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night Flower RAW novel - Chapter 840
840화. 혼란이 곧 시작된다
“진리는 달지기가 아니잖아요!”
성건우는 놀라기보단 즉각 반박했다.
그러자 유천이 분노가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성건우는 이에 주눅 들기는커녕 눈동자로 은백색 전광을 번득였다.
두 사람은 그렇게 몇 초간 서로를 응시했다. 더 버티지 못하고 먼저 시선을 옮긴 건 유천 쪽이었다.
“약하시네!”
성건우는 할 말, 못 할 말을 가리지 못했다.
불난 데 부채질하는 그의 행동에 유천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 향했다.
바로 그때였다. 지하실 안 모든 불빛이 동시에 깜빡이더니 하나하나의 작은 태양처럼 빠르게 밝아졌다.
“내 눈!”
성건우는 꽥 소리를 지르며 손을 들어 얼굴을 막았다.
다른 신세계 강자들도 손으로 눈을 가리거나 눈을 감는 등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누구도 감히 이렇게나 강한 빛을 직시하지 못했다.
짧은 폭발을 마친 빛은 원상태를 회복했다.
뒤이어 성건우를 비롯한 이들의 귓가에 낮고 흐릿한, 마치 또 다른 세계에서 전해져오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닿았다.
– 혼란이 곧 시작된다.
성건우는 눈을 번쩍 뜨고 지하실 좌측 벽에 떠오른 호리호리한 검은색 그림자를 보았다. 하지만 그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당신이 진리?”
그는 어떠한 경외심도 없이 검은 그림자의 말을 끊었다.
검은 그림자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 그렇다.
“오오.”
성건우는 짧게 감탄한 뒤 더는 끼어들지 않았다.
이후로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상당히 공손한 태도를 갖추고 있는 유천과 또 다른 한 사람을 목격했다.
플로라와 버나드를 비롯한 다른 이들은 그렇게까지 과장된 반응을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검은 그림자를 충분히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모두가 그렇게 집중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내 호리호리한 검은 그림자가 벽 위에서 한차례 아른거렸다.
– 혼란의 징조가 나타나면 너희는 연합해 탑으로 향해라. 도중에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된다.
찰리, 이 교수 같은 앞잡이를 맞닥뜨렸을 때 빠른 속도로 처리할 수 없다면 일부만 남겨 그들을 붙잡아 놓고 나머지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라.
때가 되면 내가 너희를 위해 탑의 대문을 열어줄 것이다.
그곳에 진입한 뒤 핵심 시설만 파괴하면 애쉬랜드로 돌아가는 통로를 발견할 수 있을 거다. 달지기들의 힘은 탑 안에 맴돌고 있다. 그건 너희들에게 어마어마한 위험을 초래할 거다.
하지만 그건 너희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이기도 하지.
혼란으로 인해 달지기들이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수 없는 틈을 노리지 않는다면 너희는 영원히 이곳에서 도망칠 수 없다! 다들 인내심을 갖고 이곳에서 혼란의 징조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라!
진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성건우는 즉각 오른손을 들었다.
“질문 있습니다. 혼란이 일어날 때 달지기들이 다른 곳에 신경 쓰지 못하는 이유가 뭔가요?”
그는 검은 그림자의 답을 듣지 못했다. 그림자는 할 말을 마친 후 급속도로 불어나면서 점점 커지다가 바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이를 보고 성건우가 실망한 얼굴로 말했다.
“엄청 빠르게 가 버리네! 꼭 우리 인간들이 무슨 맹수라도 되는 것처럼.”
유천은 고개를 틀어 그를 노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성건우는 그의 안색 따위 거들떠보지도 않고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혼란의 징조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유천도 이 단계까지 이르렀으니 더는 숨길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신세계에서는 비정기적으로 또렷한 동요가 일어나. 그건 탑에서 시작해 밖으로 퍼져나가는데 지진이나 폭풍, 건물 붕괴 등으로 나타나지.”
“비정기적이라고요? 그럼 얼마 되지 않아 혼란이 발생할 거라는 사실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성건우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유천은 소리 없이 숨을 들이마셨다.
“위대한 진리가 탑으로부터 전해준 소식이야. 매번 정확히 들어맞았지.”
“그렇군요.”
성건우는 그냥 믿어 주겠다는 표정을 보였다.
이후 그는 주제를 본론으로 되돌렸다.
“진리는 왜 우리 질문에 답하지 않은 걸까요? 곧 그렇게나 중요하고 위험한 상황이 펼쳐질 예정이면 다들 불안하기도 하고 궁금한 것도 많을 텐데.”
‘너한테서는 불안한 기색 같은 건 전혀 없어 보이는데.’
유천은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애쉬랜드어를 알아듣는 부근의 신세계 강자들이 성건우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을 보았다.
이에 유천이 얼른 침착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위대한 존재는 이런 작은 일에 신경 쓰지도, 의혹에 호응하지도 않아.”
“누가 그럽니까? 전에 달지기에게 기도했을 때는 응답을 받았는데요.”
성건우가 즉각 반박했다.
“어떻게?”
유천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플로라와 버나드를 포함한 일부 신세계 강자들 시선도 이쪽으로 쏠렸다.
달지기들이 신도의 기도와 질문에 응답하는 건 가끔 있는 일이었고 그들의 응답은 보통 신탁으로 선포되었다.
하지만 탑에 반항해 도주를 시도하려는 지하실 안 사람들에게 달지기라는 단어는 그 어느 때보다 무게감 있게 느껴졌다.
성건우는 정색을 한 채 말했다.
“다 어떤 말을 한 적은 없지만 전 그 뜻을 정확히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였지?”
유천이 캐물었다.
성건우가 엄숙하게 답했다.
“꺼지라던데요.”
지금의 그는 농담하기를 좋아하는 그였다.
“⋯⋯.”
대가로 유약한 성격을 갖게 된 유천조차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 * *
반고 바이오, 647층 14호.
구조팀 사무실에서 용여홍, 백새벽은 아무 할 일도 없어 보였다.
물론 이는 표면적인 모습일 뿐이었다. 사실 이들은 몇 가지 문제를 가지고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이틀에 한 번 외부 훈련을 할까? 신체, 정신 상태를 유지하려면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용여홍이 자발적으로 제안했다.
그 말에 담긴 진짜 뜻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장목화, 성건우가 게네바를 통해 전해오는 소식을 때맞춰 접하기 어려울 거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럼 지하 빌딩에 있는 두 사람은 가장 좋은 적기를 놓칠지도 몰랐다.
앞서 장목화는 조를 나눠 행동하기로 했을 때, 이 문제도 고려했었다.
그때 그녀는 모든 희망을 전보에만 걸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몇 번을 거쳐야만 전달되는 전보로는 때맞춰 회신받는 게 어려웠다.
또 다른 정보 전달 방법에는 그 녹음 펜이 있었다.
신세계에 진입한 성건우는 그의 육신과 밖에 남은 기운과 힘을 통해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즉, 그는 수종이와 오하명처럼 녹음 펜을 제 의지대로 켜서 동료들을 일깨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신세계의 장벽을 뚫고 힘을 전달해 의사를 표시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 작업에는 분명 지연이 따를 것이고, 그건 육신이 오줌을 지리는 속도보다 훨씬 느릴 터였다.
그래도 전보에 비하면 빠른 편이었다. 기껏해야 10분 정도 차이였으니 용여홍과 백새벽도 적기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단, 이 방법에는 변수가 존재했다. 오하명이 정확히 어느 정도 급인지도 모르는데, 성건우가 신세계에 들어가 반드시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으리란 장담을 할 수 있을까. 장목화도 확신은 없었다.
그러니 용여홍도 전보와 녹음 펜 중 어떤 것도 감히 홀시할 수 없었다.
“좋아.”
백새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제니 부부장님께 보고할게.”
용여홍은 팀장 책상의 컴퓨터와 전화를 돌아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구조팀 팀원이라 할 수가 없어.”
현재 그와 백새벽의 직무는 내근직에 더 가까웠다.
백새벽은 진지하게 얼굴을 굳혔다.
“팀이 해체되기 전까진 영원한 팀원이지.”
* * *
제8 연구원, 터널 대문 안.
장목화는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그대로 벽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감고 정신을 수양했다.
그녀는 방금 성건우에게 영양제 한 대를 다 놓아주었다. 이 틈에 자신도 휴식을 취하며 신세계의 혼란이 시작되길 기다릴 생각이었다.
때가 되면 그녀는 현실 신세계 핵심 구역의 그 미스터리한 건물에 들어가 볼 것이었다. 탑 같은 허상의 그 건물로.
* * *
신세계, 특수한 건물 지하실 안.
성건우는 플로라, 버나드를 비롯한 이들과 한담하다 돌연 탄식을 했다.
“아이고, 이런. 깜빡했네!”
“왜 그래?”
의자에 앉아있는 플로라가 관심을 표했다.
그 근처에 서 있던 성건우가 입을 열었다.
“혼란이 시작되기 전에 처리할 일이 있거든요. 그 사실을 알려야 할 친구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 그는 애쉬랜드풍 합원에 가서 어둠 속에서 흐느끼는 여자와 다시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혼란이 초래한 변화로 인해,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더 털어놓진 않을지 확인하고 싶었다.
또 염호를 비롯한 이들이 갇혀 있는 곳으로 가서 곧 혼란이 시작된다는 걸 알리고 그들을 가둬둔 존재가 그 틈을 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일러두고 싶기도 했다.
그뿐인가? 제이콥 등의 우호적인 이들에게 그들 역시 신세계를 떠나고 싶지는 않은지 물어보고도 싶었다.
“이 일은 극비사항이야.”
유천이 강조했다.
버나드도 덜덜 떨며 설명을 이었다.
“탑의 관리에 복종해 그런 방식으로 애쉬랜드에 수시로 돌아갈 권리를 얻으려는 이들도 있어. 부원장이나 찰리 등의 앞잡이에게도 추종자가 있고.
만약 우리가 이 혼란을 틈타 뭔가를 하려 한다는 소식이 퍼져나가면 이 작업에 따르는 어려움이 수직으로 상승해. 심지어는 혼란이 시작되기도 전에 달지기들의 신벌을 받게 될지도 모르지.”
“아⋯⋯.”
성건우는 실망스럽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전 대화를 알아들은 이들은 전부 반대 의사를 드러내고 있었다. 결국 성건우도 바로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또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생각이 튀었다.
“만약 이 비밀을 외부에 전하면 어떤 징벌을, 누구한테 받게 될까요?”
플로라가 성건우의 질문에 답했다.
“당연히 달지기들이지. 구체적으로 어떤 징벌을 내릴지도 그들이 그때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고.”
성건우는 모종의 깨달음을 얻은 듯한 표정을 드러냈다.
“그럼 외부에 비밀을 알리고도 징벌을 받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뭘까요?”
유천이 그를 바라보았다.
“가능성은 단 하나, 달지기들의 묵인이다.”
“아주 비밀스럽게 전달한 데다가 암호까지 더한 까닭에 달지기들이 못 알아들은 건 아닐까요?”
성건우가 캐물었다.
플로라는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 가능성은 없어. 장생 영역에는 사유 판독이 있고 말인 영역에는 기억 열람이 있으니까. 네가 그 정보를 외부에 전했을 때 일부 달지기들은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검사해서 그 목적을 파악했을 거야.”
“만약 여기에 이른 이래 달지기에게 기도하지 않아 아무런 표식도 받은 적이 없다면요?”
성건우는 미련을 놓지 못했다.
플로라는 버나드와 시선을 주고받은 뒤 재차 고개를 저었다.
“어느 정도 일리는 있지만 신세계는 달지기들이 만든 곳이야. 네가 전달한 정보는 장벽을 관통하면서 여과 절차를 거치게 될 거고, 달지기들은 그걸 추적해 곧장 널 찾아낼 수 있어.”
짝! 짝! 짝!
성건우가 손뼉을 쳤다.
“과연 오렌지 컴퍼니 이사시네요. 과학 기술적 비유를 드시는 걸 보면.”
오렌지 컴퍼니는 퓨쳐 인텔리와 마찬가지로 애쉬랜드에서 유명한 첨단기술 세력이었다. 그들과 비교하자면 생물, 의약, 인공지능 갑옷에만 뛰어난 반고 바이오는 겨우 그들 발꿈치에 미치는 수준이었다.
계속 성건우의 말이 이어졌다.
“어쩌면 달지기들이 날마다 아니, 달마다 교대를 서는지도 모르죠. 외부로 정보를 전달했을 당시의 당직은 마침 말인과 장생이 아니었던 겁니다.”
“장생은 한 해를 대표해. 그는 언제나 존재하고.”
레드리버인 플로라에게 윤달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장생은 제 친한 친구예요. 어쩐지, 그래서 정보를 전달하고도 징벌을 받지 않았나 봅니다.’
이 얘기는 성건우 머릿속에서만 울렸다. 직접 소리 내어 말하려 했지만, 갑작스럽게 올려진 오른손이 그의 입을 틀어 막아버려서 어쩔 수가 없었다.
이후 손을 내려놓은 그가 약간 실망한 듯 대꾸했다.
“그렇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