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night Flower RAW novel - Chapter 782
782화. 요구
아이스트가 있는 방으로 직접 향하는 대신 마지막 검문소에 멈춘 산드로가 동료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보스에게 대신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부탁을 받은 경호원은 몇 걸음 만에 일광욕실 밖에 이른 뒤 가볍게 주먹을 쥐고 세 번 노크했다.
반응은 없었다.
뒤이어 그가 세 번 더 노크했다.
이번에도 반응은 없었다.
똑똑똑!
경호원은 힘을 더 실어 노크했다.
“뭐지?”
일광욕실 안에서 약간 피로감이 어린 아이스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답에 성건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쁜 듯 혼잣말을 중얼댔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아무 일도 없었네. 중요한 증인이 현장에서 피습당해 강제로 입을 다물게 된 걸까 봐 얼마나 걱정스러웠는지.”
순간 산드로와 여러 경호원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심지어 일부는 노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제발 그딴 소리 좀 하지 마!’
장목화가 속으로 소리쳤지만, 솔직히 그녀도 그런 걱정을 하긴 했다.
구세계 콘텐츠에 흔하게 발생하는 상황이었다. 가까스로 단서를 찾아내고 중요 증인을 포착한 주인공 일행이 우연한 일로 착오가 생기는 바람에 한발 늦게 도착하면 중요 증인은 이미 죽임을 당한 상태였다.
곧이어 문을 두드린 경호원이 산드로가 했던 말을 전하자 아이스트는 한동안의 침묵 끝에 답했다.
“들여보내.”
그 말투에 어린 피로감에, 장목화는 왠지 꼭 환자를 방해한 것만 같았다.
* * *
일광욕실 안.
벌써 자세를 고친 듯한 아이스트는 리클라이너 등받이에 몸을 살짝 기댄 채 하반신은 이불을 덮고 있었다.
그가 장목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처럼 자네가 묻게.”
장목화가 공손하게 물었다.
“아이스트 씨, 최근 스미스의 원행자 상인단에게 물건을 제공하셨나요?”
아이스트는 뭔가 깨달은 얼굴을 했다.
“아, 그 빙원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그 물건을 말하는 건가?”
“맞습니다.”
장목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건우도 같은 동작을 취했다.
아이스트는 미소를 지었다.
“분명 원행자 상인단에 물자를 제공하긴 했네. 근데 그건 그들이 싣고간 물자 양에 비해 작은 일부일 뿐이야.”
“어떤 물자였나요? 누가 구매한 거죠? 원행자 상인단에게 맡기게 한 건 누구였습니까?”
장목화가 단숨에 여러 개의 질문을 내뱉었다.
동시에 그녀는 의도적으로 구조팀이 아이스트를 진정한 의뢰인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란 기색을 보였다. 그래야 아이스트가 설령 진정한 의뢰인이더라도 그의 경계심을 자극하지 않고, 뜻밖의 상황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일단은 어떤 답이라도 얻어 그 진위를 분석해야 했다. 힘을 발휘해 강제로 친구를 맺을지 말지를 고려하는 건 마지막에 해야 할 일이었다.
아이스트가 웃으며 반문했다.
“내가 왜 자네들 질문에 답해야 하지? 이번엔 어떤 사례를 제공하려고?”
그는 ‘사례’를 강조하며 돈 문제가 아님을 시사했다.
“뭘 원하십니까?”
장목화도 아이스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 지금은 상대의 약점이 무엇인지 분석할 수 없었다.
만약 아이스트가 그들에게 알아서 제시하라고 할 경우 장목화는 반고 바이오에서 발명한 의료 약제와 생명 제제 등을 제시할 생각이었다. 아이스트는 나이가 들기도 했고, 몸도 그다지 안 좋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시 성건우 부친이 속했던 팀도 그런 물건으로 정보를 교환한 바 있었다.
화이트 기사단도 해당 영역에서 강세를 보였고, 아이스트는 돈도 지위도 있는 사람이니 약제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반고 바이오의 물건에는 그 나름의 특색이 있었다. 때로는 국산품보다는 외제가 더 나은 법 아니겠는가.
물론 그럴 경우 어느 정도 구조팀 신분이 발각될 게 분명했다.
아이스트는 자신만의 생각에 빠진 채 눈의 초점을 잃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갸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원하는 건 자네들이 이 두 사항에 관해 원하는 정보를 얻으면 즉각 게스트 보루를 떠나는 거야. 여기 단 1초도 있지 말고, 그 어떤 일에도 참여하지 마. 게스트 보루를 떠나 바로 커닝미스로 가준다면 그게 더 좋겠지.”
‘이 요구는⋯⋯. 우리 팀이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며 작지 않은 폭풍을 일으켰단 걸 아이스트가 알 리는 없잖아. 그런데도 최대한 빨리 우리를 밖으로 내보내서 안전을 도모하려는 건가?’
장목화는 이 요구를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상관없다는 듯 답했다.
“그러죠.”
구조팀이 게스트 보루에 온 건 성건우 아버지가 속한 팀의 상황과 이곳에 숨어 있는 제8 연구원의 사람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아이스트가 입을 열기 전 장목화가 한 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저희가 그 두 사항을 조사하는 동안 만약 누군가 저희를 건드린다면, 혹은 어떤 일이 저희를 덮쳐온다면 저희도 가만히 앉아 당하거나 도망칠 수만은 없습니다.”
이 말은 최대한 다른 일에 관여하지 않고 조사에 집중하다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떠나긴 하겠지만 그 외엔 어떤 것도 보장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아이스트는 한참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난 자네들 약속을 믿어. 적어도 여태 자네들이 보인 모습은 믿을 만하네. 또한 자네들이 원하는 정보도 사실 나와는 큰 관계가 없으니 알려준다고 해도 문제 될 것이 없지.
음, 스미스가 자네들에게도 말했겠지만, 화물 실종 사건 관련자들은 모두 기억을 잃은 상황이야. 각성자가 포함된 자네들이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알겠지. 나도 예외는 아니라네. 누군가 내 기억 일부도 지워버렸어. 근데, 내가 여전히 기억하는 관련 디테일까지는 건드리지 못했지.”
그가 끝으로 씩, 웃음을 지었다.
‘기억 삭제의 영향을 피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건가? 아니면 당시에는 확실히 삭제된 기억이 훗날 특정 방법을 통해 회복된 건가?’
장목화는 아이스트의 말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동시에 그녀는 만약 성건우가 말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분명 비법을 물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상대는 절대 그에 대한 답을 하지 않을 것이었다.
아이스트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원행자 상인단에 제공한 건 희귀 금속이었어. 그에 대한 값을 치르고 나한테 그 거래를 제안한 건 모르였고.”
“모르? 그 정보상이요?”
장목화는 최근 지티스에게 얻은 이름들을 수시로 떠올리고 있었다.
아이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가 어디서 그 돈이 났는지, 왜 그 금속들을 샀는지는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아. 난 그저 적당한 거래가 들어오면 충분한 금액을 받고 물건을 제공하는 상인일 뿐이니까.”
“알겠습니다.”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이스트의 답에서 거짓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여전히 경계심을 안고 있는 그녀는 그 말을 덥석 믿을 생각도, 아이스트의 호의를 얻어 그가 정보를 아낌없이 내놓도록 만들 생각도 없었다. 안 그래도 상대는 계속해서 성건우의 사유 의식을 방비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아이스트는 비장의 카드라도 가지고 있는 듯 매우 미스터리해 보였다. 억지로 친구가 되려고 했다가 끝내 파국을 맞을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신중함을 중요시하는 장목화는 일단 정보상 모르를 만나 그의 답을 듣고 그걸 바탕으로 아이스트를 다시 찾아올지 말지 결정하기로 했다.
그때는 비밀스럽게 이 집에 잠입해 상대를 몰래 통제해야 할 것이었다.
그렇게 장목화, 성건우는 아이스트에게 두 번째 작별을 고했다.
* * *
장목화와 성건우는 산드로의 감시 아래 다시 그들의 지프로 돌아왔다.
백새벽은 바로 차를 몰고 주차장에서 빠져나갔다.
“달지기의 아들?”
팀장의 설명에 용여홍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 단어를 되뇌었다.
성건우가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이상할 게 뭐가 있어? 강림체를 가진 달지기도 있는데, 아들이야 얼마든지 둘 수 있지.”
“그렇다면 정말 달지기의 아들이 커닝미스를 비호하며 그곳이 구세계 파괴 속에서도 치명적인 타격을 받지 않도록 해준 건가⋯⋯.”
용여홍의 생각에 이런 전개는 나름 논리가 있었다.
그런데 성건우가 그를 팩 노려보았다.
“장생의 고향인 임하 마을과 그가 공부하던 타이 시티, 대강시도 파괴됐는데? 게다가 ‘그’는 달지기의 아들이 아니라 달지기 본인이었다고.”
성건우가 제시한 반례에 반박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용여홍은 바로 입을 다물고 더는 이 문제로 토론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해도 구세계가 파괴됐을 당시, 유독 장생의 강림체가 생활했던 지역만 중점적으로 타격을 받았을 리는 없었다.
그때, 운전 중이던 백새벽이 물었다.
“이제 정보상 모르를 찾으러 가요? 아니면 곧 정오인데 일단 점심부터 먹고 오후에 갈까요?”
“아니, 지금 바로 가야지! 밥 먹는 동안 모르가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면 어떡해! 구세계 콘텐츠에서는 그런 일들이 수두룩하다고. 우린 비슷한 실수를 저지르면 안 돼.”
성건우가 제일 먼저 격한 반응을 보였다. 아니, 심지어 그는 거의 간곡에 가깝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용여홍은 흠칫했지만, 다시 또 성건우의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그런 상황을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내 장목화가 말했다.
“음, 아직 11시가 조금 넘었을 뿐이고 질문을 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으니까 일단 모르부터 찾아가 보자.”
제8 연구원 같은 비밀 조직의 꼬리를 잡기 위해서는 나쁜 싹을 초기에 잘라 억제해야 했다. 그들에게 반응할 기회를 줘서는 안 됐다.
* * *
지티스가 이미 모르를 비롯한 관련인들 정보를 준 까닭에 다시 뭔가를 물을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방향을 이리저리 틀어가며 이동한 끝에, 구조팀은 어느 복잡한 블록에 이르렀다.
이곳 건물은 계획에 따라 지어진 게 아닌 듯, 어수선하게 배열돼 있었다. 어느 것은 지나치게 가깝고, 어느 것은 지나치게 멀었으며 그 사이로 난 골목길들은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도 없었다.
모르가 사는 흑회색 아파트는 전체적으로 묵직하고 투박해 보였다. 아이스트의 호화롭고 화려한 집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게스트 보루는 빙원 근처라 이곳 건물 대부분이 실내 보온을 고려해 지어졌다. 그래서 이런 건물 스타일이 형성된 것이었다.
물론 그런 스타일의 건물은 주로 구세계 파괴 후에 지어진 것들이고, 구세계 당시에 지어진 건물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기후는 격변하지 않았고 빙원도 이 근처까지 확장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스트 보루의 날씨는 남쪽만큼 따뜻하지는 않아도 혹독하게 추운 정도는 아니었었다.
차를 세운 백새벽이 아파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모르가 사는 데가 이 건물 꼭대기 층이에요.”
장목화는 그쪽을 잠시 관찰하다가 불쑥 웃었다.
“게스트 보루의 두 정보상 모두 이상한 데가 있네. 지티스는 말할 필요도 없고, 모르의 선택에도 어느 정도 모순점이 있어.”
“무슨 선택이요?”
용여홍은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내 장목화가 좌우를 한번 살폈다.
“이 거리와 골목길, 거미줄처럼 복잡해. 근데 여기 사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공장의 노동자들이랑 그 가족들이지. 구성이 단일화돼 있다는 거야.
즉, 우리 같은 유적 사냥꾼은 이 블록에 진입한 순간 양 떼 무리에 섞여든 사자처럼 눈에 띌 수밖에 없어. 아무리 노력해도 본인 정체를 가리고 이곳에 완벽하게 녹아들 수 없어.
모르는 정보 제공자 극소수만 있어도 이곳에 외부인이 진입했는지, 대체로 생김새가 어떤지 다 파악할 수 있어.
그 후에 모르는 그걸 바탕으로 판단을 내리고 지금 바로 이 구역을 떠나 미리 준비해둔 안전 가옥으로 피신할지, 아니면 충분히 준비하고 손님이 찾아오기를 기다릴지 결정할 수 있어. 이건 정보상의 기본 소양이야.”
순간 용여홍도 깨달음을 얻었다.
“모순되는 점이 바로 모르가 택한 거주지가 이동하거나 탈출하기 제일 불편한 꼭대기 층이라는 건가요?”
“맞아.”
장목화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성건우가 웃었다.
“만약 모르의 안전 가옥이 같은 건물이라면요? 그러면 움직이기는 오히려 더 편하지 않겠어요? 게다가 꼭대기 층은 모르가 직접 이 블록 상황을 관찰하기에도 좋아요. 혹은 모르한테 군용 외골격 장치가 있어서 외벽의 돌출부를 디디며 수월하게 6층에서 1층으로 내려올 수 있는지도 모르죠.”
그가 하는 말은 갈수록 엉뚱해졌다.
장목화는 간단히 대꾸했다.
“지티스의 말에 따르면 모르는 이미 나이가 들어 그럴 만한 기개가 없어. 그런 사람이라면 안전 가옥을 집 근처에 둘 리가 없고. 왜냐하면 적들은 기세를 몰아 주변 집들까지 다 수색할지 모르니까.
등잔 밑이 어둡다고, 모르가 집에 없는 모양이라고 그냥 떠날 가능성도 있기는 하겠지만 모르가 과연 그런 위험을 감수하려 할까? 젊었을 때면 몰라도 지금은⋯⋯.”
이 대목에서 그녀는 화제를 전환했다.
“근데 모르가 정말 제8 연구원과 관련이 있다면 군용 외골격 장치나 다른 뜻밖의 존재를 대비할 필요는 있겠지. 겐, 이번에는 우리랑 같이 올라가자. 작은 빨강이랑 작은 흰둥이는 차를 지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