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101
101
신세기
에이네는 한 마리 벌레, 엄지손가락 한마디만 한 벌레를 손에 들고 그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동면 상태에 있던 벌레가 깨어나 신호를 발하는 순간 거대하고 복잡한 세계가 에이네의 뇌에 직접 전해졌다.
양자 공명, 양자 컴퓨터나 양자폰의 통신에서나 쓰이는 기술이 벌레의 대사 활동으로 재현되고 있었다. 조잡하긴 했지만 분명 양자 공명 기술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녀가 과학 기술을 잘못 본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에이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양자 공명 기술이 자연적인 생물에게서 나올 수 있느냐? 절대 없다. 양자폰이 괜히 비싼 게 아니고, 우주 함대의 모함에 있는 양자 컴퓨터가 괜히 과학이 가진 최고의 연산 기기가 아니다.
양자 공명은 과학의 사도들이나 접할 수 있는 이론이고, 기술이었다.
생물이 진화해 양자 공명을 이룬다는 건 불가능했다. 지나치게 비효율적이다. 그 자체로 생물의 단순성을 해치며 유전자 리소스 대부분을 사용한다. 이 벌레도 그렇다. 생물이 필수로 가져야 하는 대부분의 기능이 사라지거나 퇴화해 자력 생존은 불가능했다.
마치 부품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만 설계된 생명이다.
그래도 의문이 남는다. 누가 이런 생물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에이네는 여기서 막혔다. 이런 생물을 만드는 건 과학도 불가능하다.
벌레 하나로 과학의 첨단 기술을 흉내 낼 수 있다면 과학이 시도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유전자 게놈을 어떻게 건드려도 저런 생물은 만들 수 없다.
자연적으로도, 인공적으로 존재하는 게 불가능한 생물이다. 그런데 벌레는 존재한다. 지금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끼어있다.
“근원 세계가 근원 세계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씁.”
이건 혼자 처리할 문제가 아니다. 그녀는 통신을 열고 함대와 통신을 연결했다. 동시에 김 교수도 호출했다.
설명을 들은 김 교수는 꽤 근원 세계에 찌든 소리를 해댔다.
-근원 세계가 근원 세계했군요. 드론을 몇 기 보내겠습니다. 샘플을 좀 넘겨주시겠습니까? 이왕이면 기기 통째로 말입니다.
“준비해둘 테니까 돈이나 보내. 최후의 안드로이드를 좀도둑으로 만들 셈이야?”
직원 역할을 하던 안드로이드를 해킹한 시점에서 도둑을 넘어선 강도였지만, 에이네는 그 부분은 깔끔하게 무시하기로 했다. 과학의 발전을 위한 사소한 희생이다. 잠시 프로그램이 다운된 거지 죽은 것도 아니지 않은가?
스타몰록에도 과학의 신자는 존재했다. 근미래식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선 과학의 신자들의 도움이 필수였다. 김 교수가 수배한 드론은 10분도 안 되어 도착했다.
에이네는 드론에 헬멧을 들려 보내고, 드론이 가져온 보석을 대충 카운터에 던져둔 다음 마무리로 안드로이드와 주변 기기의 정보를 조작했다.
‘극악한 범죄자가 된 기분이지만… 뭐 어때.’
에이네는 개운한 기분으로 가게를 나섰다.
***
에이네가 조달한 헬멧은 과학의 최신 비행기를 통해 근원 세계 각지로 전달되었다. 대부분이 우주 함대로 향했다. 에이네가 발견한 벌레의 존재는 과학의 성인이 직접 관심을 가질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밖의 물건들은 과학의 사도들과 뛰어난 신자들에게 하나씩 전해졌다. 김 교수도 헬멧 하나를 받아볼 수 있었다.
급조한 고정대 위에 검은 헬멧이 고정됐다. 여러 센서가 달린 카메라를 통해 검은 광택을 내는 헬멧을 관찰하며 김 교수가 생각했다.
‘하나 가지고 생명을 분석하라니…….’
조금 지나친 처사였다. 급한 대로 근원 세계 전체에 수배를 넣어 구할 수 있는 물량을 모조리 사들이고 있긴 하지만, 충분한 숫자가 확보될 것 같지는 않았다. 기기 개발자들은 단지 설계도만 보고 만든 인간들이며 그들은 벌레를 가장한 부품의 존재도 몰랐다.
양자 기반 통신을 막을 방법은 현재로선 없다. 공간이동 마법이 도주의 끝판왕이라면, 양자 통신은 비밀 통신의 끝판왕이다. 통신에 간섭할 방법은 통신 자체를 막는 방법뿐이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아깝지만 김 교수는 벌레를 죽였다.
헬멧을 뚫고 들어간 나노 단위의 작은 침이 벌레에게 독을 투입. 벌레의 생체 반응이 사라지자 김 교수는 본격적인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시작했다.
헬멧 자체에 사용된 기술은 특별할 게 없었다. 벌레의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밝혀내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듯했다. 맘 같아서는 클론이라도 만들고 싶지만, 벌레의 클론을 만드는 건 유전적으로 불가능했다.
억지로 같은 유전자를 가진 클론을 만들어도 클론은 에이네가 보냈던 것과 같은 반응은 나타나지 않았다. 유전자 말고 다른 원인이 있다.
김 교수는 그리 결론 내렸고, 다른 교수와 박사, 그리고 함대에서 내려온 결론 또한 비슷했다.
이런 돌연변이 벌레를 만들어 키우기 위해선 역병의 권능이 필요하다.
***
헬멧을 김 교수에게 전달한 에이네는 현의 숙소로 직행했다.
띵똥. 띵똥. 똑똑. 똑똑.
초인종을 눌러도, 노크해도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그냥 문을 따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는 폐인을 보았다.
100시간 연속으로 게임을 하는 한국인도 폐인이었고, 열흘 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은 냄새나는 수인도 폐인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폐인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사람은 없다고 에이네는 확신했다.
일단 바닥. 배달 음식과 간식들의 시체(?)가 처참하게 땅바닥에 굴러다녔고, 수십 병의 페트병이 한구석에 쌓여 있었다. 그리고 거실 벽면에 달린 커다란 화면을 바라보는 중년 아저씨가 있었다.
덥수룩한 수염에 떡진 머리를 한 아저씨는 묘하게 반짝이는 눈으로 화면 안 캐릭터를 조작하고 있었다.
얼굴이나마 준수하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눈 뜨고 못 볼 꼴을 볼 뻔했다. 에이네는 발치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를 툭툭 걷어차 치우며 현에게 다가갔다.
“뭐?”
현의 반응은 그 어느 때보다 무관심했다.
“몇 시간째 이러고 있는 거야?”
잠깐만, 하고 게임의 플레이 타임을 보고는 현이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답을 냈다.
“80시간?”
에이네는 기가 막히는 한편 궁금했다. 김우현이라는 인간은 청결을 유지할 수 있을 때는 되도록 청결하게 지내는 인간이었다. 몇 걸음만 걸으면 몸까지 담글 수 있는 욕실이 있고, 룸서비스를 부르면 안드로이드가 청소까지 해주는 환경에서 이토록 더럽게 지낼 인간이 아니었다.
얼마나 재미있으면 이 인간이 이렇게까지 게임에 열 올리고 있을까.
“재미있냐?”
“직접 해봐.”
현이 무관심하게 대답했다. 오기가 생긴 에이네는 현이 사용하는 게임기와 옆에 쌓아둔 게임 타이틀을 외웠다. 방에 돌아가 게임기와 게임을 만들어서 직접 해볼 생각이었다.
방을 나가는 에이네의 기척을 느끼고 현이 픽 웃었다. 이성철의 말에 따르면 이 게임들은 천마를 위해 만들어졌다.
인생이 무쌍인 천마가 다 때려 부수는 무쌍류 게임에 흥미를 느낄 리도 없고, 강자존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이비 종교의 소교주로 태어나 천마의 좌에 오르고 근원 세계에서 소환되어 살아남은 천마가 어쭙잖은 신파에 흥미를 가질 리도 없다.
이 게임들은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가 최고의 제작자들과 만든 궁극의 게임이다. 쉽게 말하면 이 타이틀 하나하나가 최고의 퀄리티를 자랑한다.
하나 더. 폐인 생활이라는 건 단지 게임을 많이 하는 것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쌓여가는 컵라면 용기와 배달 음식의 그릇들, 그리고 다 마신 페트병들이 만들어내는 묘한 성취감 또한 폐인을 폐인으로 만드는 요소다.
현은 시간이 없어 방을 치우지 않은 것이 아니다. 치우지 않는 편이 더 게임을 재미있게 즐길 수 있으니 치우지 않은 것이다. 이 정도면 그렇게 더러운 편도 아니고.
게임 몇 개를 더 클리어했을까. 시간을 세는 것도 귀찮아진 현은 클리어한 게임들을 치워두고 눈을 붙였다. 그런 다음 세면을 하고 안드로이드를 불러 청소를 시킨 후 에이네의 방으로 가보았다.
옆방에는 빈 그릇과 과자 봉지 사이에 앉아 붉고 퀭한 눈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패드를 꽉 쥐고 있는 안드로이드가 있었다.
현은 조용히 문을 닫고 방에서 나왔다. 에이네는 이미 한 명의 훌륭한 폐인이 되어 있었다.
***
무탈했다. 무탈, 무사고, 평범 등의 단어가 갑갑하다는 것에 이성철은 화들짝 놀랐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놀라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는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너무 즐겨서 대회까지 나와 있었다. 대회 이름도 무려 ‘한국인을 이겨라!’였다. 원래 다른 제목이었는데 이성철이 참가 신청을 한 시점에서 주최 측이 대회 이름을 바꿔버렸다. 그런데 반발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국인이 참가한 이상 우승은 물 건너갔으니 한국인과 게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사람이 더 많았다. 애초에 그들이 노리는 건 상금이 아니라 명예였다. 게이밍 섹션에 숙박하는 사람치고 돈 모자라는 사람은 얼마 없다. 한국인에게 게임을 이긴 사람이라는 명예가 그들에게는 더 중요했다.
반복해서 도전해오는 도전자들을 기계적으로 쓰러뜨렸다. 이성철의 머리는 딴 곳에 가 있었다.
‘휴식이란 걸 취해본 적이 언제였지?’
계획적인 휴식 아닌 무계획적인 휴식. 가고 싶은 곳을 가고, 하고 싶은 것을 한다. 마지막으로 그랬던 게 언제였지? 합계 8년 정도 게이밍 섹션에서 보낸 시간이 있긴 했다. 그러나 그건 휴식보다는 포기였고, 그 후에는 천마와의 끈을 만들기 위한 수단이었다.
회귀자가 된 후 그의 인생에서 진짜 휴식이란 없었다. 휴식은 싸움의 연장선이었고, 다음 한 수를 위해 힘을 비축하는 기간이었다.
의무적인 휴식을 취하며 마음을 놓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낯설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게임기 앞에 앉아 있는 자신이 낯설다. 마음 한구석에서 간질거리는 즐거움이 낯설다.
게이머의 자존심을 걸고 도전해오는 도전자들을 보는 것이 기분 좋으며 낯설다.
낯섦을 깨달은 이성철은 이상하게 이 자리가 편해졌다. 기기판을 두드리는 그의 손이 빨라졌다. 좌절하며 떨어져 나가는 도전자가 늘어났다. 어느새 대회가 끝나갔다.
이성철 앞에 한 여성이 앉았다. 주위가 술렁거렸다. 뭐라 하는 것 같은데, 묘한 흥분에 주변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이성철은 직접 일어나 상대를 봤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몸에 달라붙는 검은 무복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 칠흑보다 검은 눈동자. 눈동자의 주인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머리가 차가워지며 심장 박동이 느려진다. 흥분이 싹 가시려는 차에 천마가 입을 열었다.
“도전자를 두고 챔피언이 도망가? 그건 내가 용서 못 하겠는데.”
낯섦이 익숙함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흥분은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심장은 더욱 두근대며 뛰었다.
게이밍 섹션에서 천마를 만나길 얼마나 기대했던가. 그러나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야 천마를 만났다. 천마를 만나면 할 일이 많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과거. 지난 회차의 이야기다.
모든 것이 헝클어진 이번 회차에서 천마와 만날 계획은 없었다.
이성철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는 챔피언이었고, 천마는 도전자였다. 챔피언은 도전자의 도전을 받을 의무가 있다.
“좋아. 그 자세야.”
게임이 시작됐다. 이성철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가 모르는 믿음과 신앙이 그의 실력을 보정해주고 있어도.
절대적인 실력 차이가 압도적이었다. 신체 능력부터가 격이 달랐다.
이성철은 천마를 상대로 한 라운드도 따내지 못했다
챔피언이 쓰러졌지만 함성은 없었다. 모두가 절대적, 압도적 존재의 등장에 얼어 움직이지 못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세상에 홀로 오롯한 여인 천마. 그녀는 자리에 서 있음으로서 자리를 지배했다.
“그놈에게 전해. 마는 마가 아니라 변환이었다고.”
그 말만 달랑 남기고 천마는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