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night Flower RAW novel - Chapter 695
695화. 한가로운 생활
외근직이 아니더라도 가진 것만 잘 아껴 써도 굶어 죽거나 얼어 죽지 않을 수 있었다. 기껏해야 한 주에 고기반찬 한두 끼 덜 먹게 될 뿐이었다.
안전부 외근직에게 따르는 가장 좋은 복지, 빠른 승진으로 말할 것 같으면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부분이기는 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승진이 빗발치는 총알이나 각종 위험으로부터 살아남았을 때 따른다는 점이었다.
말하자면 한 단계씩 승진한다는 건 동료들이 잃게 된 팔과 다리, 혹은 그들의 시신을 밟아 오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승진 속도도 외근직이 갖는 이점 중 하나였다. 가장 좋은 건 내근직으로 전환 시 한 단계 더 높아진다는 것인데, 그렇기에 위험도 마다하지 않고 부귀영화를 얻겠다는 야심으로 안전부에 지원하는 이도 매해 나타나곤 했다.
그러나 그 외 다른 직원들에게는 단순한 이력과 나이만으로 이루어지는 승진만으로도 충분한 데다 곁에 딸린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위험을 무릅쓸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문득 애쉬랜드에서 강도와 변이 생물, 다른 세력의 군대, 극악의 환경, 특수한 능력자들과 맞섰을 당시를 떠올린 유정식은 순식간에 마음이 아릿해지고 뼛속까지 시큰해져 왔다.
몇 년 전, 유정식과 동료들은 유적 사냥꾼으로 위장한 화이트 기사단 녀석들로 인해 늪 안쪽에 갇힌 적이 있었다.
며칠을 연이어 내리는 빗속에서 길을 찾으려 애를 쓰는 동안 동료들은 수시로 진흙에 푹푹 빠졌다. 동료들은 끌어 내려 해도 끌어낼 수 없었고 빠른 속도로 늪에 가라앉기만 했다. 거기서 유정식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서서히 가라앉은 동료들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그날 이후 비가 올 때마다 유정식의 종아리는 은은히 아파졌고 잠에 들어도 악몽이 그를 덮쳤다.
그리고 그 고통은 그가 내근직으로 전환한 후에야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무릎을 안마하는 사이, 현재 생활에 대한 유정식의 만족감은 더욱 커졌다. 그는 정년을 맞아 안전부를 떠나야 할 때까지 계속해서 이런 삶을 살다가 그때쯤 직무를 바꾸고 싶었다.
때가 되면 그는 D8 팀장급에서 D9 행동군 주관급에 이를 것이다.
다른 부서의 고급 관리자급에 해당하고 M으로 시작하는 고관들에 버금가는 그 등급은 한 층의 주관, 한 공장의 공장장, 혹은 한 지구의 질서감독국 국장이 될 수도 있었다.
그 정도 직급이라면 기본적으로 받는 공헌 점수로 한 가족을 충분히 부양할 수 있고, 큰 집을 배정받는 등의 복지도 누릴 수 있었다. 거기다 실권도 있어서 여러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는 것도 가능했다.
유정식이 그렇게 아름다운 미래를 그려가며 솔솔 찾아오는 졸음에 몸을 내맡기려 할 때쯤 알림이 떴다.
“외부 파견 직원이 돌아와 기본 검사를 통과했다. 2차 검사를 진행해 문 개폐 여부 결정하도록.”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유정식이 양쪽의 부하들에게 말했다.
“제동이, 하균이, 너희가 검사해.”
뒤이어 그는 기다리는 동안 정신을 차리려는 듯 얼굴을 쓸었다. 또 다른 이에게 밀고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은백색 대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녹회색 지프가 들어왔다. 곧 차에선 너무도 아름다운 여자가 내렸다.
콧등에 얹힌 선글라스를 벗는 여자는 유정식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모⋯⋯.”
유정식은 그 이름 한 자를 뱉자마자 뭔가를 떠올리고 급히 말을 고쳤다.
“돌아온 거야?”
그도 자신이 장목화 오빠의 친구란 이유로 장목화한테 지나치게 친근한 척을 한다거나 옛 별명을 함부로 불러선 안 된다는 걸 잘 알았다.
장목화는 이번 임무에 나서기 전, 이미 D9 주관급 직원이 되어 자신의 상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단계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유정식은 부끄러움에 진땀이 나는 걸 느끼며 약간 긴장했다. 반고 바이오 제도에 따르면 장목화는 정말 그들을 주관하는 역할이 될 수도 있었다.
2년 만에 D6에서 D9로 승진한 그녀는 외부로 파견을 나가 임무를 진행하는 동안 공헌 점수도 적잖게 쌓았을 터였다. 고로, 단숨에 관리층으로 진입할 생각이 있는 게 아니면 언제든 직무를 전환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응, 거의 반년만이네.”
계절은 이미 늦가을에 접어들어 있었다.
그녀와 유정식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성건우, 용여홍, 백새벽은 속속들이 차에서 내려 트렁크를 열고 가진 모든 물건을 검사받기 시작했다.
유정식은 이미 작년에 당직을 설 당시 이 엘리트 팀이 군용 외골격 장치 2대를 가지고 있다는 걸 파악한 바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이 엘리트 팀이 나무 상자를 하나씩 여는 걸 보고, 저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지프 트렁크에는 무려 군용 외골격 장치 세 대와 인공지능 갑옷 두 대가 들어있었다. 고작 넷뿐인 팀이 갖기엔 사치스럽다는 말로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건 그야말로 낭비였다.
“이, 이게 대체?”
유정식은 못 참겠다는 듯 의문을 표했다.
‘이 녀석들, 외부에서 대체 어떤 임무를 수행한 거야? 이 정도 장비면 준비돼 있지 않은 행동대대쯤은 손쉽게 처리할 수 있잖아?’
성건우가 진지하게 설명했다.
“자동차에도 스페어타이어를 싣고 다녀야 하듯이 장비에도 예비용 장비가 필요한 법이죠.”
‘나 때는 행동대대 하나에 인공지능 갑옷 2개만 있어도 굉장한 편이었는데. 전문적인, 특정 목표에 집중하는 대대가 아닌 이상에는⋯⋯.’
유정식은 복잡한 눈으로 구조팀이 차례로 안전 검사를 통과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긴 한숨을 내뱉었다.
이 팀은 특수 사례 중의 특수 사례였다. 놀라운 속도로 속속들이 승진한 데다 손실 인원도 없는 팀은 반고 바이오 건립 이래 처음이었다.
그들보다 더 빠른 속도로 승진한 건 강력한 능력을 각성해 단번에 높은 직급에 이른 사람뿐이었다. 다만 그건 개인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한 승진이지 팀의 임무 수행 결과로 받은 보상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대체 애쉬랜드에서 뭘 했길래 군용 외골격 장치 3대랑 인공지능 갑옷 두 개를 가진 데다 겨우 2년 만에 다른 외근직이 10년, 20년에 걸쳐 이룰법한 성과를 거둬서 벌써 몇 직급을 뛰어넘은 거야?’
유정식은 부러움과 의혹이 어린 눈으로 주차장 깊은 곳으로 떠나는 구조팀을 배웅했다. 아마 저 넷은 이번에도 승진할지 몰랐다.
‘아니야, 모카는 안 되겠지. 여기서 더 승진하면 관리층이잖아. 천재적인 과학자나 강력한 각성자를 제외한다면 최연소 관리층. 그것도 겨우 스물다섯 살밖에 안 된⋯⋯.’
순간 유정식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외근직으로 다시 전환하겠다는 신청서를 제출해 장목화와 같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다는 충동이 불쑥 일었다.
물론 이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생각일 뿐이었다.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등받이 의자에 앉아 눈을 반쯤 감은 그는 속속들이 긴장을 푸는 직원들을 둘러보았다. 지금 그들은 구조팀의 사치스러운 장비와 그 팀에 대한 갖가지 소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 이런 생활이 훨씬 더 낫지.’
유정식은 다시금 허리를 쭉 늘였다.
* * *
647층, 14호.
소독과 피 검사, 샤워까지 다 마친 장목화는 언제나처럼 팀장 책상 앞의 의자에 몸을 던졌다. 앉는 게 아니라 거의 눕는 것에 가까운 자세였다.
“아, 편해-,”
그녀는 모처럼 편안한 웃음을 지었다.
정말 이제야 집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쿵!
성건우 역시 본인 자리로 몸을 던졌다.
어찌나 힘이 셌는지, 하마터면 의자가 부서질 뻔했을 정도였다.
용여홍은 기쁜 얼굴로 주위를 한번 둘러본 뒤 백새벽에게 말했다.
“오늘 돌아가자마자 부모님께 우리 일을 알릴게. 내일 저녁에는 네가 우리 부모님이랑 편하게 인사할 수 있게.”
순간 성건우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급할 필요 있어? 새벽이가 되게 간절해 보이잖아.”
그 말에 지금까지 아무 생각 없었던 백새벽도 갑자기 망설여졌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반고 바이오 내부 사회에 잘 융화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것저것 지적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지적을 당하더라도 정신력이 강한 그녀 본인은 괜찮았다. 백새벽이 걱정하는 것은 그로 인해 슬퍼할 용여홍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용여홍이 입을 열었다.
“그래, 그래. 좋은 날을 골라야겠다.”
반고 바이오 내부에서 굳이 따지는 것은 없었다. 좋은 날은 가족이 쉬는 주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래야 처음으로 그 집에 방문하는 백새벽도 제대로 된 손님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좋아.”
백새벽도 반대하지 않았다.
이내 장목화가 손뼉을 치며 웃음을 지었다.
“좋아, 좋아. 염장질은 그만두고. 일단은 검사 결과를 확인하고 식당에서 뭘 먹을지부터 정하자.”
그들처럼 오랫동안 밖을 돌아다니다가 지하로 돌아온 이들은 반드시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는지 검사를 받아야 했다.
용여홍과 성건우는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통조림으론 나오지 않는 걸로요!”
네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한바탕 웃던 성건우가 턱을 매만지며 눈을 반짝였다.
“곧 겨울이니 식당에 양고기 수프가 있겠지?”
“맞아, 맞아.”
용여홍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만 들어도 금방 입 안에 그 풍부한 향과 맛이 느껴지는 듯했다.
백새벽 역시 말을 보탰다.
“양고기 볶음을 추가할 수도 있을 거고.”
이것들은 구조팀이 내내 먹어야 했던 통조림에는 없는, 그 자리에서 만든 걸 바로 먹어야 맛있는 음식들이었다.
한마디씩 거드는 소리를 듣던 장목화는 저도 모르게 컵을 들고 목을 축였다. 그리곤 헛기침으로 주의를 환기시켰다.
“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시간이 좀 걸리니까 난 보고서 좀 작성할게. 너희는 하고 싶은 것 해. 근데 화장실 가는 것 말곤 사무실 나가면 안 돼.”
“컴퓨터도 검사한다고 다 수거해갔으니 일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성건우는 아쉬움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이내 그는 전에 인쇄해둔, 구조팀 소유의 자료를 넘겨보기 시작했다. 구세계 파괴 이전 현 빙원 지역의 상황을 위주로 다룬 자료였다.
용여홍은 마음 같아선 백새벽과 얘기를 하고 싶었으나 모두가 있는 가운데 붙어서 시시덕거리기는 어려웠다. 특히나 보수적이고 내향적인 그로서는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그도 자리로 돌아가 전에 읽지 못한 자료들을 살폈다.
백새벽도 주류를 따르기로 했다.
시간이 흐르며 점점 피로도 쌓이고, 용여홍의 눈꺼풀도 힘을 잃었다.
그는 전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레드스톤 마켓에서 회사로 돌아왔을 때 팀원 모두가 잠드는 바람에 하마터면 식당 운영 시간을 놓칠 뻔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애쉬랜드에 있는 한 어찌 됐든 최후의 긴장감은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어느 상황이더라도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순 없었고, 그런 나날이 계속 축적되다 보면 몸과 마음은 모두 지치기 마련이었다.
이 지하 빌딩으로 돌아온 상태여야만 습격과 감염을 걱정할 필요 없이 비로소 심신의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는 초기엔 애쉬랜드에서 제대로 잠도 잘 수 없었다. 장목화, 성건우가 불침번을 서는 데도 불안한 마음에 수시로 잠에서 깨곤 했다.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극심한 피로 때문인지, 믿고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동료를 향한 신뢰 때문인지 서서히 편하게 잠이 들었었다.
결국 용여홍과 백새벽은 어느새 책상에 엎드린 채 잠들어 버렸다.
밀려드는 졸음에 억지로 버티던 성건우도 스케이팅을 하듯 비틀비틀 긴 소파로 다가가더니 그 위에 풀썩 쓰러졌다.
장목화는 컴퓨터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주위를 둘러보며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