알려질 내용이지.”
살고 싶어하는 정탐꾼과의 아주 협조적인 심문이 이어졌다.
켈데브렘이라는 자의 정체.
그가 소환되었다는 유적의 대략적 정보.
미토스 왕국의 표면적인 현황.
유럽을 통일하기까지의 과정.
이다니자카스에 대해 정탐을 시도한 목적.
마지막으로 어떻게 자백제 효과에서 빨리 벗어났는지에 대해서까지.
“정말로 우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군? 아아, 조롱하려는 뜻은 아니었어. 우리도 이다니자카스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거든. 여태까진 그럴 수밖에 없었지. 그러니까 당신들에 대해서도 조금 알려줄 수 있나?”
“아니.”
“그, 그래, 물론 그렇겠지. 그러면 이제 나를 보내줄 텐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전부 해줬어. 이 이상은 안 돼. 어차피 아는 것도 없어. 내 상사가 어떤 취향의 여자를 좋아하는지 따위를 알고 싶진 않을 텐데?”
그 순간이었다.
이바노프가 번개처럼 고개를 틀자, 바로 옆 허공을 푸른빛 섬광이 꿰뚫고 지나간다. 한 발 늦은 파공성과 함께 뒤편의 애꿎은 나무에 구멍이 뻥 뚫렸다.
“죽이면 안 돼! 생포해야지!”
에르체그가 기다시피 허둥지둥 물러나며 고함쳤다.
대체 누가, 어떻게 이토록 빨리?
표정을 구긴 이바노프의 신형이 허공으로 녹아들어 사라진다. 권태수 역시 날아드는 총탄을 피해 나무사이로 몸을 피하면서 아이템을 뒤집어써 모습을 감췄다.
[라티마의 눈앞에 진실이 있으라!]그에 멀리서부터 모습을 드러내며 접근하던 한 인원이 손을 뻗자, 빛이 번쩍이고 탐지계열 마법이 쏘아졌다.
그러나 모습이 드러나는 이는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르체그의 바로 옆까지 도달한 인원들, 총 열두 명으로 이뤄진 그들 중 셋이 사방으로 탐지마법을 쏘아댔다. 놀랍게도 그것은 스킬이 아니었다. 직접 주문을 외우고 마력을 움직여 사용하는 진짜 마법이다.
“젠장!”
“어디로 숨은 거지?”
“에르체그, 괜찮은가?”
“으으, 죽을 뻔했어. 다행히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군. 내 말을 전부 듣고 있었던 거지?”
“그래, 시간은 잘 끌었다. 그런데…… 놓치게 생겼군.”
몇 차례 더 사방으로 탐지마법이 쏘아졌지만 두 명은 걸려들지 않았다.
분명히 움직일 동선을 계산하고 마법을 사용했는데 어떻게 피했는지 그들로선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지. 일단 에르체그의 상태부터 정확히 살피고……”
푸확!
말을 잇던 중년 남자의 목에서 별안간 핏물이 터져나왔다.
경악이 스치며 다른 이들이 본능적으로 포위망을 형상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그때, 외부에서 날아튼 총탄이 다른 한 명의 머리를 부숴 빈틈을 만들자 그곳으로 이바노프가 재빨리 몸을 빼냈다.
몇 명은 살린다. 그런 다음, 어떻게 이토록 빨리 지원이 도착했는지부터 시작해 보다 자세한 정보들을 캐낸다.
허공에 녹아들듯 은신하며 이바노프가 다음 목표물을 향해 덮쳐들었다.
============================ 작품 후기 ============================
일단 올리고 퇴고하겠습니다.
원치 않게 내용에 비해 글이 길어진 감이 있네요. 내일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 (__)
부디 재밌게 읽으셨길 바라며 추천 한 번 꾹!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