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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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들, 손놈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리고 있었다.
영지민의 수도 처음 800명 정도였던 것이 이제는 근 1200을 넘겼다. 그들은 특별한 수장격 존재 없이 성 주변에서 각자 살아가는 중이었다.
수장이 없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생존이 확보된 곳에서는 굳이 무리를 이끌 리더가 필요치 않다. 아니, 오히려 불필요하다.
사람은 원래 간사한 존재라 더 이상 쓸모없어진 상급자를 계속 대우해줄 만큼 관대하지 못하다. 또한 고마움은 빠르게 잊고 불편한 점들은 계속해서 기억하기 때문에, 위기가 해소되면 그만큼 결속력이 약해진다.
중요한 건 이미 수장을 둔 집단들조차 점점 결속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몇 집단은 스스로 무너져 류한의 영지민으로 흡수될 것이다.
그걸 막을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무너질 조직이라면 차라리 빨리 무너져 흡수되는 것이 도와주는 거다.
성 주변의 시체를 치우는 작업은 이제 막바지에 들어서고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는데, 이유는 각성자들의 힘을 미처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마법사나 정령사로 전직한 이들은 그자리에서 시체를 태우는 것이 가능해 엄청난 작업 효율을 보여줬다.
덕분에 성 주변으로는 제법 사람 사는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도시가 형성되기 바로 직전의 모습, 그런 장소에 류한의 제 2전단과 김유린, 그리고 대전에서 올라왔다는 이강혁이 들어섰다.
“어……”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서로 대화하며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모습과, 간간이 망가지지 않은 차량들이 천천히 굴러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몇 사람은 어디서 주워왔는지 모를 플라스틱 편의점 의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며 캔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일상이 이곳에 있었다.
갑자기 울컥한 감정과 함께 코끝이 찡해졌다. 정체모를 인류애 비슷한 것이 피어올라 그의 가슴을 꽉 매웠다. 아마도 그가 이런 비슷한 광경을 꿈에서도 그려왔기 때문일 것이다.
일상이 이전처럼 돌아가는 것. 완전히 예전처럼 될 수는 없을지라도, 마음 편하게 사람 구경을 하며 길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는 장소가 세상 어딘가엔 있기를.
“왜 그래요?”
울컥해진 이강혁의 시야에 갑작스레 여자 한 명의 얼굴이 들어찼다. 깜짝 놀란 그가 뒤로 몇 걸음 물러서다 깨진 보도블럭 조각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여자, 김유린이 그걸 보고 까르륵 웃었다.
“아저씨, 정신 차려요. 이런 거 처음 봐요?”
“……네. 처음 봅니다. 세상이 망가진 후로는.”
“아, 그건 좀 슬프네요. 어쨌든 갑시다!”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한 김유린이 권태수와 함께 앞장섰다.
잠시 후, 류한 성의 정문에 도착한 그는 안으로 들어서며 한 번 더 놀라야만 했다.
성벽의 안쪽에서 제복을 입고 훈련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전부 냉병기를 들고 있었는데, 서로 짝을 지어 대련하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깊었다. 그들 중 몇 명은 정말로 서로를 죽이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격렬하게 공방을 주고받았다.
대련이란 것도 기본적인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저기서 서로를 죽일 것처럼 격렬하게 대련하는 이들은 이강혁 정도는 가볍게 이길 수 있는 실력자들이란 뜻이다.
알 수 없는 엄청난 압박감을 받으며 성 안으로 들어선 그는, 권태수와 김유린을 발견할 때마다 정중하게 인사하는 류한의 길드원들 때문에 한 층 더 위축됐다.
마치 이곳만 다른 세상인 것 같았다.
바깥 사람들은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하루하루 무엇을 먹어야 하나 고민하며 살아가는데, 이곳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청결한 것은 물론이요 차려입은 제복도 고급스럽기 그지없다. 무기나 갑옷도 엄청난 상등품처럼 보인다.
단순히 겉모습만이 아니라 행동도 그랬다. 모든 것이 바깥의 이들과는 너무나 달랐다. 덕분에 전체적인 분위기가 아주 안정되고 단단한 느낌이다.
그는 3층까지 올라 길드장 집무실을 앞두었을 때 그야말로 완전히 ‘쫄아 있는’ 상태였다.
대체 누가 이 엄청난 집단의 주인일까, 얼굴에 흉터 가득한 백전불패의 용사? 아니면 국가에서 비밀리에 운용하던 초 엘리트 요원? 거대 기업을 스스로 일궈냈던 카리스마 넘치는 유능한 사업가? 그도 아니면 엄청난 실력의 연륜있는 의사나 특정 분야의 저명한 박사?
하지만 그 모든 예상이 빗나갔다.
적어도 40대는 넘는 중후한 남성을 그리던 그에게, 안에 들어서서 보인 젊은 청년의 모습은 정말로 예상 밖이었다. 게다가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커다란 체격의 여성은 더더욱.
“시, 신소진 선수?”
그 말에 다른 모든 이들이 신소진과 이강혁을 번갈아 쳐다봤다.
“……누구신지?”
“팬입니다! 맙소사, 살아계셨군요!”
이강혁은 진심으로 놀랐다. 신소진 또한 이런 곳에서 자신의 팬을 자처하는 남자와 대면하자 조금 놀란 모양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강한 여성!”
“그만, 거기까지 하죠.”
헛기침으로 이강혁의 말을 끊은 신소진이 길드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래.”
신소진은 방을 나서며 자신을 알아본 이강혁에게 가볍게 목례를 해보였다. 이강혁도 반사적으로 목례를 하다가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누굴 만나러 온 건지 떠올랐던 탓이다.
잠시 수그러들었던 긴장감이 빠르게 치솟는다. 상대의 가벼운 인사와 손짓에 따라 반대편 의자에 앉으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자, 그럼. 이강혁 씨 맞으시죠?”
“예.”
P97K로 먼저 보고를 받은 세현은 당연히 그를 알고 있었다.
“대전에서 올라오면서 무슨 일을 겪으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사례는 하겠습니다.”
“아, 예, 그것이……”
갑자기 생각해내려니 뭔가 제대로 떠오르질 않는다.
하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비장의 무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걸 들으면서 설명하면 좋을 듯합니다.”
그는 품에서 녹음기를 꺼냈다. 맞은편에 앉은 세현의 눈이 짧은 순간 빛났다.
이강혁은 이 기회에 최대한 협조적으로 행동해서 이들의 호의를 얻을 생각이었다. 혹시 아는가? 자신을 이곳에 받아줄지.
분위기가 좋으면 넌지시 가입은 어떻게 하는지 물어봐도 괜찮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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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의 무리들이 정문을 통과해 캠프 안으로 들어섰다.
두돈반 차량 여섯 대에 나눠 탄 그 무리들은 캠프 내의 군인들처럼 군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팔뚝의 부대마크가 달랐다. 아래쪽이 뾰족한 오각형 방패 안에 검은색 삼각형이 검 한 자루를 품고 선 모양의 마크다.
적당한 장소에 멈춘 그들은 다소 시끄럽게 하차를 시작했다. 자연히 근처를 오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그들 중에는 군부대 마크에 대해 제법 빠삭한 이도 몇 있었다.
“수도방위사령부잖아……?”
“수도방위사령부? 그거 서울 쪽 부대 아니요?”
“그럼, 서울 쪽이지요. 관악구에 있는 부대요.”
적대적이진 않지만 딱히 호의적이지도 않은 묘한 시선들이 그들에게 쏠렸다.
그에 별 신경 쓰지 않은 그들은 나머지 병사들이 이곳 주변에서 대기하고 정장을 입은 남자 둘과 대령 계급장을 단 남자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곳 캠프의 지도자인 이승원 소령이 머무는 지휘천막을 향해서였다.
오래 걸리지 않아 도착한 그들 셋을 이승원 소령이 맞았다. 그리고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대령 급의 인사를 발견하고는 곧바로 거수경례를 올린다.
“충성.”
“충성.”
무난하게 그 경례를 받은 대령이 옆의 두 남자를 소개했다. 별 중요한 인물들은 아니었다. 그저 이곳에서의 대화를 기록하고 행정적 일을 처리할 사람들이었다.
대령의 이름은 김재훈이었다. 그가 이승원 소령이 마련해준 자리에 앉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주둔지가 아주 훌륭하더군. 그간 고생이 많았네.”
“감사합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잠시 잡담을 나눈 후, 김재훈 대령이 서울 쪽 이야기를 꺼냈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놈들의 수가 점점 줄고 있네.”
“그 오크라고 부르는 놈들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다만 문제는 수가 줄었는데 반대로 강력한 놈들이 많아지고 있어. 이제는 오우거라고 불러야 하나 고민될 지경이란 말일세. 이곳은 좀 어떤가? 별다른 위협요소는 없다고 들은 것 같은데.”
“일차적인 위협인 좀비들은 대부분 제거한 상태입니다만, 남쪽에서 케르시타라는 사마귀를 닮은 곤충형 괴물들이 올라오고 있어 상황이 어찌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놈들 등급이 어떻게 되나?”
“붉은색에서 주황색이 주로 관찰되고, 간간이 노란색도 껴있습니다.”
“흐음. 약한 놈들은 아니군. 그래도 아주 위험한 놈들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일세. 우리가 상대하는 그 오크 놈들은 이제는 주황색이 기본어서 말이야. 아주 벅차. 허허.”
그렇게 계속해서 서울의 사정을 이야기한다. 언뜻 그냥 푸념을 늘어놓는 것으로 보였으나 그게 어떠한 의도를 둔 행동이라는 건 이승원 소령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좀 도와줄 수 있겠는가?”
“어떤 식으로 말씀이십니까?”
“간단하게 병력을 좀 파견해주게. 이곳의 치안과 안전을 확보할 수 있을 정도만 남겨두고, 한 1000명 정도는 어떤가?”
현재 이승원 소령의 캠프에서 군인 신분으로 전투에 참여하는 이는 약 800명이다.
“대령님, 저희 주둔지에서 제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전투 가능한 인원은 800명 정도입니다. 그리고 주변의 위협도 아직 완전히 제거된 게 아니라, 섣불리 파견을 결정하기에는……”
“군인들만 골라서 파견해달라는 게 아닐세. 이곳에서 보호받는 민간인들 중에 예비역을 포함한 징집 가능한 남자들이 있을 게 아닌가? 내 부탁함세. 이건 개인적인 부탁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하는 부탁이야.”
“……”
안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민간인들 중에서 예비역과 적정 연령대의 남자를 골라 징발하라?
이승원 소령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류한 길드의 수장 한세현과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가 가정했던 것과 꽤 유사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대령님, 그건 조금 힘들 듯합니다. 사실 저희 주둔지 사정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이승원 소령이 엄청난 푸념과 걱정거리, 불안요소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 중에는 통제가 점점 힘들어지는 민간인들에 대한 것도 있었다.
“……하는 상황이라, 강제로 징발하려 들었다간 자칫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런가? 그거 참 웃기는 사람들이군. 나라에 의해 보호받아 놓고도 불만을 품는다고? 은혜를 똥으로 알아도 유분수지.”
정확히는 이승원 소령이 이끌던 기동대대에 의해 보호받은 것이지만, 어떻게 보면 김재훈 대령의 말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군인에 의해 보호받았으면 그게 곧 나라에 의해 보호받은 게 아닌가.
“자네가 너무 잘 대해준 게 문제야. 다소 반발이 있어도 어쩔 수 있나? 다 필요해서 하는 일인데. 그리고 애초에 의무가 아닌가? 병역의 의무 말일세.”
“대령님, 강제로 징발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럴까 싶은데, 어떤가?”
김재훈 대령은 허허 웃으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죽기 전에 별은 달아봐야지 않겠나? 나도 아직이지만 이번 위기를 잘 이용하면 결코 꿈이 아니야.”
이제 소령에 불과한 그에게 별을 운운한다.
“잘 생각하게. 여태까지 보호해줬으니 이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라는 게 억지인가?”
나름의 논리로 무장한 그의 생각은 조금의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이승원 소령은 한 번 더 난색을 표하며 주둔지의 자세한 상황을 설명했지만,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자네 왜 그러나? 내가 아무나 막 끌고 가겠다는 게 아니야! 적합한 조건을 가진 병역의무자들을 데려가겠다는 거야. 당연한 일 아닌가?”
“단순히 통제의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앞으로 이곳 주둔지에 필요한 인력이 많은지라, 지원병력을 파견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럼 800명만 파견해주게.”
“대령님, 숫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제야 김재훈 대령이 표정을 굳혔다.
“자네, 지금 명령을 거부하는 건가? 내가 부탁이라고 말해서 정말로 부탁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
“후…… 좋네.”
의외로 김재훈 대령이 먼저 무언가를 양보하려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을 들은 이승원 소령은 다시 속으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 다른 생존자 무리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예, 그렇습니다.”
“그들에게서 일부 차출해서 1000명을 채우는 걸로 하지. 어떤가? 할 수 있겠나?”
할 수 있겠냐고? 당연히 불가능하다. 행여나 그런 짓을 시도했다간 당장 전투가 일어날 것이다.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각오가 필요했다. 잠시 동안 입을 힘주어 깨문 그가 말했다.
“대령님, 죄송하지만 여기선 누구도 데려가실 수 없습니다. 서울 쪽 상황만 급한 게 아닙니다. 이곳의 안전을 담보할 수는 없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여기도 상황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뭐라고?”
김재훈의 눈썹이 한차례 크게 꿈틀했다.
============================ 작품 후기 ============================
부디 재밌게 읽으셨길 바랍니다.
추천도 한 번 꾹!! 잊지 말고 부탁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