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 Rank Supporting Role’s Replay in a Prestigious School RAW novel - Chapter 1011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011)
118. 개천 (12)
은광 글로벌 스타디움의 VIP 전용석.
황호는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적호는 시뮬레이터의 기록 영상을 보고 한참 동안 쌍욕을 뱉었고,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신수가 가끔 부추기는 것처럼 목을 울리긴 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김신록이 있다면 그래도 자제를 했을 텐데.’
아쉽게도 김신록은 이 자리에 없었다.
김신록이 담당한 2학년 1반에서 출전한 선수가 있었고, 반 아이들이 단체로 응원을 왔기에 담임으로서 인솔하는 중이었다.
적호를 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그 결과 황호는 귀를 적뢰로 얻어맞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거창한 욕을 실컷 들어야 했다.
적호가 입을 다물 때쯤엔 그 노고를 치하하는 것처럼 은호가 차를 내주었다.
“적호 님, 목이 타실 텐데 드세요.”
“감사합니다. 황호한테 해야 할 욕이 많다 보니 제 목이 고생하는군요.”
황호는 반박하지 못하고 그저 씁쓸해하며 비어 있는 자신의 찻잔을 보다가 직접 차를 따랐다.
그러다가 백호와 눈이 마주쳤는데, 백호는 말없이 신수를 쓰다듬으며 속이 후련하다는 듯 입꼬리를 조금 올리고 있었다.
표현은 크게 안 해도 황호가 욕을 먹은 게 참 기꺼운 듯했다.
‘백호와 조의신이 정말 친한가 보군.’
황호는 여전히 억울한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으나 친우들이 조의신을 저리 챙기니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실 지금은 과거의 발언 때문에 욕을 얻어먹는 것보다는 잠을 도통 자지 않는 은인이 더 마음에 걸렸다.
영상 기록에는 조의신이 자는 장면이 거의 없었고, 다른 공격대원이 유독 조의신을 신경 쓰는 장면이 많았다.
작전을 세운답시고 늦게까지 깨어 있던 적은 꽤 있었으나 본인이 직접 싸워야 하는 국면을 앞둔 상황에선 조의신은 최저한의 컨디션 관리는 했다.
조의신이 억지로 잠을 줄여 공격대의 짐이 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기에 잠자코 있긴 했으나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꽤 있었다.
‘왜 조의신은 잠들려 하지 않는 거지? 호족이 저들을 비호하지 않는다 선언하여 마음이 불안한 건가. 아니면 어린 공격대원들을 믿지 못하는 건가.’
조의신이 주장하는 것처럼 불면일 가능성도 있긴 했지만, 황호는 영 마음에 걸렸다.
조의신에게 불면증이 있었다면 은호가 알고 있었을 거고, 그럼 매번 숙면을 돕는 찻잎을 직접 조합해 대접했을 것이다.
황호의 근심이 깊어지고 있을 때, VIP실 중앙에 놓인 테이블 위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이계 시뮬레이터가 새로 작성한 레포트와 영상 업데이트 알림 메시지였다.
“시뮬레이터 기록이 업데이트 됐네요.”
“벌써? 이번엔 좀 빠르군.”
“좋은 현상은 아니에요. 보고 시기가 일정하지 않다는 건 이계 시뮬레이터의 연산 속도가 불안정하다는 뜻이니까요.”
“그렇다고 지금 시뮬레이터를 뜯어고칠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빨리 확인이나 합시다.”
시뮬레이터 속 시간은 그리 많이 흐르진 않았다.
곽경구가 야오러치를 데리고 호족의 영역으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게 마지막이었는데, 시간으로 따지면 이틀도 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문제는 그 과정에 있던 일이었다.
황호는 시뮬레이터 속에서 조의신, 독고미로가 청호와 만나는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작지만 신인께서 노래하는 게 들린다. 그리고 연주하는 건…….’
제일 먼저 황호가 떠올린 건 천신의 무녀였다.
무녀와 대화한 적은 그리 없었으나 연주는 숱하게 들었다.
신인은 허술한 반주에는 노래하지 않았고, 청호만큼은 아니어도 다들 신인의 노래를 사랑했기에 모두를 위해 연주에 능한 무녀가 자주 반주했다.
하지만 천신의 무녀가 반주 중이냐는 조의신의 질문에 청호가 부정했다.
―예언가는 먼 곳을 볼 줄 아는데, 가까운 곳을 볼 줄은 모르나 봐. 호족의 연주자라면 당연히······.
그 직후에 무슨 말이 이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화면이 암전되고, 소리가 끊어졌던 탓이다.
암전은 길지 않았으나 화면이 돌아오자마자 은호가 재생을 중단했다.
“기록 영상의 복원을 시도해 볼게요. 적호 님, 영상 축출 과정이 기록된 로그를 전부 확인해 주시겠어요?”
“알았습니다.”
은호와 적호가 즉각 작업에 착수했으나 소득이 없었다.
눈에 띄는 오류는 보이지 않았고 그저 기록이 되지 않았다는 것만을 알 수 있었다.
은호가 시원치 않은 결론을 내렸다.
“시뮬레이터는 이 시간대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했어요. 모든 기록이 영상으로 남는 건 아니지만, 연속된 장면에서 일부만 누락되는 경우는 처음이네요.”
“차후 다시 분석하는 게 좋겠군.”
“그래야겠어요. 우선 이어진 영상을 확인하죠.”
다시 영상을 재생하자 시뮬레이터 속 청호가 이어서 말했다.
―무녀의 연주를 듣고 싶어도 포기해. 그래도 보기와 다르게 그 녀석은 무녀보다 더 좋은 연주를 하니까 더 이득일걸? 인정하지 않는 자도 있지만, 그 녀석은 호족 최고의 연주자야.
신인의 희미한 노랫소리, 노래에 어울리는 은은한 연주가 끝날 때까지 호족들은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조의신과 독고미로가 처소로 돌아가는 장면이 나온 후에야 적호가 횡설수설 입을 열었다.
“최고의 연주자? 청호가 저런 표현을 쓰는 호족이었습니까? 청호는 신인 목소리에 귀가 트여서 그런지 연주에 아주 까탈스러웠습니다. 신인이 노래할 때 어떤 미련하고 역겨운 곰이 허접한 연주로 끼어들었던 적이 있었죠. 그때 청호가 벼락같이 나타나 발로 곰탱이의 주둥이를 깠던 게 생생합니다.”
적호가 말한 사건은 황호도 기억하고 있었다.
한창 적호와 웅녀가 서로 죽고 못 사는 시절, 몇몇 웅족은 웅녀의 마음을 호족이 내놓은 미친 호랑이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다 어느 웅족이 웅녀에게 잘 보인답시고 신인이 노래하던 중에 갑자기 악기를 꺼내 연주했는데, 객관적으로 따졌을 때엔 나쁘진 않았으나 청호의 기준엔 크게 미치지 못했다.
청호는 신인의 노래를 더럽히지 말라며 발길질을 해 은호가 말려야 했다.
다행히 당시 웅족의 수장은 주제도 모르고 웅녀에게 들이댄 곰의 탓을 하며 좋게 수습되긴 했다.
지금은 우스갯소리를 꺼낼 수 있는 추억담이었는데, 이 과정을 생생히 떠올린 황호는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런 아무래도 좋을 일은 기억나는데, 호족 최고의 연주자에 관해선 짚이는 바가 없다. 그런 자가 있었다면 왜 내 기억 속에 없는 거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으나 황호는 곧 이게 어디까지나 시뮬레이터임을 상기했다.
게다가 유적형 이계 시뮬레이터가 과거를 온전히 재현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계 시뮬레이터에는 땅의 기억을 왜곡시키는 보스 에너미가 존재한다.
애초에 유적형 이계 공략의 기본은 실제 역사와 달라진 부분을 찾아내 원흉인 보스 에너미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스 에너미가 호족 최고의 연주자인가? 이계 시뮬레이터가 없는 존재를 만들었을 뿐이라면 앞뒤가 맞는다.’
황호만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닌 건지, 적호가 비슷한 요지의 말을 했다.
“아, 없던 게 생기면 땅의 기억이 왜곡되니 시뮬레이터가 가짜를 만들었나 봅니다. 호족 최고의 연주자라니요, 그런 자가 있었을 리가…….”
적호의 말이 점점 흐려졌다.
만약 이 영상을 좀 더 예전에 목격했다면 적호는 자신 있게 저 연주자란 놈은 보스 에너미일 테니 빨리 처죽이고 클리어해야 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할 수 없었다.
조의신이 나타난 이후로 호족은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가까이에서 인간이 되어 있던 신인과 청호의 존재.
계속 잠들어 있었다가 깨어난 은호.
영영 잃은 줄 알았던 호족의 아이 안다인.
그들을 생각하면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상하군. 저 호족 최고의 연주자라는 존재를 부정하고 싶지 않다.’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불안하게 일렁였다.
황호는 그 생소한 감각을 애써 억눌렀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적호도 같은 심정인 것 같았다.
그에 비해 은호와 백호는 비교적 침착했다.
‘은호는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연표를 만들었다. 어쩌면 찾으려는 것 중 하나가 지금 내가 느끼는 위화감과 관련되었을지도 모르겠군.’
다른 생을 경험해 본 은호라면 지금 황호가 느끼는 위화감을 앞서서 느꼈을지도 모른다.
황호는 이 점에 관해 은호에게 묻고 싶었으나 대체 무엇을 어떻게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은호는 황호와 적호의 반응을 천천히 살피다 말했다.
“삿된 어둠이 땅을 덮었을 때에는 저와 청호 님은 큰 부상을 입었는데, 그럴 기미가 없어요. 보스 에너미의 정체가 저 연주자일 거고, 많은 일을 막았겠죠.”
은호는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위화감의 정체는 여전히 파악하지 못했으나 은호의 말에는 틀린 부분이 없었다.
은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문제는 어떻게 막았느냐에요.”
“어떻게라니?”
“직접 싸웠을 수도 있고,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있겠죠. 만약 보스 에너미가 직접 홀로 싸워 외적의 모든 수를 봉쇄할 만큼 강하다면 모든 공격대가 힘을 합쳐도 정면 승부는 불가능할 거예요.”
“그렇군. 당시 외적의 전력을 생각하면 그렇지. 생각한 바가 있다면 말해 봐라, 은호.”
은호는 보스 에너미가 직접 싸웠다고 생각하는 것 같진 않았다.
은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가 황호에게 물었다.
“제 생각을 말씀드리기 전에 질문드릴 게 있어요.”
“아까 하려다 못한 질문을 할 건가 보군.”
“맞아요. 황호 님이라면 예언가의 제안에 어떻게 반응하셨을지 듣고 싶어요.”
황호는 시뮬레이터 속의 자신에게 이입하여 생각해 봤다.
호족의 영역을 방문한 수상한 예언가를 찾아가서 죽이네 살리네 하며 떠드는 꼴은 금방 떠올랐다.
예언가가 어떤 노랫소리에 관해 묻는다면, 자신이 어떻게 답할지도 생각해 봤다.
“그 소리를 듣지 못했기에 정확히 판단할 수 없으나 내가 알고 있는 바라면 답해 줄 거다. 예언가의 수상한 얼굴이 몹시 궁금하니 말이다.”
“하지만 시뮬레이터가 재현한 황호 님은 은근히 말을 돌렸죠. 좋은 기회를 놓쳤네요.”
“그렇지.”
은호는 황호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예전부터 황호 님은 특이하고 신기한 것에 흥미를 느끼고 마음을 빼앗기곤 하셨죠. 아마 평소의 황호 님이라면 예언가의 제안에 망설임 없이 응했을 거예요.”
“하하! 내가 그럴 것 같나?”
“물론이에요. 처음에 의신이 형과 만났을 때, 조건부로 제안을 들어주셨던 것처럼 그랬겠죠.”
은호의 온화한 말에는 여전히 가시가 숨어 있었다.
은호는 아직도 황호가 빨리 조의신을 은인으로 대접해 주지 않은 걸 영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황호 님은 그런 흥밋거리보다 우선시하는 게 있어요. 바로 친우의 존재죠. 친우와 흥미를 두고 저울질한다면 황호 님은 친우를 우선시할 거예요.”
황호는 은호가 말한 친우라는 말을 무겁게 느꼈다.
물론 은호의 말대로 친우와 흥미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당연히 친우를 고를 것이다.
당연한 소리였지만 은호가 말을 꺼낸 타이밍을 생각하면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친우와 위화감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은호는 황호에게 되묻는 대신 이번엔 백호를 보며 말했다.
“안 그런가요, 백호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