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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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
한 남자가 기지개와 함께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다. 다른 남자 역시 그에 전염된 듯, 하품을 쩍쩍 해대며 입맛을 다셨다. 옥상에서 무료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는 네 남자들의 표정은 전부 비슷했다.
경계조 하나가 시체조차 사라져버린 사건 이후, 그들 같은 말단 길드원들은 거의 하루종일 경계만 서게 됐다.
현장에 남은 핏자국으로 누군가에게 당했다는 것은 알았지만, 언제 어떻게 왜 당했는지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근처의 생존자 무리를 잡아 족치려 했으나, 그에 전투가 벌어져 입지 않아도 되었을 피해가 발생했다. 해당 생존자 무리는 뿔뿔이 흩어져 도망쳐버리기까지 했다.
풍신 길드와 부산 생존자들의 관계는 결코 좋지 않다. 그들이 협조를 요청한다고 순순히 들어줄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자연스레 조사는 난항을 겪었다. 도망쳐버린 생존자들을 잡는 것은 물론, 경계조를 해친 흉수가 누구인지 짐작하는 것도 어렵다.
부산의 생존자 무리일 수도 있고, 외부에서 온 생존자일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괴물의 소행일 수도 있다. 어쨌든 원인을 모르는 이상 경계가 강화되는 것은 당연했다. 같은 일이 또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
“에이, 씨팔.”
그에 대한 생각을 하던 남자가 욕설을 중얼거리며 도시의 전경을 짜증스레 훑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새끼 때문에 이게 뭐야, 쉬지도 못하고.”
“분명 여기 있는 놈들이 한 짓일 텐데. 길드장님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냥 의심가는 놈들 다 잡아서 족치면 되는 것 아닌가?”
저들끼리 툴툴거리더니 땅에 침을 퉤 뱉는다.
“어차피 전부 정복해버릴 거면 조금 빨리 시작해도 되잖아.”
“그러니까 말이야.”
풍신 길드가 어째서 부산의 생존자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려 들지 않는지, 오고 가는 대화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당장은 놔두고 있지만 상황이 허락하면 강제로 지배할 생각이 분명하다.
“돌아가면 춍 계집이나 한 명 먹어야지. 어제는 너무 피곤해서 그냥 자버렸지만……”
“나랑 똑같네. 그래도 내일은 오전에 비번이니까.”
너무 긴 경계임무에 대한 불평이 순식간에 음담패설로 돌아선다. 당연히 여성 포로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된 화재였다.
미색이 뛰어나 간부들에게 할당된 몇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여성 포로들은 풍신 길드의 남자들 대다수가 한 번씩 건드린 상태나 다름 없었다.
“난 불쌍해서 못하겠던데.”
그때, 총을 들고 대로를 주시하던 남자가 말했다. 그에 다른 세 명이 웃음을 터뜨렸다.
모든 풍신 길드원들이 발정난 개처럼 여성 포로들에게 달려든 것은 아니다. 소수지만 죄악감을 느낀다든가 하는 이유로 자제하는 이들도 있었다.
“순진한 놈.”
“넌 너무 마음이 착해서 탈이야. 쥰타로, 걔네들 따먹는 게 뭐 어떻다고 그래?”
“불쌍하잖아. 아무리 포로라지만…… 그래도 사람이니까.”
“그래, 사람이지.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라고. 인류 차원의 대 위기 시대 아니야? 이런 시기에 쓸모도 없는 포로들을 먹여주고 재워주는데, 양심이 있으면 다리라도 벌려야지. 안 그래?”
대부분의 풍신 길드원들에게 죄책감을 갖지 않게 해주는 마법의 논리였다. 그럼에도 쥰타로의 표정이 풀어지지 않자 다른 이들이 계속 떠들어댄다.
“그리고 원래 인류의 역사가 그렇잖아? 전쟁에서 패하면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는 건 당연해. 죽이지 않고 이렇게라도 써먹어주는 걸 감사하게 여겨야지. 여기 춍들이 우리보다 약했을 뿐이야. 자연의 섭리라고. 약육강식!”
“뭐 얘네들이 언제는 강했나. 항상 약했지.”
“아, 그런가?”
그리고 저들끼리 낄낄대며 웃는다. 쥰타로 역시 딱히 이들의 논리가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그저 침묵하며 피식 웃었다.
그때였다.
끼이이이익……
모두의 신경을 거스르는 소리와 함께 옥상의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네 남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며 소리가 난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반쯤 열린 안쪽으로 유난히 짙게 느껴지는 그림자가 가득하다.
창문이 없는 계단이니 어두운 것은 당연한데, 어쩐지 느낌이 괴이했다. 이전에 아무렇지도 않게 드나들던 곳인데도.
“……기분 나쁘게, 갑자기 뭐야?”
기사 직업을 가진 남자가 짐짓 짜증을 내며 문으로 향했다. 완전히 닫아놓을 생각으로 움직인 그가 철문을 발로 쭈욱 밀친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확실하게 닫혔다.
그에 알 수 없는 미약한 안도감을 느끼며 남자가 몸을 돌린 순간, 굉음이 터졌다. 부서질 것처럼 빠르게 열린 문 사이로 은빛의 무언가가 번개처럼 튀어나와 남자를 덮친다.
“으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대량의 피가 튀었다. 경악한 다른 셋이 허둥지둥 무기를 잡는 사이, 열려진 문 사이로 다시금 빛이 번쩍이며 무언가가 급속도로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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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넷이서요?”
일이 벌어지기 얼마 전.
부산의 초입에서 세현의 계획을 들은 김유린이 깜짝 놀란다. 그녀는 약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양옆의 박수진과 신소진을 살폈다.
박수진은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고, 신소진은 고개만 끄덕거릴 뿐 당황한 기색은 없다.
“이걸 받아라.”
김유린의 반응을 깔끔하게 무시한 세현이 그녀들에게 반지 하나씩을 나눠줬다. 그리고 손바닥만한 크기의 원형 수정판도 하나씩 나눠준다.
“미리 들어서 알겠지만, 반지는 진동으로 신호를 보낼 수 있고 수정판은 서로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거다. 이번 작전에서 중요하게 쓰일 테니 잘 보관해라. 진동 몇 번이 어떤 신호인지도 미리 정하고.”
류한 길드의 마법공학자와 세공사 및 마법부여사들이 모여 만들어낸 합작품으로, 이런 특수작전 상황을 대비해 만든 물건이다.
“그리고 이것도.”
뒤이어 세현은 그녀들에게 귀걸이 하나씩을 건넸다. 상점에서 구매한 마법 장신구였다.
“보면 알겠지만 은폐 마법이 걸린 귀걸이다. 만약 풍신 길드의 상황실 레벨이 높아 지도에 우리까지 표시된다면, 그때 우리 위치를 감춰줄 물건이니까 절대 빼지 말도록 해.”
“얘네는요?”
김유린이 제 뒤에서 서로 장난을 치는 다섯 마리의 트윈테일을 가리켰다. 잠깐 멈칫한 세현이 상점을 열어 귀걸이 다섯 개를 추가로 구매했다.
“알아서 착용시켜라.”
“으음, 얘네 귀 뚫어도 되나?”
김유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귀걸이를 들고 녀석들에게 다가갔다. 서로 장난을 치고 놀던 다섯 마리의 트윈테일들이 순간 흠칫하며 김유린을 홱 쳐다본다. 그리고 이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김유린이 도망치는 녀석들을 잡아 귀걸이를 착용시키는 것을 보며, 세현은 자세한 작전을 설명했다.
그가 하려는 것은 일종의 게릴라전이었다.
먼저 박수진과 김유린, 신소진 셋이 도시 외곽의 경계조들을 처리하며 주의을 끈다. 세현은 곧바로 성으로 이동해 사로잡힌 포로들과 접촉한다.
경계조가 죽어나가는 사건이 계속해서 발생하면 풍신은 십중팔구 다수의 병력을 동원하며 성을 나설 것이다. 길드의 체면은 물론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흉수를 잡아야만 할 테니까.
바로 그때, 비어버린 성에서 세현의 도움을 받은 포로들이 폭동을 일으켜 성을 점령한다. 그게 이 작전의 핵심이었다. 성공하면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다.
어차피 풍신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살펴보러 왔어야 할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왕 온 것, 이런 식으로 남의 손을 사용하는 계략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이 작적은 실패해도 크게 상관이 없다. 그렇기에 세현 일행이 아무도 다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말했지만, 절대 무리하지 마라. 목적은 적을 죽이는 게 아니라 밖으로 끌어내는 거다. 그리고 실패해도 별 상관없고.”
“알겠습니다.”
“예.”
그는 제자들의 다짐을 받아낸 후 좀 더 세부적인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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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이 안 아픈 곳이 없다. 그녀는 끙끙거리는 신음성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삼키며 눈을 감았다.
풍신의 길드장 세키마타 카즈오의 성격은 가학적이었다. 하루도 그녀의 몸에서 멍자국이 없어지지 않을 정도로.
눈물은 매말라버린지 오래, 처음엔 소리도 지르고 발버둥도 쳐봤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순식간에 돌변해버린 놈들의 행태는 맨정신으로 버틸 수준이 아니었다.
하루하루가 억겁처럼 길다. 지옥에 빠진 것처럼 괴롭고 처절해서, 정신과 영혼이 빠르게 갉아먹히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살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그냥 죽어버리면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태까지 죽지 않고 버티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뿐이다. 어떻게든, 언제가 되었든 단 한 번의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허나 이제는 그 독기마저 흐려지고 있었다. 세상은 그녀의 생각대로 공평하지도, 자비롭지도 않다. 그저 원인과 결과에 의한 차가운 현상이 있을 뿐이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하고 계속 학대당할 것이다.
객관적으로 본 풍신 길드는 결코 약하지 않다. 그녀가 속했던 바다 길드가 사전에 기습을 알아채고 전력으로 대비했어도 막아낼 수 있었을지 의문이 생길 정도, 그런 집단의 심장부에 갇힌 그녀를 대체 누가 구하러 와준단 말인가.
계속해서 인내하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언젠가는 이놈들이 빈틈을 드러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까지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놓치지 않고 기회를 잡을 수 있을 상태일까?
지속적으로 두들겨맞아온 몸은 이제 걷기만 해도 쑤시고 아프다. 얼마 더 지나면 골병이 들어 거동도 제대로 못할지 모른다. 그렇게 된 자신을 가혹한 성정의 카즈오가 곱게 내버려둘까.
“흐……”
흘러나오려는 신음성을 집어 삼켰다. 천천히 깜빡이는 시야 사이로 어둠에 잠긴 화려하고 안락한 방안의 모습이 보인다. 물론 이곳에서 그녀에게 허락된 건 없다.
그녀가 누운 자리는 방 한쪽 구석의 쿠션이 전부, 주인을 기다리는 노예처럼 이곳을 벗어나면 안 된다. 스스로의 처지에 가슴에서 뜨거운 울분이 치솟았다가, 그 울분을 억누르는 압도적인 체념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매마른 입술이 작게 달싹이다 멈춘다.
제발, 누군가 기적처럼 그녀를 도와준다면.
설령 그게 악마라 해도 영혼까지 팔 수 있을 텐데.
문득, 미약하게 옷자락이 스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눈을 뜨자 여전히 어둠에 잠긴 방안의 풍경이 보인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보랏빛 눈동자를 빛내는 한 존재가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놀란 그녀가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상대는 여전히 아무런 행동도 없다.
일어나 앉은 그녀의 떨림이 심해졌다. 보라색 눈동자,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는다.
악마가 왔다.
죽어가던 그녀의 바람을 듣고, 파란색도 남색도 아닌, 무려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악마가.
떠나기 전에 말해야 한다. 치솟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저절로 열린 그녀의 입에서 미약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복수를 하게 해주세요.”
“복수?”
듣기 좋은 목소리가 돌아온다. 그녀는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우리를 이렇게 만든 놈들을 벌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떨렸지만 더듬거림 없이 완벽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상대는 그저 가만히 서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공간 전체를 찍어누르는 듯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악마인가? 정말로 악마가 맞나? 여전히 그녀에게는 불타오르듯 선명한 자색빛 눈동자 한 쌍이 보인다.
황홀할 정도로 두려운 빛이다.
떨리는 몸으로 기어간 그녀가 악마의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신에게 경배하듯, 온 정성을 다해 조아리며 말했다. 그녀 생전 더 이상 간절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뭐든지 하겠습니다. 뭐든지 드리겠습니다.”
죽음과 같은 정적이 흐르고 잠시 후, 악마가 대답했다.
“그래. 힘을 주마.”
그녀의 몸이 재차 부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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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재밌게 읽으셨길 바라며 추천 꾹!! 부탁드립니다. (__)
연참을 못한 관계로 토요일도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