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102
102
신세기
천마가 사라지자 머리에 찬물이라도 부은 것처럼 머리와 심장이 차가워졌다. 이성철은 바로 이벤트 회장을 빠져나왔다.
그를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천마의 등장에 얼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성철은 숙소로 돌아왔다. 그는 호텔 하나에 방 3개를 빌려 숙소로 삼았다.
대회까지 포함, 20시간 정도 연속으로 게임을 했지만, 피곤하진 않았다. 오히려 딱 좋았다.
천마가 말한 그놈이 누군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성철은 현의 숙소로 향했다. 현이 안에 있다는 건 이미 마력 반응으로 확인했다.
문을 따고 들어가자 안은 흔한 폐인의 방이 되어 있었다.
이성철은 쓰레기 사이로 걸어가 인간쓰레기가 되어가는 중인 현을 불렀다.
“천마의 전언이다.”
게임 화면이 멈추고 현이 고개를 돌렸다. 다크써클이 짙게 내려온 퀭한 눈이 이성철을 주시했다. 이성철이 계속 말했다.
“마는 마가 아니라 변환이다.”
“그게 끝?”
“끝이다.
현은 그대로 게임을 종료했다. 물과 불의 정령을 불러 청소를 시키자 쓰레기가 불에 타고, 남은 재는 물과 함께 쓸려갔다. 방이 순식간에 깨끗해졌다.
현의 눈에도 빛이 돌아왔다.
“마신의 능력에 대해서는 전부터 말이 돌았지. 마의 신을 칭하는 것치고 마족은 능력도 행동도 마와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대부분은 마족은 악했다. 그러나 그걸 두고 마족이 악하냐를 논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마족 입장에서 북대륙 멸망은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당장 재앙으로 지목당해 세계가 적이 되어 달려드는데 당장 살려면 가까운 적부터 죽여야 했다.
그 과정에서 악행을 벌인 마족도 있지만, 모든 마족이 악행을 벌인 건 또 아니었다.
마신도 그렇다.
마신의 마가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또 마가 권능이라면 그 권능은 어떤 식인가.
시간, 역병, 죽음, 조율, 마법, 본능, 전쟁. 특징과 능력이 뚜렷한 다른 재앙들과 달리 마신의 권능은 명확하지 않았다. 마신에게서 태어난 마족들의 능력도 제멋대로였다.
다른 재앙도 능력의 종류가 여러 가지이긴 했다. 그러나 그건 모두 재앙의 큰 틀 안에서 변화한 권능들. 마족의 능력처럼 공통점도 없이 중구난방이진 않았다.
그게 마신의 특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면? 마신의 능력 자체를 착각하고 있던 거라면? 전제 자체를 뒤집어야 했다.
“변환이라고 해도, 감이 잘 안 잡히는데.”
“그걸 나한테 물으면 나라고 답이 있을 것 같나? 난 천마 만난 게 오늘 처음이다.”
“그것도 그래.”
천마는 선문답을 싫어하고 직설적이다. 천마가 그 말밖에 안 했다면, 그 이상 알아낸 게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마신의 성녀가 모른다는데 추측만으로 마신의 권능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은 섣부른 짓이다. 현은 마신의 권능에 대해 기억 한쪽에 고이 모셔두기로 했다.
‘붉은 책과 마신의 권능. 모르는 것만 벌써 둘이군.’
근원 세계에서도 나름 오래 살았고, 많은 것을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살다 보니 모르는 게 자꾸 쌓인다.
근원 세계는 역시 근원 세계였다.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이 차례로 일어난다.
게임기에서 벗어난 김에 현은 양자폰을 들었다. 일을 함께하면 휴식이 아니다. 게이밍 섹션에 있는 동안 현은 위원회 어플을 통한 정보 수집도 게을리하고 있었다.
무의 일주일이 있고, 리센이 쫓겨나고 열흘이 지났다. 열흘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나려나 싶었던 방심이었다. 그러나 근원 세계는 현의 예상을 멋지게 배신했다.
무엇이 그들을 그리 급하게 만들었던 건지 위원회의 일 처리는 현이 생각했던 것보다 3배는 빨랐다.
위원회 어플의 정문 화면에서는 현상범이라는 이름으로 떡하니 세 사람의 얼굴이 걸려 있었다.
현이 어플 화면을 보여주자 이성철도 빠릿하게 움직였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현은 에이네의 방으로 가 폐인 상태인 에이네에게 얼음물을 뿌렸다.
“아푸푸. 퉤엣. 뭐야, 뭐하는 짓이야! 하이라이트였는데, 죽었잖아!”
에이네는 몸이 젖은 것보다 게임 캐릭터가 죽은 것에 더 화를 냈다. 현이 팔을 잡고 에이네를 억지로 일으켰다.
“휴식 끝. 저 캐릭터처럼 되기 싫으면 움직여야 할 거야.”
현이 양자폰의 화면을 에이네에게 들이댔다. 에이네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으면서도 에이네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내 현상금이 제일 낮아?”
수배서에는 현상금이 나와 있었는데, 셋 중 에이네의 현상금이 가장 낮았다.
“이성철은 다회차 회귀자, 나는 위험인물, 너는 그냥 무공 좀 쓰는 안드로이드. 누가 봐도 네가 아래지.”
“마력 흡수 능력도 있고, 마법도 쓸 줄 알거든?”
“그래, 그거까지 포함되어 있다면 퍽이나 현상금이 이리도 낮겠다.”
생포를 조건으로 백지 수배서가 돌겠지. 에이네의 죄목은 간단했다. 김우현 암살범들과 공범일 가능성 있음. 리센과 같이 있는 걸 위원회 사람들에게 들켜서 붙은 죄목일 것이다.
참고로 김우현 암살범 용의자로 지목된 리센은 현과 비슷하게 어플 홈 화면에 수배서가 걸려 있었다. 호르스는 덤이었다.
“지구 출신들이 연달아 흉악범이 되고 있네. 다음은 윌리엄이려나.”
“그럼 큰일 나는 거 아냐?”
“윌리엄까지 쫓겨나면 다음은 누가 그 자리를 채우겠지. 자기 일밖에 신경 안 쓰는 놈들이긴 해도 위원회의 중요성을 모르는 놈들은 또 아니거든.”
그것도 모르는 놈들이었다면 애초에 위원회가 창립될 일도 없었다. 삐걱거려도 위원회가 제 역할을 하고 있으니 침묵하고 있지. 위원회가 기능을 잃으면 그때부터 세계의 주축이라 할 수 있는 괴물들이 움직일 것이다.
“그런 막장 조직이 어떻게 굴러갔는지 신기하다.”
주 전력은 위원회 일에 무관심해, 머릿수 채우기로 가입시킨 것들은 권력만 탐내, 현이 생각해도 막장 조직이 맞긴 했다.
“막대한 권력이 얽혀 있으니까. 화무십일홍이라고 해도, 꽃이 아닌 거목이 되니 십 년은 가네.”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 권력이라 해도, 그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면 자체적으로 살아남으려는 방법을 모색한다는 걸 현은 위원회를 보며 알았다.
위원회 가맹국 중에는 서로 적대하는 국가나 조직도 있다. 그런 놈들도 바깥에선 피 튀기게 싸우다가 위원회의 권위가 위협받을 일이 있으면 득달같이 달려든다. 그 과정에서 서로 협력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린다.
그걸 옆에서 보고 있으면 한 편의 코미디 같아 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모든 싸움과 대치는 권력 유지와 권력 확장을 위한 수단이며, 그 과정에서 흐르는 피는 명예로운 피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가족에서 선물로 돌아간다. 포장지를 뜯으면 안에든 건 한 줌의 명예와 돈. 권력은 단 한 줌도 나누지 않는다.
위원회를 지탱하는 것 중에는 그런 권력자들의 욕심 또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 욕심 때문에 위원회가 무너지려 하고 있고.
또.
“그 질긴 권력이 우리를 노리고 있기도 하지.”
“어떡할 거야?”
단순히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게 아니었다. 완전히 포위된 이 상황을 어떻게 할 건지가 포함된 물음이었다.
호텔 바깥으로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은밀한 마력이었지만, 현과 에이네를 속일 정도는 아니었다.
“방법을 조금 바꿔볼까.”
이때까지는 도망만 쳐 왔다. 살아남으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고 여기기도 했었고, 또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그러나 많은 게 바뀌었다. 자신을 노리는 자들은 한정되었고, 그리 강하지도 않다.
근원 세계니 무슨 일이 일어날지 조심할 필요는 있겠지만, 초월자들의 표적이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수동적, 소극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없다.
‘존재도 불분명한 암살자? 내가 안 움직여서 가만있는 거라면 내가 깽판을 치면 되지.’
이래도 안 나오면 정말 포기다. 그런 놈들은 없거나 죽은 걸로 치자.
현이 이성철에게 전음을 보냈다.
-준비됐냐?
-짐은 챙겼다. 그런데 무슨 준비?
-이런 준비.
호텔 지붕이 날아갔다. 옥상이 되어버린 호텔 최상층에서 현은 호텔을 포위한 사람들의 면면을 살폈다.
“드디어 미친 거냐?”
이성철이 현에게 힐책하는 눈빛을 보냈다. 현은 담담히 견적을 쟀다.
“가만있어 봐.”
요원은 거의 없고, 대부분 위원회 가맹국이나 기업 소속이었다. 할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위원회 놈들이 미쳤나?
상대가 누군지 안다면 절대 인선을 이렇게 짜지는 않았을 텐데.
‘여론의 선택일 리는 없고, 일부의 폭주인가.’
현은 눈앞의 오합지졸을 보며 그렇게 평했다. 우연히 정보를 접한 놈들이 급하게 파견한 병력.
그게 아니라면 저런 인선은 나올 수 없다. 지나친 무시에 현은 살짝 열이 올랐다. 티는 잘 안 내도 현도 자존심이 있었다. 근원 세계에 1세대로 소환된 지구인으로서 초월자까지 오른 힘에 대한 자존심.
저 병력은 현의 자존심을 무시하는 파병이었다.
“내가 나대지 않았다고 성격이 죽었다고 생각했나?”
피하는 게 최선이었기에 피했다. 싸울 이유가 없기에 싸우지 않았다.
단지 그뿐이다.
현은 한 번도 살생을 망설인 적이 없다.
“지금부터 행동 방침을 바꿀 거야. 무조건적인 도망에서, 적극적인 개입으로.”
지금부터 할 행동이 그 첫 번째다.
현이 빌딩 아래로 뛰어내렸다. 수백 개의 공격이 직선으로 날아왔다. 그 모든 것들이 현의 눈에는 느리게만 보였다.
느리다. 너무 느리다. 하지만 투사체가 느린 것에 비례해, 현의 몸도 느렸다. 육체가 인식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는 이 괴리도 없애야 할 과제다. 그러나 당장은 이대로도 좋다.
현은 느려진 세계 속에서 조금씩 몸을 움직였다. 명중하지 않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몸을 향해 오는 것 중 치명적인 것들은 손가락에서 뽑아낸 강기로 잘라내고, 스쳐 지나가는 것들은 방치했다.
느림의 세계가 끝났다. 게임에서 흔히 블릿 타임이라 불리는 것, 현이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신앙의 보정은 현실의 싸움에도 도움을 줬다. 지금의 현은 평소보다 두 수는 위의 싸움이 가능했다.
떨어지는 현과 하늘로 날아가는 공격들, 두 개가 허공에서 교차했다.
놀라는 얼굴들이 보였다. 현은 그들 사이로 착지했다. 무인들이 강기를 감은 무기를 들고 공격해왔다.
느리다. 그리고 약하다.
현의 열 손가락에서 뻗어 나온 수십 개의 강기사가 사방을 난도질했다. 환幻이니 쾌快니 하는 기술은 쓰지도 않았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강기 다발. 그것에 다가오던 모든 것이 잘려나갔다.
천마신공으로 만들어낸 강기는 다른 강기와는 강도 자체가 달랐다. 이 정도 수준의 놈들을 상대로 초식을 쓰는 건 천마에게 실례였다.
요원들이 나섰다. 이건 현도 이기기 힘들다. 빈틈없는 합격진은 조율의 성인 뤼필의 작품이다.
숙달하기만 하면 몇 배의 위력을 발휘하는 합격진을 두 번째 벽을 넘은 위원회 요원들이 사용하고 있다.
현은 강기사로 요원들을 견제하며 뒤로 빠졌다. 현은 혼자 싸우는 게 아니었다. 혼자 버겁다면, 남은 둘의 힘을 빌리면 된다. 작은 빛이 요원 하나의 이마를 관통했다.
옥상에서 이성철이 근미래적 디자인의 권총을 조준하고 있었고, 에이네는 빌딩을 밟으며 땅으로 빠르게 내려오고 있었다.
마력 흡수에 천마신공의 강剛을 익힌 에이네는 존재 자체가 불도저였다. 위원회 요원들을 싹 밀어버렸고, 그들은 싹 밀려버렸다.
요원들에게 마력 흡수 능력에 대한 대처를 바라는 것은 과한 바람이었다.
핵심 전력이 죽자 나머지도 일사천리였다.
몰살.
빌딩을 포위하고 있던 놈들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싸움이 마무리되고 빌딩에서 내려온 이성철이 시체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결국 저질렀군.”
“더 좋은 방법 있어? 위원회가 본격적으로 나서는 상황에서.”
“아니, 없다.”
“그럼 됐잖아?”
“그것도 그렇군.”
묘하게 쉽게 납득하는 이성철을 향해 현과 에이네가 의심스런 시선을 보냈고, 이성철은 그냥 어깨만 으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