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233
233
세계 부수기.
“좋아, 그 전에.”
로드에게 연락하기 전에 현은 엘로렌을 보았다. 엘로렌과 아벨의 권능은 비슷하다. 아벨이 할 수 있는 일은 엘로렌도 할 수 있다.
바벨을 무너뜨리는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벨 하나만이 아니다.
“세계의 끝에서 관찰을 위한 권능을 제외한 어떤 권능도 사용하지 않을 것을 밈의 유전성에 걸고 맹세할게요.”
“같은 내용을 밈의 유전성에 걸고 맹세한다.”
“나도 맹세한다.”
젭크와 로한도 엘로렌을 따라 맹세를 외웠다.
이로써 엘로렌은 밈으로 직접 바벨을 무너뜨릴 수 없게 되었다. 엘로렌은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계획에 밈의 권능은 필요하지 않다. 그녀는 조건만 갖추면 된다. 거기에 꼭 권능이 사용될 필요는 없다.
-그 이선이라는 자가 아벨이라면, 네 계획을 모두 알고 있다는 뜻 아닌가?
권능을 통해 젭크가 엘로렌에게 대화를 걸었다.
-알고 있어. 아벨이라는 밈을 설정할 당시의 내가 알고 있던 정보는 아벨도 알고 있을 거야.
엘로렌이 통한의 실수였다. 아벨은 그녀가 대충 만든 밈이었다. 현에게 접근해 세계의 끝에 도달하기 위한 장치로서의 밈. 말만 무성하고 실체하지 않는 인간.
누군가 밈의 실체를 알아내고 비어 있는 아벨의 지위를 차지하는 건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그녀조차 가상의 아벨이 현실로 탄생하기 전까지 그런 일이 가능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이 일어나고, 상상하지 못했던 일도 일어난다. 그야말로 근원 세계다운 사건이었다.
엘로렌이 아벨에게 부여한 밈은 자신의 숙적, 대항마, 라이벌 개념이다. 라이벌답게 아벨에겐 그녀와 동급의 권능과 지식이 제공된다.
아벨은 그녀의 계획을 모두 알고 있다. 그녀가 세계의 끝에 발을 들이면 모든 게 끝난다는 것도.
-밈의 역할은, 재앙 밈으로서 우리의 역할은 광기의 잔재를 세계의 끝에 가져가는 걸로 끝이야. 그 끝에 함정이 있어도 좋고 죽음이 있어도 좋아. 여기까지 와서 겁먹은 건 아니지?
-그냥 알아두라는 거였다.
부서진 세계의 끝이 그녀의 눈에 보였다. 밈을 보는 눈이 부서진 세계를 담아냈다. 부서지긴 했지만,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계산이다.
엘로렌이 젭크와 떠드는 사이 로드에게 허락을 받아낸 현이 말했다.
“들어간다.”
약한 어지럼증과 함께 엘로렌은 그토록 염원하던 장소에 도착했다. 반쯤 무너진 세계의 끝이 그녀를 맞이했다. 세계가 그녀를 반기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처음 경험하는 황홀함이었다.
그것은 갑자기 시작되었다.
현의 아공간 주머니 안에 있던 붉은 책이 아공간 주머니 밖으로 튀어나왔다. 활짝 펼쳐진 책의 페이지가 미친 듯한 속도로 넘어갔고, 붉은 책이 붉은빛을 뿜어냈다. 연한 붉은빛은 보는 것만으로 몽롱하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다.
책에서 뿜어진 광채가 세계의 끝 전부를 물들였다. 세계가 빛으로 차올랐다.
강한 압박이 느껴졌고, 정신을 차리니 엘로렌은 땅에 쓰러진 채로 제압당해 있었다. 로한과 젭크도 다르지 않았다.
무색으로 물든 휘헌의 손이 로한의 목에 닿아 있었고, 에이네가 젭크의 목을 잡고 있었다.
“내가 바로 죽이지 않은 이유는 말 안 해도 알겠지?”
동행하긴 했지만, 현은 한 번도 엘로렌을 믿지 않았다.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의심되는 사람이었기에 곁에 뒀고, 쓸모가 있기에 이용했다.
그 증거로 현은 엘로렌에게 한 번도 이렇게 묻지 않았다.
‘네 최종 목적이 뭐냐?’
사람의 목적은 하나가 아니다. 돈도 벌고 살도 빼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공부를 하며 가족을 부양하는 게 목적인 사람도 있다.
마찬가지로 엘로렌의 목적도 하나가 아닐 수 있다. 아벨을 막는 게 목적이긴 하지만, 그 뒤에 다른 해야 할 일이 또 있다던가.
현은 엘로렌에게 목적을 물은 적은 있지만, 진짜 목적,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엘로렌이 현을 속였다면, 현은 엘로렌에게 속아줬다.
바벨이 무너진 후에 뭐가 일어나느냐. 그 질문에 선각자인 이선보다 더 정확한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계획을 꾸민 본인이다.
현이 이선이 아벨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생기자마자 엘로렌을 세계의 끝으로 데려온 이유였다.
엘로렌은 티 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현에게는 그녀가 세계의 끝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이 모두 보였다. 전부터 엘로렌은 그런 의견을 표출하곤 했다. 그리고 요 며칠 보여준 행동에선 노골적인 티가 났다.
그래서 데려왔다. 그녀가 원하는 장소에. 그리고 현은 궁금증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참 빠르시네.”
엘로렌은 가식을 벗어던졌다. 사람의 정체성에 말투는 많은 영향을 준다. 존댓말도 입에 붙었지만, 그래도 원래 말투만큼은 못했다. 보이지 않는 무거운 옷을 벗어던진 듯 속이 뻥 뚫렸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일단 그녀부터 풀어주게.”
잠자코 있던 로드의 입이 열렸다. 현은 지그시 로드를 노려보았다.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로드가 아무리 빨라도, 지금의 현이라면 그 시간 안에 엘로렌의 사혈을 누를 수 있었다.
“그럼 알아서 하게. 그래도 죽이진 말고.”
로드가 고개를 들었다. 현의 고개로 따라 하늘로 올라갔다. 세계의 끝에 하늘은 없다. 평소에는 하늘의 모습을 한 막이 하늘을 덮고 있다. 눈에 마력을 집중해봐야 보이는 건 구름밖에 없다.
현은 딱 두 번 세계의 끝의 하늘을 봤다. 그리고, 오늘로 세 번째가 되었다.
하늘이 열렸다. 하늘을 막고 있던 막이 사라지며 진짜 하늘이 나타났다. 진짜 하늘에는 구름도, 태양도 없었다.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이 끝없이, 끝없이 위로 드리워져 있었다.
붉은 책이 뿜는 빛도 어둠을 보는 시야를 방해하진 못했다.
“으윽.”
엘로렌의 신음에 현은 무심코 힘을 줬던 손에 힘을 풀었다. 저건 진리다. 세계의 끝이 만들어진 목적이며, 이 세계를 유지하고 움직이는 법칙. 눈에 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형이상의 세계가 세계의 끝이라는 특이점에 와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끝없는 형태의 어둠이지만, 현이 보고 있는 건 분명 존재하고 있었고, 감각할 수 있었다.
하늘의 어둠은 다함이 없었다. 그 높이가 다함이 없었고, 그 길이가 다함이 없었다. 지평선 없는 세계의 끝의 저편까지가 모두 진리였고, 하늘에 눈 가는 곳 전부가 진리였다.
여기에 올 때마다 주술사와 술법사들이 이런 말을 중얼거리곤 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것, 그게 사람이다.
맞는 말이었다. 끝없는 땅과 한없는 하늘 사이에는 사람만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붉은 책은 여전히 빛을 뿜고 있었고, 광적이고 몽환적인 빛 또한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세상에 화신이 나타나기 시작한 건 세 번째 재앙부터야.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
“에이네가 하나 더 늘어난 것 같아서 짜증 난다는 건 알겠군.”
“내가 뭐?!”
에이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창백해진 젭크가 에이네의 손을 두드렸다. 마력 흡수 능력을 가진 에이네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있어 천적이지만, 마법사의 경우는 특히 심하다.
마력 흡수 능력자에게 접근을 허용한 마법사는 힘 센 일반인으로 돌아간다.
현은 에이네의 외침을 무시했다. 두 번째 재앙 광기는 존재한다. 신자는 존재하지만 화신은 없었다? 현이 고민하는 사이 에이네는 답을 냈다. 단서만 있다면, 나노 머신은 찰나에 수만 가지의 가설을 내놓고 검토할 수 있다.
“바벨?”
“맞아. 광기의 화신은 아직 살아 있어. 아니, 한 번도 살아 있었던 적이 없다고 할까. 광기의 화신은, 바벨과 같은 진리의 일부야. 그로써 세계를 움직이는 하나의 법칙을 담당하고 있지. 몬스터의 종족신이자 창조신 광기. 그게 두 번째 재앙의 진짜 정체.”
현은 붉은 책의 내용을 떠올렸다. ‘그것’에 접하는 사람들은 미쳤고, 또 외형이 변했다. 그렇게 몬스터가 탄생했다.
몬스터가 마력이 있는 세계에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라면, 몬스터가 존재하지 않는 차원의 존재가 설명되지 않는다. 그 어떤 차원도 근원 세계같은 몬스터가 있다는 기록은 없다.
근원 세계와 다른 세계의 마력 차를 고려해도 설명할 수 없는 차이였다.
두 번째 재앙, 광기에 의한 현상이라면 모두 설명된다. 몬스터와 광기를 떼어놓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거였다. 그 둘은 처음부터 하나였다.
“그것과 지금 상황이 무슨 상관이지?”
“상관있지. 사실 바벨의 붕괴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어. 바벨 붕괴의 영향은 내가 죽고 난 후에야 나타날 거니까. 내가 노렸던 건 처음부터 책을, 광기의 잔재를 여기 가져오는 거였어.”
“그 후엔? 무슨 일이 일어나지?”
“직접 봐.”
엘로렌은 고개를 옆으로 들어 하늘을 보았다. 광기의 잔재가 뿜어낸 광기가, 진리를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타고 올랐다. 한이 없는 검은 진리에 광기의 붉은 선이 그어졌다.
붉은 책이 발광을 멈췄고, 떠돌던 빛들은 차례로 진리로 빨려 들어갔다.
그녀는 그 진리를, 움직이는 밈을 확인하며 눈물 흘렸다.
세계의 법칙이 변하고 있다. 무결한 진리에 침투하는 한 가닥 광기를 보고 있노라면 그녀는 죽어도 좋았다.
저 작은 균열이 문명을, 밈을 단절시킬 것이다. 아름답지 아니한가.
계승되는 모든 정신의 단절을 위해! 그녀에겐 진리 안에 있는 밈의 화신이 역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진리에 기생하는 재앙은 바벨과 광기만이 아니다. 밈 또한 저 안에 있다.
바벨과 광기, 세계에 맹위를 떨치는 두 개의 재앙이자 문화. 이것만큼 먹음직스러운 밈의 먹이가 또 있을까.
밈의 화신은, 탄생 직후부터 진리라는 형태로 쭉 저 하늘에 있었다.
“이제부턴 내가 설명하지.”
완전히 넋을 놓아 제정신이 아닌 엘로렌을 대신해 로드가 입을 열었다.
“밈이 바벨을 무너뜨리려는 건 부수적인 이유에 불과하다. 네가 알다시피 바벨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무너진다. 그걸 위해 굳이 목숨을 걸 이유가 없지. 재앙에겐 수만 년도 잠깐의 시간일 뿐일 테니.”
“어… 바벨이 자동으로 무너져?”
에이네가 멍청하게 물었다. 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 파악 좀 하라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휘헌까지 눈을 휘둥그레 뜬 걸 보고 참았다. 바벨의 상태에 대한 정보는 무너진 위원회에서도 아는 사람이 몇 없던, 근원 세계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비밀이었다.
“무수한 사람이 차원 이동을 시도했으나, 그 중 성공한 사람은 한 줌도 안 돼. 초월자들도 예외는 아니야. 그런데 근원 세계는 지금도 수십, 수백만의 인간을 차원을 넘어 불러들이고 있지. 심지어 소환 과정에서 육체적 손상은 없고, 최고 수준의 기억 삭제까지 받아. 그들이 받아야 할 대가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을까?”
“바벨 시스템?”
에이네의 말에 로드가 대답했다.
“사람의 몸으로 차원을 넘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게 진리, 세계의 법칙에 의해 허락된 일이라면 다르다. 모든 세계의 근원 되는 세계인 근원 세계의 진리에 따라, 사람은 차원을 넘을 수 있다. 그게 바벨 시스템의 또 다른 기능이다. 하지만 바벨은 진리인 동시에 재앙. 진리로서 존재하기만 한다면 근본이 훼손되는 일은 없다. 그러나 바벨 시스템은 차원을 이동해오는 사람에게 주어질 대가를 대신 지불하고 있다. 그 대가는 근본의 훼손, 진리의 훼손이다.”
드래곤 로드. 최강의 종족에서도 최강의 이름을 가진 자가 평생 세계의 끝에서 바벨을 지키고 있는 것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진리를 관측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것도 전부 끝이지. 슬슬 반응이 오지 않아, 로드 씨?”
현에게 깔려 있던 엘로렌이 눈을 희번덕였다.
“당신이라면 아벨에게 들어서 알고 있잖아? 드래곤은 원래, 몬스터였어야 하는 종족이라는 걸.”