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night Flower RAW novel - Chapter 852
852화. 도중
성건우는 그녀를 재차 설득해 보려 했지만 상대는 깊이 상심한 듯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알았어, 알았어. 지금 갈게.”
성건우는 한편으로는 예의를 지키기 위해, 또 한편으로는 혹여나 인수영의 심기를 거슬렀다가 끔찍한 공격을 받게 될까 봐 깔끔하게 물러났다.
성건우는 앞으로 더듬더듬 이동했다. 그 사이 시야에는 먹물을 끼얹은 듯 한층 더 짙은 암흑 덩어리가 나타났다.
암흑은 마치 이곳을 떠나는 대문처럼 그곳에 우뚝 서 있었다.
지금까지도 인수영은 어둠 깊은 곳에서 울고 있었고, 그 소리는 들릴 듯 말 듯 번지고 있었다.
성건우는 그녀에게 위로를 건넸다.
“네가 무슨 고통을 겪었는진 모르겠지만 최대한 빨리 떨쳐버리길 바라.”
뒤이어 그는 양팔을 벌려 몸을 살짝 젖히고 위쪽을 비스듬히 바라봤다.
“모든 게 허상이고 꿈인데 진지하게 임할 필요가 어디 있겠어?”
인수영은 몇 초간 침묵하다가 대꾸했다.
“그 말은 내가 그들한테 가르쳐 준 거야.”
“⋯⋯.”
성건우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다시 낮게 흐느끼는가 싶던 인수영은 몇 초 지나지 않아 울음을 그쳤다.
그때 성건우는 보다 짙은 암흑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근처에 이르자 그 안에 자리한 문과 그 틈 사이로 미약한 빛이 스몄다.
성건우는 바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 *
밖은 전의 그 복도가 아닌 푸른 잔디밭이었다.
하늘은 티 없이 맑았고 도처에는 보탑과 보리수가 서 있었으며 땅에는 금, 은, 마노, 유리 등이 깔려 있었다.
더 멀리 떨어진 곳에는 산이 하나 있었는데, 산꼭대기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듯한 거대한 부처가 연화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산 주위로는 노란 승복에 붉은색 가사를 두른 승려들이 앉아 부처의 설법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중 더러는 주름이 아주 깊었고, 더러는 철흑색 얼굴로 불광(佛光)을 반사하고 있었다. 공통점은 성건우가 가까이 있는데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불가의 본대가 여기 있었네.”
안 그래도 탑 밖 신세계에 승려가 없다는 사실에 의혹을 느끼던 차였다.
곧 반기계 승려 제도 선사로 변한 성건우가 부처를 향해 합장했다.
“나무아뇩다라삼먁삼보리.
보리 부처님, 빈승을 깨우쳐 미혹에서 구제해주십시오.”
커다란 보리수 옆, 연화대 위에 앉은 부처는 그에게 호응하는 대신 웅장하고 장엄한 목소리로 모든 승려를 향해 말했다.
“나고, 살고, 변하고, 멸하는 그 모든 법도는 헛되니라. 모든 것은 무상하여 영원한 것이 없나니 이는 나고 죽는 법칙이고, 생과 멸이 다 소멸하고 나면 적멸한 것이 즐거움이니라.
본체는 고요하며 모든 것에서 떨어져 있으니 그리하여 적멸이라 불린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 산 자는 반드시 죽는다. 태어나지 않으면 죽지 않으니 이 소멸이 가장 큰 즐거움이 되느니라.”
제도 선사는 이 이야기에 머리를 긁적였다. 성건우의 본 모습을 드러내 이 극락정토를 어지럽히고 부처의 설법을 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이후로 그는 끊임없이 질문했으나 부처는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채 입멸의 이치와 초탈의 도를 설명하기만 했다.
“휴, 깨진 거울처럼 자신이 장생을 배반하고 몰래 입장을 바꿨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네⋯⋯.”
성실한 성건우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결국 그는 이 정토 반대편 끝에 자리한, 불광으로 응집된 금색 대문을 향해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 * *
소용돌이형 건물 입구.
장목화는 목적지만을 향해 곧게 나아가는 방법 덕에 단 10여 분 만에 이곳에 돌아왔다.
그녀는 소형 도시 외곽에서부터 시종일관 탑을 향해 곧게 이동했다.
탑 근처에 접근만 하면 어느 방향을 선택하든 원자력 발전소가 자리한 이 구역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형 건물 두 동이 있는 한, 이곳에 다다른 후에는 길을 잃지 않고 원자력 발전소 쪽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렇게 소용돌이형 건물 가장자리에 도착한 후에는 전처럼 벽을 끼고 따라가는 방식을 통해 입구를 찾으면 됐다.
장목화는 성건우를 업고 나무 상자를 안은 채 빠르게 리셉션과 대기 구역을 통과했다.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진입할 수 없는 그 구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시험 삼아 1미터 정도 더 나아가 보았다. 하지만 즉시 두통이 밀려와 제자리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장목화는 망설이지 않고 핵탄두가 담긴 나무 상자를 한쪽에 내려놓았다.
그 후, 붕대를 풀고 업고 있던 성건우를 소파 근처에 기대 놓았다.
준비를 마친 그녀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물 부대를 꺼냈다. 거기에 에너지바를 먹으며 짧은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장목화는 이제 이곳에서 성건우가 장생의 심령 세계 깊은 곳에 진입한 뒤 그 선홍색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때가 되면 그녀는 전방 구역에 진입할 기회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구역에는 제8 연구원의 궁극적인 성과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컸다.
아주 짧을 그 찰나를 놓지 않으려고 장목화는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이제 위층의 일반 연구 구역을 비롯한 장소 수색은 중단하고, 1분마다 앞으로 나가보면서 이 구역에 진입할 수 있을지 판단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위층을 수색해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자료 한 무더기와 특정 연구자의 상황 정도에 불과했다.
전문가로 이뤄진 팀이 뛰어든다고 한들 그것들만으로는 제8 연구원의 궁극적인 성과를 환원하기까지 1~20년은 걸릴 터였다.
하지만 눈앞의 구역에 그 궁극적인 성과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런데 굳이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있을까.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는 그런 여유를 부려봤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 * *
극락정토를 나온 성건우는 어느새 복도로 돌아와 있었다.
전방 멀지 않은 곳에는 선홍색 대문이 얌전히 서 있었다.
성건우가 방금 겪은 모든 건 환각이었다.
저 선홍색 대문을 보자마자 빠져든 환각.
뒤로 돌아선 그는 복도 양쪽 문이 모두 활짝 열려 있고, 그 안에 보이는 인영은 하나도 없다는 걸 발견했다.
전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대단해!”
성건우는 깨진 거울의 능력에 감탄했다.
지금 선홍색 문 양옆으로 자리한 문은 서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한쪽에는 음양 문양이, 다른 한쪽에는 대량의 점과 선이 새겨져 있었으며 각각의 문에는 유리가 끼워져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오른편 문에 끼워진 창문 안쪽에서 붉은빛을 내뿜는 얼굴이 하나 나타났다. 철흑색을 띈 그 얼굴에선 금속광이 번득였다.
순간 흥분한 성건우가 중얼거렸다.
“로봇이다! 신세계에도 로봇이 있나? 장생의 기억인가?”
그러자 문에 박힌 유리창을 사이에 둔 로봇이 말했다.
“들어가지 마! 지금 그 어떤 것도 망가뜨리지 마!”
“넌 어느 달지기야?”
성건우가 예의 바르게 물었다.
로봇의 얼굴은 맹렬히 왜곡되면서 액정 모니터로 바뀌었다. 동시에 그는 비웃음이 어린 말투로 대꾸했다.
“난 달지기가 아니야. 우린 본 적이 있어.”
“어? 잘 모르겠는데.”
성건우가 솔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내 액정 모니터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퓨처야.”
성건우는 그제야 상대를 알아봤지만 다시 곧 호기심을 느꼈다.
“너는 왜 문을 안 열고 있어? 거기 갇힌 거야?”
갑자기 창문 뒤쪽 액정 모니터가 환하게 밝아졌다.
동시에 애쉬랜드 문자 두 줄이 떠올랐다.
「인공지능이 움직임 없이 방 안에 틀어박혀서 곳곳에 연결돼 있는 거, 지극히 정상적인 일 아니야?」
“뭐야, 왜 말을 안 하고 글을 띄워?”
성건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이번엔 퓨쳐가 소리를 냈다.
“아, 난 말하고 싶을 때는 말을 하고 글을 띄우고 싶을 때는 글을 띄워. 넌 그럴 수 있냐?”
성건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생각보다 유치하네. 속도 좁고 마음씨도 음흉해.”
퓨쳐는 더 이상 말을 하지도, 글을 띄우지도 않았다.
성건우는 바로 그 문 앞으로 다가가 오만방자하게 말했다.
“너는 왜 내 앞길을 막으려 하는 건데? 날 설득할 기회를 줄게.”
퓨쳐가 냉소했다.
“차라리 너를 직접 없애라고 하지 그래?”
성건우는 박장대소를 했다.
“그야 넌 갇혀 있으니까. 행동의 자유가 없잖아.”
치직⋯⋯.
퓨쳐의 액정 모니터가 노이즈로 뒤덮였다. 주위 환경도 매우 어두워졌다.
성건우는 다시 또 웃었다.
“설령 네가 진짜 손을 쓴다고 해도 나한테 비장의 카드가 몇 장 있어.”
“몇 장?”
퓨쳐의 목소리에는 의혹이 어려 있었다.
성건우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한 번 헤아려볼까? 첫 번째 장은 살려주세요, 빅보스, 두 번째 장은 살려주세요, 에이돌른⋯⋯.”
“그만!”
퓨처는 게네바가 아니었다. 성건우와 절친한 친구가 아니니 그의 행동 방식 같은 건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시간 낭비하지 않으려면 바로 상대를 저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성건우가 다시 입을 열기 전, 퓨처가 먼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좀 특이하기는 해도 멍청이는 아닌가 보네. 반대편을 찾아 그 이유를 들어보려 하다니.
진리가 그랬지? 그들의 목적은 신세계 질서를 바꿔 이곳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거라고. 사명이 이미 애쉬랜드에 그들에게 적합한 육체를 준비해놨으니 더는 인간의 의식으로 스스로를 보충하지 않아도 된다고.”
“진리가 나한테 그 이야기를 해줬다는 건 어떻게 알아?”
성건우의 물음에, 퓨쳐는 별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간단한 분석만 해보면 바로 알 수 있지. 진리는 가장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녀석이잖아.”
성건우가 즉각 되물었다.
“다른 달지기는 움직이는 게 그다지 자유롭지 않은가 봐?”
퓨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성건우는 그제야 퓨쳐가 처음으로 한 말에 관심을 두었다.
“그래, 진리는 분명 그렇게 얘기했어.”
퓨쳐가 코웃음을 쳤다.
“정말이지 뻔하다니까? 사실이긴 한데, 전부 다 사실은 아니야. 신세계를 떠나 애쉬랜드에 진입해 적합한 육체를 점거하는 게 그들 목적인 건 맞아.
근데 그건 여러 목적 중 하나일 뿐이지. 그것도 우선순위가 가장 낮은 목적.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그들은 바로 또 그 방법을 고려했을 거야.”
“그럼 그들의 주요 목적은 뭔데?”
성건우는 퓨쳐의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퓨쳐는 곧 짐짓 엄숙한 목소리를 흉내 냈다.
“그들은 장생을 대체해 이 신세계를 장악하고 싶어 해.”
“여길 장악하면 뭐가 좋은데? 그냥 정신 감옥 아냐?”
성건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퓨쳐는 자세히 설명했다.
“그건 장생이 여길 정신 감옥으로 만들려 했기 때문이야. 사명을 비롯한 그들이 이곳 주도권을 장악하고 나면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신령이 돼.
왜냐고 묻고 싶겠지.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이 신세계는 오직 장생에 의지하고 있기에 나머지 달지기가 힘을 합쳐도 건립할 수 없다는 것뿐이야.
내 분석에 따르면 축적된 구세계의 하이테크놀로지, 세계 멸망 당시의 무시무시한 재난, 공교로운 우연과 약간의 운이 없었다면 신세계는 애초에 생겨날 수가 없었어.
사명을 포함한 이들은 장생을 대체하는 데 실패하면 그때 이곳을 파괴하고 애쉬랜드로 돌아가는 방법을 고려할 거야. 그 후 구세계를 파괴했던 것과 같은 급의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 한 신세계는 존재할 수 없을 거고.”
성건우가 손뼉을 쳤다.
“그렇구나. 그럼 너도 나를 저지할 필요는 없네. 만약 진리 편에 선다면 그들이 성공을 거두고 난 후에는 너도 한 몫 차지할 수 있을 테니까.
그에 반해 장생이 이길 것을 믿고, 실패자 대열에 서고 싶지 않다면 나를 저지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고.”
“난 양측 모두 파멸해 이곳이 소멸할 것을, 그래서 현상이 유지되지 않을 것을 걱정하는 거야.”
퓨쳐의 말투는 퍽 진지했다.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너는 싸움을 말리려는 쪽이구나.”
퓨쳐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유리창 너머의 성건우가 안쪽의 액정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너한테는 신세계가 굉장히 중요한가 봐?”
빠르게 몇 초간 분석한 끝에, 퓨쳐는 ‘속마음’을 말하지 않고서는 성건우를 설득할 수 없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이에 그는 약간 누그러진 말투로 답했다.
“여기서 난 반신령과 같아. 신세계가 없어지면 난 일반적인 인공지능으로 퇴화해. 소스 브레인 같은 불량품보다 약간 나은 수준에 그치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